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과학의 신기한 '원자력' 발견20세기 과학 발전의 초석 닦은 폴란드 출신 과학자

[역사속 여성이야기] 마리 퀴리
인류과학의 신기한 '원자력' 발견
20세기 과학 발전의 초석 닦은 폴란드 출신 과학자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과학적 발전의 하나는 원자력의 발견과 그것의 이용이다. 원자력은 원자 폭탄이라는 엄청난 살상 무기를 낳았고, 이는 인류의 역사를 변화시켰다. 원자력은 의료 분야에 적용되어 암 같은 불치병의 치료를 가능하게 만들기도 했고, 때로는 거대한 동력이 되어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하는 여러 분야에 적용되기도 한다.

원자력은 인간이 그것을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인류를 완전히 죽일 수도, 완전히 살릴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다. 20세기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그 존재조차 알 수 없었던 거대한 힘인 이 원자력을 발견하고 컨트롤 할 수 있도록 과학적 초석을 닦은 사람이 있다. 그 위대한 과학자는 마리 퀴리이다.


폴란드의 가난한 천재소녀

마리 퀴리(1867-1934)의 결혼 전 이름은 마리 스클로도프스카로 폴란드 사람이다. 교사 부부의 많은 자식 중 하나로 태어난 마리는 어릴 때부터 비범한 소녀였다. 그녀는 16세에 고등학교 과정을 수석으로 마쳤다. 그러나 제정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폴란드에는 여자의 입학을 허가하는 대학이 없었다. 더 공부를 하려면 유학을 가야만 했지만 마리의 집은 이를 뒷바라지 할 경제력이 없었다.

그러나 마리는 좌절하지 않았다. 마리는 언니 브로냐와 재미있는 약속을 한다. 브로냐도 뛰어난 인재였지만 역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있었다.

마리는 자신이 가정교사로 돈을 벌어 브로냐의 유학자금을 대겠으니 대신 브로냐가 대학을 졸업하고 자리를 잡으면 자신의 학비를 대달라고 제안을 한 것이다. 언니 브로냐는 파리 소르본느대학에 입학하고 4년 뒤 의사가 된다. 그리고 마리와의 약속을 잊지 않고 그녀를 파리로 부른다. 마리는 꿈에도 그리던 공부를 파리의 소르본느 대학에서 다시 시작 할 수 있게 되었다.


소르본느에서 피에르 퀴리를 만나다

어렵게 들어간 대학이고 오랫동안 갈망하던 공부다 보니 마리의 관심을 끈 것은 오로지 학문 뿐이었다. 파리 빈민가의 춥고 좁은 방에서 거의 먹지도 자지도 않으면서 배움의 열정으로 하루 하루를 보낸 마리는 결국 물리학과 수학과를 모두 수석으로 졸업한다.

마리의 관심사는 오로지 연구 뿐이었지만 이 독특하고 천재적인 처녀에게도 많은 남성들이 구애하였다. 오로지 공부에만 정열을 쏟고 있는 쌀쌀한 그녀 때문에 아편을 먹고 자살을 기도하는 감상적인 청년이 나오기까지 했다. 그때도 그녀는 그 청년에게 냉담하게 ‘당신이 우선될 차례는 없어요’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그녀에게도 사랑은 찾아왔다. 마리는 연구소에서 8세 연상의 한 남자를 만난다. 피에르 퀴리였다. 그는 그녀에게 값싼 연애 감정을 구걸하기보다는 연구와 학문의 동지로서 다가왔다. 함께 실험을 하면서 마리는 피에르 퀴리에게 따뜻한 신뢰와 동지애를 넘어선 사랑을 느끼게 된다. 강렬한 연구욕과 단촐한 일상생활까지 마치 쌍둥이처럼 비슷하던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을 한다.


행복한 과학자 부부

마리와 피에르의 결혼은 이상적이었다. 그들은 함께 실험실로 출근했고 열악한 실험 환경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따스한 애정으로 이를 극복해갔다. 실제로 그들의 실험실은 지붕이 뚫려 비가 샜고 겨울에는 난방조차 들어오지 않아 물이 얼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개의치 않았다. 나날이 새로 배우고 발견하는 기쁨이 퀴리 부부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었다.

퀴리 부부사이에는 두 명의 딸이 태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인류 문명의 새로운 변화에 신호탄을 올리는 두 가지 광물, 즉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퀴리 부부는 우라늄으로부터 더 강력한 방사능(radioactivity; 이 방사능이라는 이름도 마리 퀴리가 붙인 것이다) 을 가진 라듐을 추출해내는 것에 성공한다.

이것은 인간이 자연 상태의 원자력을 컨트롤하고 이용할 수 있게 하는 디딤돌이 되었다. 이 거대한 발견으로 퀴리 부부는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는다. 마리 퀴리는 노벨상을 탄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피에르 퀴리의 죽음

1906년 봄 피에르 퀴리는 불의의 마차 사고로 세상을 등졌다. 남편의 죽음은 인생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던 마리 퀴리에게도 극복하기 힘든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절망 속에서도 연구 자세를 흩뜨리지 않았다. 남편의 뒤를 이어 소르본느의 교수가 된 그녀는 실험을 계속 이어 나갔다.

소르본느 최초의 여교수였던 마리는 강의를 시작하기 전엔 언제나 남편의 무덤을 찾아갔다고 한다. 학문적 동지로, 애모하는 남편으로, 두 딸의 아버지로 마리는 피에르 퀴리의 자리를 영원히 남겨 두었다.


위대한 행보

마리 퀴리는 1908년 소르본느의 명예교수가 되었고 1910년에 방사능에 대한 중요한 논문을 출간했다. 1911년 순수 라듐을 분리해낸 공로로 화학 분야에서 두번째로 노벨상을 받았으며, 1914년 파리대학교 라듐 연구소가 건립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마리 퀴리는 피에르 퀴리와 자신의 연구를 자기들의 것으로만 돌리지 않았다. 그녀가 행한 모든 실험과 결과는 아무런 조건없이 개방되었다. 열악한 환경의 실험실에서 방사능에 노출되며 고생스럽게 이루어낸 모든 업적을 인류에게 돌린 것이다.

마리 퀴리의 투철한 인류애는 세계 1차 대전 중에 또 한번 발휘된다. 그녀는 뢴트겐이 발견한 X-선과 자신이 발견한 방사선을 이용해 전쟁에서 부상당한 많은 병사들을 직접 병원에서 치료하였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오로지 연구 속에서만 기쁨을 찾으며 그 결과 또한 자신의 안위를 위해 돌리지 않았던 마리 퀴리는 1934년 스위스의 한 요양원에서 사망한다. 20세기 과학의 진보와 인류의 거대한 변화는 작고 여리지만 강인하고 천재적이었던 한 여인, 마리 퀴리의 실험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김정미 방송ㆍ시나리오 작가


입력시간 : 2003-11-21 17:03


김정미 방송ㆍ시나리오 작가 limpid7@ms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