역사에 길이 남을 경자년의 마지막 주다. 유례없는 바이러스로 세계가 마비됐고, 스포츠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행인 건 늦게나마 공은 굴러갔다. 더 나아가 선수들이 빼어난 활약으로 팬들을 위로했다. 특히 해외에서 ‘코리안 파워’가 뿜어져 나왔다. 2020년이 다 가기 전에 영광적인 순간들을 되짚어보자.

손흥민 골 세리머니.연합뉴스

EPL 첫 '해트트릭'부터 '푸스카스상'까지…2020년은 손흥민의 해

손흥민을 빼고 올해를 논할 수 없다. 올 시즌 ‘월드클래스’ 반열에 제대로 올랐기 때문이다. 지난 9월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가 개막하자마자 한 경기에서 4골을 몰아치며 축구계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기록 경신은 덤이었다. 유럽 무대에서 통산 98골을 터트렸던 ‘한국 축구 아버지’ 차범근을 넘어섰다.

기분 좋은 소식은 끝이 없었다. 손흥민은 지난 10월 EPL이 선정한 ‘이달의 선수’로 등극한 데 이어 최근 3개월 연속 ‘이달의 골’을 독식했다.

화룡점정까지 찍었다. 1년간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멋진 골을 선정해 주는 ‘푸스카스 상’을 한국인 최초로 받았다. 아시아로 범위를 넓혀도 2번째다.

손흥민이 FIFA 선정 푸스카스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FIFA

지난해 12월 번리와의 리그전에 나선 손흥민은 토트넘 진영부터 공을 잡아 총 71.4m를 전력으로 질주, 무려 6명을 제친 뒤 득점에 성공했다. 이 골은 독보적이었다. 최종 3인에 오른 루이스 수아레스의 절묘한 힐킥도, 히오르히안 데 아라스카에타의 바이시클 골도 경쟁이 되지 못했다.

제대로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내고 있는 손흥민은 벌써 리그에서 두자릿수 득점을 올렸다. 득점왕 경쟁에도 힘을 얻고 있다. 그토록 열망하던 리그 우승도 올해 적기라는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옆 나라 해외파 선수들은 아쉬운 시즌을 보냈다. 주전 경쟁에서 밀린 이강인(발렌시아)은 이적설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고, 설상가상으로 코로나19 양성 판정까지 받으며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바이러스에서 완치됐지만, 팀 내 입지가 불안한 건 현재 진행형이다. 독일과 벨기에에서 뛰고 있는 황희찬(라이프치히)과 이승우(신트트라위던)도 마찬가지다.

프랑스에 있는 황의조(보르도)도 시즌 초반 잠깐 하락세를 보였지만, 12월 들어 늦은 첫 골을 신고하며 반등을 알렸다. 정우영, 권창훈(이상 프라이부르크), 이재성(홀슈타인 킬) 등도 교체와 풀타임을 오가며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

2020년. 코로나19로 인해 세계가 시름했다. 종식을 희망했지만, 완전한 빛은 보지 못했다. 선수들로부터 들려오는 희소식이 한줄기 빛과 같았다.

왼쪽부터 류현진, 김광현, 최지만, 추신수.연합뉴스

'야구 종주국' 미국 휩쓴 '코리안 몬스터' 4인방

올 시즌 메이저리그(MLB)엔 ‘코리안 몬스터’가 여럿 있었다. ‘0순위’ 류현진(토론토 블루제이스)과 처음 빅리그에 발은 담근 김광현(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한국인 타자 최초로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은 최지만(템파베이 레이스)이 그 주인공이다. 물론 ‘베테랑 타자’ 추신수(텍사스 레인저스)도 있다.

류현진은 단축시즌으로 치러진 올 시즌 5승 2패, 평균자책점 2.69, 72탈삼진을 기록했다. 좌완 투수들 중에서 다승 공동 3위, 평균자책점과 탈삼진은 각각 2위에 오를 만큼의 호성적이다. 시즌 직전 LA다저스에서 토론토로 유니폼을 바꿀 때 우려됐던 큰 부상도 없었다.

1선발 역할을 톡톡히 한 류현진은 토론토를 4년 만의 가을야구 무대로 이끌었다. 그 공을 인정받아 아메리칸리그 사이영상 3위에 올랐다. 메이저리그 최고 왼손 투수에게 주어지는 '워런 스판상'까지 거머쥐었다. 한국인 최초다.

또 한 명의 한국인 선발자원 김광현도 화려한 첫 시즌을 보냈다. 재수 끝에 미국 무대에 입성한 김광현은 불펜으로 출발해 영광적인 첫 세이브를 올렸다. 이후 선발로 보직을 변경, 날개라도 단 듯 펄펄 날았다. 총 8경기에 나서 39이닝을 소화, 3승1세이브 평균자책점 1.62라는 기분 좋은 성적표를 작성했다.

