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가 자신의 발치에 노란 잎들을 떨구고 가을을 증거하는 날이었다. 11월은 인디오 달력에서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다. 아직 멀리서 보면 잔디의 푸르름도 느껴지고 곱게 물든 단풍이 앞산의 풍경을 가깝게 보이게 하는 날 라운드를 했다.골프는 누구와 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 이성보다는 동성끼리가, 나이 차이가 나는 동반자보다는 비슷한 또래끼리가 더 치열하고 재미있다. 오랜 친구들과 라운드를 하다 보면 재미있는 대화가 많이 오간다. 특히 유쾌한 친구들이 있으면 라운드의 재미는 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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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홀로 이동하기 위해 카트에 모두 오르자, 구력이 오래된 친구는 한 마디 한다. “골프는 몇 명이 치는 운동입니까?”

우리는 선생님 말에 대답하는 유치원생처럼 일제히, “다섯 명”.

“네 맞았습니다. 골프는 캐디 언니를 포함한 다섯 명이 하는 운동입니다.”

이렇게 분위기를 띄워서 동반한 캐디가 어색해하지 않도록 선수를 친다. 그래서 매 홀 웃음이 그치지 않고 즐겁게 라운드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골프 내기는 ‘뽑기’를 하는 명랑 골프로 하면서 서로를 후하게 배려해 준다. 가끔 멀리건을 쓰곤 하는데 그럴 땐 이렇게 말을 한다.

“멀리건을 쓰고 싶을 땐 말을 하지 마, 애잔한 눈빛으로 캐디 언니의 눈을 3초간 바라봐. 딱 3초야.”

이 말을 들은 캐디는 웃고 만다. 그 친구는 드라이버를 잘못 쳐서 맨 먼저 카트에서 내려도 우드나 유틸리티로 맨 먼저 파온을 시킨다거나, 홀로 파온을 못하고 헤매고 다니다가도 단 한 번의 샷으로 컨시드를 받거나 홀에 떨어뜨리기도 한다. 그래서 스코어는 파 아니면 보기다. 화려하거나 요란스럽지 않고 일정하게 스코어를 유지하는 그를 보고 묻는다.

“골프를 27년 정도 치니 느는 것은 눈치와 요령 뿐이네.”

우리는 함께 웃는다. 뒤땅을 쳐서 그린에 못 미치면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네.” 하고 위안을 주고 오르막 퍼트에서 홀에 이르지 못하면 “아마추어의 90%는 오르막 퍼트를 지나가게 치지 못한다네” 하며 위로해 준다. 2단 그린에 뒤핀인 홀이었다. 모두 2단에 올리지 못해 경사면 아래에서 힘든 퍼팅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 친구가 퍼팅한 공이 너무 세서 홀을 훌쩍 지나 그린 뒤편 프린지까지 가버렸다.

“장모님이 사위 힘 좋다고 좋아하시겠어” 하자 곁에 있던 캐디가 거든다.

“남자다~잉~.” 남도 특유의 구성진 억양에 모두 웃으며 라운드를 마쳤다.

골프는 감정의 흐름에 따라 샷이 좌우되기도 하는 민감한 운동이다. 감정은 사람을 자극하기도 한다. 맘대로 공이 날아가지 않아, 뜻대로 몸이 돌아가지 않아서 화가 나기도 한다. 원인은 자신에게 있지만 주변의 탓으로 돌리고 싶은 것은 인간이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잘못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고 나면 편해지는 구석이 있다.

엄격하게 룰을 따지면서 내기 골프를 해보면 감정에 쉽게 지배당하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매 홀 내기를 하면서 승부를 가리다 보면 경기 외적인 요소가 많이 작용해서 감정소비가 많다. 내기를 하면 승부에 집착하면서 이기고 싶은 인간의 본성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실수를 하기도 한다. 안 해야 할 말이나 행동을 해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좋았던 관계를 한순간에 무너뜨리기도 한다.

인도의 속담에는 그런 말이 있다. ‘아는 사람이 잘못되면 눈물이 난다. 아는 사람이 잘되면 피눈물이 난다.’

나는 이 말이 인간의 본성 중의 한 면을 꿰뚫어보는 무서운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기 골프를 할 때면 이 말을 가슴에 담고 시작한다. 나에게도 분명 상대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존재한다. 같은 곳으로 날아간 공이 동반자는 나무를 맞고 살아 돌아오고 내 공만 오비(OB)가 되었을 때도 그렇고, 동반자의 버디와 나의 트리플 보기 상황이 그렇다.

하지만 그럴 때면 인도의 속담을 떠올리고 마음을 가라앉힌다. 그리고 목생(木生)한 동반자에게 엄지를 들어 보이고, 버디 한 사람에게 물개 박수로 기뻐해 준다.

골프 인구가 많아지면서 부킹은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스트레스 받지 말고 골프를 즐길 일이다. 모처럼 찾은 아름다운 정원에서의 산책을 쓸데없는 감정소비로 허비하기에는 그린피가 비싸다.

칼럼니스트 장보구

필명 장보구 님은 강아지, 고양이, 커피, 그리고 골프를 좋아해서 글을 쓴다. 그의 골프 칼럼에는 아마추어 골퍼의 열정과 애환, 정서, 에피소드, 풍경 등이 담겨 있으며 따뜻하고 유머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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