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2001년 1월 12일. 울산광역시 동구 서부구장에서는 많은 취재진이 푸른눈을 가진 한 외국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외국인이 훈련장에 들어서자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고 열띤 취재열기를 보였다. 축구대표팀 역사상 첫 외국인 감독 거스 히딩크가 대표팀을 맡아 첫 훈련을 시작한 것이다.

월드컵 4강 신화 이후 카퍼레이드를 하는 히딩크 감독. AFP

레알 마드리드와 네덜란드 대표팀 등을 지휘하긴 했지만 월드컵 1승도 하지 못한 한국을 이끌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반신반의했던 것이 사실. 하지만 그렇게 출항한 히딩크호는 1년 반 후 한국 근현대사의 위대한 족적으로 남은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루며 ‘전설’이 된다.

전국민이 하나가되어 '붉은악마'가 됐던 2002 한일월드컵. AFP

이 전설의 멤버들은 첫 소집 후 20년이 지난 2021년 현재, 대부분 감독이나 코치 등 지도자로 활약하거나 프로축구단의 최고 책임자에 오르는 등 한국축구 사상 최고의 `황금세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강산이 두번 바뀐 20년 풍파에 하늘을 찌를듯 했던 넘치는 의욕과 혈기는 잦아들었지만 찬란한 영광이 만들어낸 빛나는 경험과 연륜으로 한국 축구를 이끌어가는 ‘리더’로 활약하고 있다는 점에서 축구를 넘어 사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진기한 상황이 현재 한국축구계에서 일어나고 있다.

한일월드컵 터키전 이후 선수단에 헹가래를 받는 히딩크 감독. AFP

한국 축구를 이끌어가는 '2002 황금세대'

홍명보, 황선홍 등 베테랑 선수들은 2002 한·일 월드컵을 끝으로 은퇴했지만 베테랑과 어린선수들 사이에 가교 역할을 했던 안정환, 이영표, 김남일 등은 이후 대표팀의 주축으로 활약한다. 박지성, 이천수, 차두리 등 신예 선수들은 네덜란드, 스페인, 독일 등 해외무대로 진출해 차범근 이후 사실상 명맥이 끊겼던 유럽진출의 물꼬를 텄다.

특히 박지성, 이영표 등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토트넘 훗스퍼 등 명문클럽까지 뛰며 활약하며 아시아 최고 선수로 우뚝 섰다. 지금 젊은층에게 큰 인기가 있는 해외축구 시청 문화는 2002 세대로 인해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일 월드컵 멤버는 2010 남아공 월드컵까지 이후 8년간이나 더 주축으로 활약하며 사상 첫 원정 월드컵 16강을 일궈내는데 핵심역할을 해낸다. 새로운 역사를 쓴 것이다.

2017년 현영민의 은퇴를 마지막으로 한일월드컵 4강 신화 멤버들은 모두 현역에서 은퇴했다. 하지만 2002 한일월드컵 멤버는 한국축구의 황금세대로 선수 은퇴 후에도 여전히 큰 영향력을 행사 중이다.

2021년 1월 현재 현역 감독만 해도 김남일(성남FC 감독), 김태영(천안시청 감독), 설기현(경남FC 감독), 이민성(대전 하나시티즌 감독), 윤정환(일본 제프 유나이티드 감독), 홍명보(울산 현대 감독)로 6명이며 감독직을 거친 이들은 최진철(전 포항 스틸러스), 유상철(전 인천 유나이티드), 최용수(전 FC서울), 황선홍(전 대전 하나시티즌)까지 10명이다. 23명 중 10명이나 감독이 된 것이다.

나머지 멤버들도 협회나 구단, 방송인으로 맹활약하면서 전설의 명성을 잇고 있다.

행정직으로는 이영표(강원FC 대표이사)와 이천수(전 인천 유나이티드 전력강화실장), 홍명보(전 대한축구협회 전무), 박지성(전 대한축구협회 유스전략본부장) 4명이나 진출했다.

최태욱은 현재 축구대표팀 파울루 벤투호의 코치며 김병지, 송종국, 안정환, 현영민, 이천수, 박지성 등 현장에 있지 않은 이들은 방송을 주업으로 삼아 인물 그 자체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이들의 한마디 한마디는 예능적으로도 큰 웃음을 주고, 대표팀 경기 때는 해설로 한마디 한마디 대표팀과 한국축구에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단순히 선수들뿐만 아니라 코칭스태프 역시 역대급이었다. 암으로 투병하다 지금은 고인이 된 베어벡 코치는 이후 한국 대표팀 수석코치를 거쳐 감독까지 올랐고, 호주 대표팀 감독을 지내기도 했다.