한때는 신인상 주인공으로 거론될 정도였다. 현지 매체의 극찬도 이어졌다. 김광현에게 A등급을 매길 정도로 활약을 높게 평가했다. 김광현은 이미 내년 시즌 선발 자원으로 낙점되며 앞으로를 기대케 했다.

최지만도 잊지 못할 한 해를 보냈다. 내로라하는 선수들만 밟을 수 있다는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았다. 한국인 타자로 최초였다. 포스트시즌 통산 13안타를 작렬하며 한국인 최다 안타 기록을 세웠다. 그가 가을무대에서 남긴 기록 하나하나가 곧 역사였다. 특히 최지만이 아메리칸리그 디비전시리즈에서 ‘세계 최고 몸값 투수’ 게릿 콜(뉴욕 양키스)을 상대로 홈런을 작렬한 장면은 두고두고 회자될 명장면이다.

이들과 비교하면 주가는 떨어지지만 추신수도 묵묵히 제 갈 길을 갔다. 2020시즌을 끝으로 소속팀 텍사스와 계약이 만료되는 추신수는 올해 33경기에서 타율 2할3푼6리 5홈런 13타점의 성적을 올렸다. ‘베테랑 타자’ 기대에는 못 미치는 결과지만, 마이너리그 선수단을 위한 ‘통큰 기부’를 하는 등 경기 외적으로 리더다운 모습을 보였다.

세계 골프계 호령…6시즌 연속 정상 지킨 한국

티샷 후 타구 방향을 바라보는 임성재.연합뉴스

한국 프로골퍼 선수들이 이번에도 태극마크 자국을 선명하게 남겼다. 지난해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신인상을 차지했던 임성재는 올해 3월 혼다 클래식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다. 11월 마스터스에서는 아시아 선수 최고 성적인 준우승을 차지하며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세계랭킹이 이를 말해 준다. 이달 중순 발표된 남자골프 세계 랭킹에서 임성재는 20위에서 18위로 올라섰다. 아시아 톱 랭킹이다. 마쓰야마 히데키(일본)가 기록한 21위가 그나마 임성재에 근접한 순위였다.

여자 선수들도 세계를 평정했다. 미국여자골프(LPGA) 시즌 최종전 우승, 상금왕, 올해의 선수, 그리고 최다승 국가 기록까지. 모두 ‘K-골프’가 휩쓸었다. 마지막 메이저대회인 US오픈 트로피도 한국의 몫이었다.

US여자오픈 골프 대회에서 우승한 김아림.연합뉴스

익히 알려져 있던 선수들 뿐만 아니라 이름이 다소 생소했던 한국 선수들까지 빛났던 올 시즌이다. US오픈에서 비회원 자격으로 출전한 김아림이 우승 ‘대형사고’ 치며 안 그래도 높았던 한국 골퍼의 위상을 더 드높였다.

고진영(왼쪽)이 19일(한국시간) 챔피언스골프클럽에서 열린 CME그룹 투어챔피언십 2라운드를 마친 뒤 함께 플레이한 김세영과 주먹을 맞대며 인사하고 있다.연합뉴스

고진영과 김세영도 두 말하면 입 아플 정도로 맹위를 떨쳤다. 세계 랭킹 1위 고진영은 LPGA 투어 시즌 최종전 CME그룹 투어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2년 연속 상금왕(166만 7925달러)에 올랐다. 코로나19 여파로 LPGA 투어 18개 대회 중 겨우 4개 대회에만 출전해 이뤄낸 성과다.

같은 대회에서 고진영과 막판까지 엎치락뒤치락했던 김세영은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지만 생애 첫 ‘올해의 선수상’ 수상의 기쁨을 만끽했다.

올해 바이러스 여파로 기존 33개에서 18개 대회만 열린 LPGA 투어에서 한국선수들은 무려 7승을 합작했다. 물리적 이동 거리가 유리했던 미국(6승)을 제치고 6시즌 연속 투어 최다승국 자리를 꿰찼다.

바이러스가 급속도로 퍼지기 전인 2월 호주 빅 오픈에서 박희영이 우승 스타트를 끊었고, 호주여자오픈에서는 박인비가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후 시즌이 중단 등의 어수선한 시간이 흐르고 9월 ANA 인스피레이션에서 이미림이 생애 첫 메이저대회 챔피언에 올랐다. 10월에는 KPMG 여자 PGA 챔피언십에서 김세영이 목말라 있던 생애 첫 메이저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기세를 몰아 김세영은 11월 펠리컨 챔피언십에서도 우승했다.

여기에 US여자오픈에서 김아림의 ‘깜짝우승’과 시즌 최종전에서 고진영이 정상에 오르며 피날레를 장식했다.

손흥민의 해트트릭을 시작으로 고진영의 마침표 우승까지. 세계 각지에서 해외파 선수들이 전대미문의 바이러스로 인해 답답했을 팬들을 위로해준 2020시즌이었다.



노진주 스포츠한국 기자 jinju217@sportshankoo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