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여성이야기] 클레오파트라


아름다움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추구하는 최고의 것이다. 영국의 시인 키이츠는 ‘미는 곧 선’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때로 성적인 의미와 결부하여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독약같이 여겨지기도 한다. 아름다운 여성은 그 아름다움으로 많은 것들을 얻기도 하지만 그 아름다움 때문에 진정한 능력을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1㎝만 낮았어도 세계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는 말이 있다. 누구나 선망하는 미의 대명사이자 한편으로는 영웅들을 현혹하여 세계를 쥐고 흔든 독약같은 아름다움을 가진 클레오파트라. 그녀는 과연 요부였을까?

독약같은 아름다움의 상징

클레오파트라(BC 69~BC 30)에 대한 고정 관념은 그녀가 로마의 위대한 두 명의 영웅, 시저와 안토니우스를 차례로 사랑하였고 그녀와 사랑하던 바로 그 지점쯤에서 두 명의 영웅 모두 비극적 종말을 맞이 했다는 데서 출발한다. 클레오파트라라는 여성의 삶 자체보다는 그녀가 만났던 남자들의 인생에 의해 그녀에 대한 이미지가 고정된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당대의 영웅을 차례로 홀리고 비극적인 운명에 몰아 넣을 수 있었을까 하는 호기심에서부터 그녀의 요부로서의 이미지가 확고해진다.

그러나 사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여왕으로서 자신의 나라를 지키는 데 한평생을 고심하여 보낸 정치가이자 지략가였다. 물론 그녀 인생에서 만난 두 명의 로마의 영웅들은 그녀에게 매우 커다란 영향을 남겼다. 그녀 또한 그들의 인생을 바꾸어 놓기도 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 이 총명한 이집트의 여왕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오로지 자신의 나라뿐이었다.

총명한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69년, 당시 이집트의 수도였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아버지의 영광’이란 뜻이다.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사후 클레오파트라는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고 함께 왕위에 오른다. 이집트 왕실은 라지드법으로 근친혼을 법으로 정해 왕실의 피가 다른 피와 섞이는 것을 막고 있었다. 즉위 당시 클레오파트라가 18세.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10세였다. 당연히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의 정치를 모두 관장하게 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어려서부터 방대한 양의 독서로 당대 누구도 따를 자 없는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거기에다 클레오파트라는 천부적인 언어 능력을 보여 무역도시 알렉산드리아를 통교하던 수많은 나라의 외국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었다. 이웃하고 있는 로마가 급성장하여 이집트를 압박하는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클레오파트라. 그녀는 강성한 로마에 맞서 나라를 지키기 위한 눈물겨운 외교술과 지략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시저와의 만남

외부적으로 가까스로 이집트를 지켜내 가고 있던 클레오파트라에게 내부에서부터 위기가 커가기 시작했다. 남편이자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성장하면서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클레오파트라에게 반기를 든 것이다.

잠시 시리아쪽으로 몸을 피한 클레오파트라는 그곳에서 더 큰 위협을 만나게 된다. 로마의 장군 시저가 이집트를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내부적으로 정치적 궁지에 몰리고 외부적으로는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지혜와 미모를 이용해 난국을 타개해 갈 것을 결심한다.

시저를 찾아간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독립을 보장받는 대신에 시저의 여인이 되었다. 그리고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은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무찌를 군대를 얻는다. 결과적으로 클레오파트라는 시저의 군대로 내부의 적들을 일소하고 시저로부터 이집트의 안전과 독립을 보장 받게 된다.

안토니우스와의 사랑

시저와의 사랑은 그가 부르투스에게 암살당함으로써 끝난다. 클레오파트라는 시저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을 데리고 이집트로 돌아온다. 이제 시저에게 보장받았던 이집트의 독립은 다시 불안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시저 사후에 로마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양분체제에 놓이게 되었다. 어느 쪽이든 한쪽이 이겨야만 끝날 갈등의 시기였다. 두 세력의 다툼을 지켜보던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나라 이집트를 위해 한쪽 편을 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것도 이기는 쪽의 편을 들고 그 대신 이집트의 독립을 보장받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했다.

당시에는 옥타비아누스보다 안토니우스가 더 강력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기꺼이 안토니우스를 이집트로 불러들이고 그를 유혹한다. 처음에는 클레오파트라를 멀리 하던 안토니우스도 그녀의 매력을 뿌리치지 못하고 결국 사랑에 빠진다. 처음에는 나라를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안토니우스의 남자다움과 용맹에 끌린 클레오파트라도 곧 이어 사랑에 빠지고 만다. 두 사람은 진정으로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악티움 해전의 패배와 자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로마를 둔 마지막 한판 승부는 악티움 해전에서 결정이 났다. 안토니우스를 지지하는 클레오파트라와 이집트의 운명까지 쥐고 있던 악티움 해전은 안토니우스의 비참한 패배로 끝나고 만다. 악티움에서 후퇴하여 이집트까지 쫓겨온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품에 안겨 최후를 맞이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진정으로 사랑하였던 남자의 죽음을 목도하고 모든 희망의 끈을 놓아 버린다. 가까스로 지켜왔던 이집트의 독립도 이제는 끝이라고 생각한 클레오파트라는 과감히 자살을 택한다. 그것은 옥타비아누스의 로마 개선행렬에 포로로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모욕을 당하지 않을 마지막 방법이었다. 아름다운 옷으로 성장하고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다음 꽃 속에 누운 클레오파트라는 일부러 놓아둔 독뱀에 가슴을 물려 비장한 죽음을 맞이한다. 클레오파트라 이후 이집트는 로마의 한 속주로 전락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아름다움이 전부인 여성은 아니었다. 엄청난 노력가였으며 뛰어난 정치가였고 개인보다는 나라를 위해 자신을 던질 줄 아는 호쾌한 위정자이기도 하였다. 게다가 진정한 사랑을 끝내 죽음으로 완성한 지고지순한 여인이기도 하였다.

/김정미 방송ㆍ시나리오 작가

입력시간 : 2004-01-04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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