박항서 코치는 부산 아시안게임 대표팀 감독을 거쳐 경남FC, 전남 드래곤즈, 상주 상무 감독을 거쳐 현재는 베트남 축구의 영웅으로 대표팀을 지휘하고 있다. 정해성 코치도 지난해까지 베트남 프로축구 호찌민FC 감독으로 축구한류를 이끌었다.

전력분석관으로 한국 축구에 전력 분석이라는 것을 들여온 압신 고트비는 훗날 히딩크가 떠난 뒤에도 베어벡과 함께 대표팀 코치로 부임했고 이를 인정받아 이란 대표팀 감독까지 지내기도 했다. 이후 일본 J리그와 태국리그를 거쳐 지금은 중국의 스좌장 융창 지휘봉을 잡고 있다.

히딩크 감독은 한일월드컵의 대성공을 바탕으로 2006 월드컵에서는 호주를 이끌고 16강을, 러시아 대표팀 지휘봉을 잡고 유로 2008에서는 3위의 대성과를 이뤄내며 세계적 명장 반열에 올랐다. 이후 EPL의 첼시, 터키 대표팀, 네덜란드 대표팀 등을 거치기도 했고 지금은 75세의 나이에 네덜란드령 퀴라소 대표팀 감독으로 축구약소국에 축구를 뿌리내리고 있다.

거스 히딩크. 연합뉴스

20년전, 한국은 왜 히딩크를 택했을까

가장 먼저 당시 대한축구협회이 히딩크 감독을 선택한 이유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1무2패 참담한 성적에 1998 방콕 아시안게임 8강 탈락, 2000 아시안컵 3위, 2000 시드니 올림픽 조별리그 탈락 등으로 한국축구는 바닥을 찍었다 . 반면 공동개최국인 일본은 프랑스월드컵을 통해 사상 첫 월드컵 진출, 2000 아시안컵 우승 등으로 상승곡선을 그렸다. 일본은 프랑스 출신의 필립 트루시에 감독 부임 후 미우라 카즈요시 등의 베테랑과 나카타 히데요시로 대표되는 유망주들의 조화로 아시아 축구의 새로운 강호로 떠올랐다.

부진과 옆나라 일본의 외국인 감독 성공으로 ‘우리도 판을 갈아보자’는 분위기가 일었고 1998 월드컵에서 한국에 0-5 충격적인 대패이자 차범근 감독의 경질을 부른 히딩크 감독이 한국에 도착한다. 히딩크 감독은 한국 대표팀을 맡기 전 PSV아인트호벤-발렌시아-네덜란드 대표팀-레알 마드리드 감독을 맡았을 정도로 경력이 엄청났다.

그렇다면 이런 엄청난 경력의 감독을 대한축구협회는 어떻게 영입할 수 있었을까.

협회에서 히딩크 감독을 만났을 때 히딩크는 거절할 요량으로 들어주기 힘든 조건을 제시했다. 첫 번째는 대표선수 소집을 사실상 무제한으로 하게해달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평가전을 가지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여기에 선수선발 등의 감독권한에 대한 전권 보장까지 요구했다.

하지만 절박했던 대한축구협회는 이 조건을 모두 승낙했고 실제로 대표팀은 거의 1년내내 소집되다시피 했고 북미, 중남미, 유럽, 중동 등을 가리지 않고 떠나 평가전을 가졌다. 또한 이름값대신 박지성으로 대표되는 무명선수들도 대거 발탁될 수 있었다. 히딩크는 자신의 무리한 조건을 모두 들어줬으니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렇게 낯선 푸른 눈의 이방인은 자신이 2년전 5-0으로 쉽게 이기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한국으로 날아왔다.

시작은 미약했고 시련도 거셌던 히딩크호

2000년 12월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한 히딩크 감독은 대한축구협회와 정식 계약을 맺었다. 히딩크 감독과 함께 지금은 고인이 된 핌 베어벡 코치, 얀 룰프스 테크니컬 코디네이터, 압신 코트비 분석관, 그리고 한국의 박항서, 정해성, 김현태 코치로 코칭스태프가 꾸려졌다.

1월 울산 훈련을 시작으로 히딩크 감독은 옥석찾기에 돌입했다. 1998 프랑스 월드컵과 2000 아시안컵 주축 멤버들이 우선기회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서 맹활약을 하던 홍명보, 황선홍, 최용수 등은 물론 K리그에서 스타플레이어면서 나이도 어린 이동국, 고종수 등은 당연히 한일월드컵에 출전할 멤버로 여겨졌다. 반면 박지성, 이영표 등 일반인들에겐 무명에 가까웠던 선수들의 경우 관심 밖으로 보였다.

