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세 10개월 28일. 일반인이라면 사회생활을 막 시작할 나이에 박인비(33)는 모든 걸 다 이뤘다. 지난 2016년 6월 여자 골프선수들의 꿈인 LPGA 명예의 전당에 역대 최연소로 입성한 것. 그러나 골프선수로 가능한 대부분의 타이틀을 너무 이른 나이에 일궈낸 때문일까. 승승장구하던 그는 어느 순간 ‘침묵의 살인자’라는 별칭이 무뎌지게 들릴 만큼 예리함이 줄어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헝그리 정신이 사라졌다’ ‘배가 불렀다’ 등등 여러 뒷말이 나돈 것도 무리는 아니었고 마땅히 부정할 근거도 부족했다.

한국시간 29일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통산 21승을 거둔 박인비가 기아 클래식 우승 트로피를 들고 있다. 연합뉴스

2018년 3월 19승 이후 지난해 2월 20승째를 거둘 때까지 1년 11개월 동안 ‘무관’에 그쳤다는 이유만으로 혹독한 지적이 따랐다.

다른 선수라면 결코 듣지 않아도 될 말이었지만 그 대상이 박인비였기 때문에 억울함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박인비는 희미해진 목표의식 탓에 걸음을 잠시 멈췄을 뿐 필드를 호령하던 ‘야성’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지난달 28일 올 시즌 첫 출전대회였던 KIA클래식에서 4라운드 내내 선두를 놓치지 않는 와이어투와이어 우승으로 21승째를 올리며 ‘여왕의 귀환’을 알렸다. 무엇이 박인비를 달라지게 했을까. 눈앞에 사냥감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도쿄올림픽.

너무 빨리 모든 걸 이룬 박인비

2016년 6월, 고작 27세의 나이에 박인비는 LPGA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다. 2007년 LPGA 투어에 입성한 지 10년만에 골프역사에 전설의 반열에 올라선 것.

2021년 3월 현재, 역대 25번째 명예의 전당에 들어선 박인비 이후 5년간 명예의 전당에 입회한 선수는 없다. 2007년 박세리 이후 무려 9년만이자 역대 최연소 명예의 전당 입성이었다. 너무나도 압도적이었다. 특히 모든 골퍼들의 목표인 메이저 대회에서 월등한 성적(7승)을 거뒀는데 박인비보다 메이저대회 우승컵이 많은 선수는 통산 단 6명뿐이다.

이 중 메이저대회 10승을 올린 안니카 소렌스탐(스웨덴)을 뺀 4명은 1950년대에 뛴 투어 초창기 멤버들이다.

박인비는 너무 빨리 모든 걸 이룬 선수가 됐다. 평생을 해도 이루지 못할 업적을 너무 빨리 이루다보니 자연스레 동기부여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박인비에게도 슬럼프 아닌 슬럼프가 찾아왔다.

동력 잃었던 지난 5년

2015년에만 5승을 거뒀던 박인비는 그때까지 17승으로 금방 박세리의 통산 25승에 다다를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2016년 리우 올림픽 금메달 이후부터 슬럼프 아닌 슬럼프에 빠진다. 2016년부터 2020년까지 5년간 ‘고작’ 3번의 LPGA 우승에 그쳤던 것.

2017년 3월, 2018년 3월 우승 이후에는 2년간 침묵하다 2020년 2월 호주여자오픈 우승으로 간신히 5년간 3승을 채웠다. 2013년에는 한시즌에만 6승을 거둘 정도로 우승이 쉬워 보였던 박인비는 그사이 고진영, 김세영, 김효주, 박성현 등 치고 올라오는 선수들에 밀려 관심에서 멀어지는 듯 했다. 일각에서는 전성기가 끝나 쇠락하는 것으로 예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달 29일 KIA클래식에서 우승하며 통산 21승을 채운 박인비는 2021시즌 첫 출전대회부터 우승을 차지하며 그동안 잃었던 동기를 확실히 부여받았음을 내보였다.

올림픽 동기부여 생긴 박인비, 박세리 따라잡을까

박인비는 지난 2016 리우 올림픽에서 5타차 압도적 우승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12년만에 재개된 올림픽 골프에 굉장한 열망을 보였고 그해 LPGA 우승은 없어도 올림픽 금메달만큼은 확실히 목에 걸 정도로 박인비의 올림픽에 대한 목표는 뚜렷하다.

이번 역시 박인비에게 올림픽이 큰 동기부여가 됐다. 이번 우승 후 박인비는 “저에게 좋은 동기는 올림픽”이라며 올해 역시 올림픽 출전과 메달을 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밝혔다.

박인비는 “스스로 ‘올림픽이 없다면 내가 여기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며 “저에게 확실히 좋은 동기”라고 덧붙였다. 올림픽 2연패에 대한 열망을 느낄 수 있다.

올림픽이라는 확실한 동기부여가 생긴 박인비가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는 것은 곧 한국 골프 역사가 새롭게 쓰일 수 있다는 것도 의미한다. 통산 21승째를 거둔 박인비는 한국인 골퍼 LPGA 최다승 기록(25승)을 보유한 박세리에 도전할 수 있다.

박인비 스스로도 “그녀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은 늘 굉장한 영광”이라며 도전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박인비가 2015년까지 압도적인 모습을 보일 때만 해도 금방 박세리의 기록을 깰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5년간 3승에 그치며 페이스가 처지자 역시 박세리의 기록에 다다르는 것은 불가능처럼 보였다.

그러나 다시 박인비가 힘을 내고 있다. 올림픽이라는 동기부여로 시작할 박인비는 일단 세계 랭킹 상위권을 유지해야만 올림픽에 나갈 수 있기에 현재의 세계 2위 위치를 유지하기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성적이 좋아야 하고 우승까지 나온다면 더 박세리에게 다가갈 수도 있다.

올림픽을 잡으려다 보니 자연스레 박세리의 한국인 최다승 기록까지 노릴 수 있게 된 ‘동기부여된’ 박인비가 과연 어떠한 2021년을 보내게 될까. 다시 달리는 박인비를 주목해 보자.



이재호 스포츠한국 기자 jay12@sportshankoo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