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반은 여자"를 외쳤다18세기 유럽서 남녀 평등을 주장한 여권주의자

[역사 속 여성이야기]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세상의 반은 여자"를 외쳤다
18세기 유럽서 남녀 평등을 주장한 여권주의자


오늘날에는 여권(女權)이라는 말이 그리 낯선 단어는 아니다. 물론 아직도 여성의 인간으로써의 권리, 즉 여권은 더 많은 부분에서 보장받고 신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는 여권을 주장할 숨구멍은 마련되어 있는 셈이다.

여성의 권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활동이 시작된 것은 고작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였다. 20세기 이전 인류의 전 역사를 통해 여성은 인간의 범주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로 정치적 권리도 경제적 권리도 행사할 수 없었다. 오직 남성의 테두리 안에서 여성은 존재하였던 것이다.

여성이 스스로를 인간으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미친 짓으로 취급되었다. 가장 진보적인 지식인도 여성의 문제에서만은 고루한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 여성이 인간이 아니었던 시대

인류 최초로 여성도 인간이며 당연히 누려야 할 인권이 있음을 주장한 사람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1797)이다. 그녀는 1792년 <여성권리옹호 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적극적으로 여성의 평등과 권리를 주장하였다.

18세기 유럽은 바야흐로 왕과 귀족에게 침탈 당했던 인권을 되찾기 위한 운동으로 물결치고 있었다.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인권의 기치 아래서 사상적으로 이를 뒷받침할 이론들을 내놓기 시작하였다. 인권에 대한 지식인들의 이론들은 세상으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전파되었다. 그런 시기에 함께 나온 것이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권리옹호였다.

그런데 그녀의 책은 다른 지식인들의 인권서가 받았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아무도 여성이 남성과 평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식인들이 주장하는 인권의 범위 속에 여성은 포함되지 않았다. 인간의 권리라는 말속에 ‘인간’은 오로지 남성만을 뜻했다. 당대 가장 진보적이라고 일컬어지며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던 로크나 루소같은 사상가들 조차도 여성은 자연적으로 남성보다 약한 존재이기에 남성과는 절대로 평등해질 수 없다는 왜곡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사회평론가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책이 나왔을 때 그녀를 ‘패티코트를 입은 하이에나’ 라고 비웃기도 하였다.

- 핍박받던 여성의 대변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그 전 생애을 통해 남성에 의해 짓밟히고 자유를 박탈당한 여성의 삶을 목도하였고 또 직접 체험하기도 하였다. 어린시절 메리는 가산을 탕진한 채 자신의 불운을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으로 상쇄하려는 아버지를 보면서 자랐다. 그녀의 어머니는 자녀들과 스스로의 생계를 위해 폭력적인 남편을 감내하면서 공포스러운 결혼생활을 이어나갔다. 당시 아내는 남편과 동등한 지위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남편의 법적인 소유물이었을 뿐이었다. 여성이 남편을 거부하고 세상에 나가 할 수 있는 일은 굶어 죽는 것 밖에는 없던 시절이었다. 메리의 여동생 일라이져는 지긋지긋한 집안을 벗어나려고 서둘러 결혼하지만 그 결혼 또한 실패하여 정신이상이 되고 만다. 메리는 남편의 폭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던 동생 일라이져를 탈출시킨다. 그녀의 이런 행동은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메리는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이 되지않기 위해서는 여성 스스로 경제권을 가져야 함을 상류층 집안의 가정교사생활을 통해 알게 되었다. 돈과 권력을 가진 상류층사회에서도 경제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여성들은 남성의 장식품으로 취급받고 있었다. 당시 여성은 상류층부터 서민까지 모두 성적 대상, 가정부, 그리고 자녀 양육모로서만 인식되었고 그에 걸맞는 교육만이 겨우 허락되어 있었다. 메리는 여성의 평등과 인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교육의 불평등부터 해소되어야 한다고 파악했고 남녀의 평등한 교육기회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 직접 체험한 남녀의 불평등한 애정 관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고 인권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던 시기,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여권옹호를 주장하는 일련의 저작물을 내놓고 인권회복의 메카였던 파리로 간다. 그곳에서 그녀는 많은 당대 지식인들과 교유하고 논쟁하며 자신의 생각을 더욱 넓혀갔다.

그런 가운데 그녀는 한 남자를 만난다. 미국인 사회평론가 길버트 이무레이였다. 그녀는 그와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실패로 끝난다. 당시 남성들은 여성을 만나 임신을 시키고 버려도 어떤 도덕적 비난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여성에게 이런 사랑의 해프닝은 치명타였다. 메리 또한 이무레이의 아이를 가진 채 버림받은 여성의 비참함을 몸소 체험하게 된다. 런던으로 다시 돌아온 메리는 템즈강에서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목숨을 끊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는 사랑에서조차도 평등하지 못한 남녀의 문제에 대해 더욱 치밀하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 새로운 부부관의 제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오랫동안 우정을 나누었던 아나키스트 윌리엄 고드윈과 재회한다. 고드윈은 상처입은 메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며 새로운 남녀관을 그녀 앞에 제시하였다. 남성과 여성이 평등하다는 전제 하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을 제안한 것이다. 오래 망설이던 메리는 제안을 받아 들인다. 두 사람은 결혼 후에도 각자의 공간을 따로 가지며 서로의 작업에는 간섭하지 않았다. 결혼 후에도 독립된 하나의 인격으로써 개인적 행동의 자유를 모색하였다. 결혼 후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여전히 독립적이라고 느낀다. 나는 앞으로 내 자신의 생각과 원칙들을 발전시킬 것이고 남편이 거부한다고 하여도 그것들을 내 아이들에게 넘겨줄 것이다.”

고드윈과 결혼 후 메리는 딸 샐리를 낳고 열흘 후 산고를 견디지 못하고 사망하고 만다. 그러나 그녀의 여성의 권리에 대한 원칙과 자유로운 생각은 딸들에게 고스란히 전수되었다. 그녀의 첫째딸 프란시스는 자유주의 사상가 시인 바이런의 애인이 되어 시인과 교유하며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았고 샐리는 현대 환타지 소설의 효시가 된 ‘프랑켄슈타인’의 작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권주장은 당대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그 진보적 성향으로 인하여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녀의 생각은 인정 당하기 보다는 무시당했다. 그러나 주머니 속의 송곳은 언제고 드러나듯이 그녀의 사상은 20세기 이후 여성의 권리와 자유를 위한 진정한 부르짖음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

입력시간 : 2004-02-26 14:25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