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적인 生을 살다간 신여성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자유인·이단아 상반된 삶의 궤적

[역사 속 여성이야기] 나혜석
혁신적인 生을 살다간 신여성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자유인·이단아 상반된 삶의 궤적


시대를 앞서 아무도 가지 않았던 곳으로 먼저 걸어간 사람들을 선각자, 선구자라고 부른다. 그들이 헤쳐나간 것이 길이 아닌 경우도 있으나 선각자가 먼저 지나간 곳에는 어떻게든 반드시 길이 생긴다. 뒷사람들은 그 길로 아무 두려움없이 나아갈 수 있다. 애초에 그곳에 길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말이다.

선각자, 선구자는 그래서 한 시대와 한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존재이지만 그 개인의 삶으로 보자면 어쩐지 비장미가 느껴지기도 한다. 먼저 깨닫는다는 것은 남보다 앞서가서 새로운 시대를 연다는 의미도 있지만 앞선 만큼 감내해야 할 개인의 대가도 크다.

20세기 초반 한반도는 이전까지는 경험하지 못했던 경제적 정치적 변화와 함께 급진적인 문화적 정신적 변화를 겪었다. 왕조는 사라지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함께 들어온 서구의 사상은 한반도 전체 사회를 혼란에 빠뜨렸다. 과거와 미래,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해 갈팡질팡하며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것이다. 여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여성 혹은 모던걸

1920년대 한국의 지식인, 도시 사회에서는 새로운 인류가 탄생했다. 이른바 모던 걸, 모던 보이의 등장이다. 이들은 새로 들어온 서구식 교육의 세례를 받고 서구 사상에 심취하여 그들의 일상과 가치관을 새로운 것에 맞춘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서는 아무런 자기반성 없이 무조건 새로운 것이라면 발벗고 따라 나서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이 모던의 기치를 높이 든 사람들은 어찌됐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고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도 컸다.

그 중에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여성이라는 의미로 스스로를 신여성이라고 부르는 일군의 지식인 여성군이 나타났다. 신여성들은 구습 속에서 차별을 받던 한반도 여성들의 삶을 해방시키고 싶어했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들 스스로가 구습을 타파한 삶을 모범으로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습득한 새로운 사상이 당시 한반도 사회에 적용될 경우 나타날 부작용이나 스스로에게 미칠 해악에 대한 충분한 검토없이 그들은 용감하고 씩씩하게 자신의 삶 자체를 실험용으로 던졌다.


여류화가 나혜석

그 중에 화가 나혜석(1896~1948)의 삶은 근대 신여성의 용감하였으나 완전하지 못했던 선각의 꿈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나혜석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 여류 화가 였다. 그녀는 수원의 부유한 개명 관료의 딸로 태어나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일본 도쿄의 여자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한 신여성의 대명사였다.

이런 말이 가능하다면 나혜석의 인생은 ‘재미있다’. 그녀는 한국 여성 누구보다 더 많은 혜택을 받고 자라난 여성이었으며 그것에 대한 자각도 컸다. 그러기에 그녀는 여성들의 가장 앞 자리에 서서 새로운 여성상을 만들어 내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들을 멈추지 않았다.

그림에서 뿐만 아니라 문필분야에까지 폭넓게 활동하며 새시대의 신여성이 나아갈 바를 열렬히 부르짖었고, 결혼 당시 남편에게 혼인 각서를 쓰게 하는 등의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연출도 서슴지않았다. 그런 한편 3.1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루고 무정부주의 단체인 의혈단의 후견인이기도 하는 등 선각자로서의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그런 그녀의 남편은 한국인이면서 일본 정부로부터 촉망받는 외교관이었고, 그녀는 열렬한 이광수의 신봉자이기도 하였다.


부부동반 유럽여행, 그리고 최린과의 짜릿한 연애

나혜석의 삶은 1927년을 전후하여 일대 전환기를 맞이한다. 남편 김우영과 함께 한 유럽순방과 파리유학이 그것이다. 꿈에 그리던 유럽에 간 나혜석은 짧은 체류기간 동안 경험한 유럽생활이 유럽의 모든 痼繭箚?오해했다.

외교관 신분으로 방문한 유럽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사실은 자각하지 못하고 그녀는 풍요로운 유럽에 심취하여 자신을 잃어 버렸다. 그녀가 유럽에서 배운 것은 서구에 대한 맹목적인 찬미와 유럽 사교계의 자유 연애였다.

그럴 즈음 그녀는 남편과 잠시 떨어져 파리에 머무는 동안 최린과 만난다. 이미 서구의 자유로운 연애 사상에 심취해있던 나혜석은 아무런 주저없이 최린과의 연애에 뛰어 든다. 그 결과 나혜석은 한국에 돌아오자 마자 남편과 이혼한다.


미완의 꿈

나혜석의 외도는 유럽에서는 그럭저럭 사랑을 택한 용감한 선택으로 보여졌을지 모르지만 당시 한국사회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일탈이었다. 나혜석에 열광하던 사람들마저도 그녀의 이런 일탈에는 등을 돌렸다.

이혼 이후 나혜석은 궁지로 몰린 자신을 스스로 변명하겠다는 철없는 생각으로 1934년 이혼고백서를 발표하고 최린에게 보상금을 요구하는 제소장을 냈다. 그러나 이것은 나혜석을 궁지에서 꺼내주기는 커녕 쉬쉬하면서 소문으로만 돌던 그녀의 외도를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었다. 이 일로 나혜석은 용서받지 못할 천하의 이단아로 낙인찍히게 된다.

이후 그녀의 삶은 비참했다. 남편 김우영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에 대한 일체의 권리도 박탈당해 자녀들과 만나는 조차 허락되지 않았으며 그녀의 도덕성에 붉은 낙인은 찍은 한국사회는 그녀가 재기하는 것을 결코 그냥 지켜보지 않았다. 천하의 나혜석이었지만 빛나는 재능과 지성을 탕진한 채 한번 잘못 들어선 진창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좌절하고 만 것이다.

20세기 초반 한국의 지식인 사회는 혼돈 그 자체였다. 그 중에서도 여성에 대한 인식은 어떤 기준도 없이 여성 개인과 사회분위기에 고스란히 맡겨졌다. 한때 한반도 여성의 가장 앞자리에 서서 나아가던 나혜석. 그녀의 선각자적인 삶은 세상의 몰이해와 스스로의 한계로 인해 겨울날 채 피지도 못하고 얼어죽은 꽃이 되었다.

김정미 방송ㆍ시나리오 작가


입력시간 : 2003-12-18 16:17


김정미 방송ㆍ시나리오 작가 limpid7@ms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