하지만 2001년 5월 30일 열린 ‘프레(Pre)-월드컵’ 개념인 컨페드레이션스컵까지 5개월간 무려 8경기나 치르며 히딩크 감독은 빠르게 옥석을 가렸다. 그렇게 컨페드레이션스컵이 시작됐고 유로 2000 우승팀인 프랑스를 상대로 한국은 대구에서 0-5 참패를 당하게 된다.

5월 컨페드레이션스컵에서 프랑스전 참패 이후 열린 A매치는 8월 체코 원정이었다. 히딩크호는 ‘강호’ 체코를 상대로 또 다시 0-5로 패하며 히딩크 감독은 불명예스러운 ‘오대영’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다. 게다가 이 대회에 공동개최국이자 영원한 라이벌인 일본이 결승까지 오르자 국내 여론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첫 외국인 감독의 불만족스러운 성과에 국내 여론은 비난으로 가득했고 히딩크 경질론까지 일었다. 만약 이때 히딩크가 경질됐다면 어땠을까. 생각만으로 아찔하다.

2002 한일월드컵 포르투갈전에서 골을 넣고 기뻐하는 박지성과 히딩크 감독. AF

시련 딛고 전설이 된 히딩크호

경질 위기까지 몰렸지만 정몽준 당시 대한축구협회장 등의 든든한 지원을 받은 히딩크 감독은 우직하게 나아갔다. 그속에서 무명에 가까웠던 박지성, 이영표, 송종국, 김남일은 물론 아직 대학에 다니고 있던 현영민, 차두리 등 새얼굴들이 발탁됐다.

반면 대표팀 붙박이에 국민적 인기가 높던 홍명보, 안정환 등이 대표팀에서 탈락하기도 했다. 비난여론이 거셌지만 히딩크 감독의 ‘충격요법’으로 홍명보, 안정환뿐만 아니라 기존 대표팀 선수들도 경각심을 갖고 새로운 마음으로 임했다.

2002 한일월드컵 첫 경기를 한달반도 앞두지 않은 4월.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할때까지도 히딩크호를 향한 우려는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월드컵 직전 열린 3번의 평가전에서 스코틀랜드를 4-1로 대파하고, ‘축구종가’ 잉글랜드에 1-1로 비기고, 1년전 0-5로 졌던 월드컵 챔피언 프랑스에 2-3으로 아쉽게 패하자 전세계가 한국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결국 조별리그 폴란드전 승리부터 시작해 포르투갈전 승리로 월드컵 16강행을 확정하고 16강 이탈리아전에서 0-1로 뒤지고 있다 경기종료 직전 설기현의 동점골로 연장전을 가 안정환의 골든골로 8강에 향하며 아시아 축구 첫 월드컵 8강 진출의 기적을 쓴다.

‘무적함대’ 스페인을 상대로 8강에서 승부차기 끝에 승리해 4강진출의 신화를 쓴 한국은 독일에게 0-1로 패하며 아쉽게 질주를 멈췄지만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깨지기 힘든 월드컵 4강의 기적을 일궈냈다.

그 첫 걸음이 시작한 2001년 1월이 20년 지난 현재, 한국축구는 여전히 ‘2002 월드컵’의 그늘 아래 당시 구성원들이 한국 축구를 이끌어 나가고 있다.

히딩크호 소집 20주년, 2021년 지금 그들은?

선수

1.이운재(전북 현대 코치) 2.현영민(K리그 해설위원) 3.최성용(중국 상하이 선화 코치) 4.최진철(중국 네이멍구 코치) 5.김남일(성남FC 감독) 6.유상철(인천 유나이티드 명예감독) 7.김태영(천안시청 감독) 8.최태욱(축구대표팀 코치) 9.설기현(경남FC 감독) 10.이영표(강원FC 대표이사) 11.최용수(전 FC서울 감독) 12.김병지(유튜브, 문화진흥원 운영) 13.이을용(전 제주 유나이티드 코치) 14.이천수(전 인천 유나이티드 전력강화실장) 15.이민성(대전 하나시티즌 감독) 16.차두리(FC서울 U-18 오산고 감독) 17.윤정환(일본 제프 유나이티드 감독) 18.황선홍(전 대전 하나시티즌 감독) 19.안정환(방송인) 20.홍명보(울산 현대 감독) 21.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홍보대사) 22.송종국(방송인) 23.최은성(중국 상하이 선화 코치)

코칭스태프

히딩크 감독=네덜란드령 퀴라소 대표팀 감독 핌 베어벡 코치=사망 박항서 코치=베트남 대표팀 감독 감독 정해성 코치=전 베트남 호찌민FC 감독 김현태 코치=베트남 대표팀 코치 압신 코트비 분석관=중국 스좌장 융창 감독



이재호 스포츠한국 기자 jay12@sportshankoo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