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칼럼] 사치의 바벨탑


봄맞이 대청소, 구석구석 별의별 물건들이 숨어있더군요. 책상 밑에서 잠자고 있던 박스 포장 그대로인 빨간색 에나멜 오픈 토슈즈, 꺼내놓고 한번 입지 않은 카멜색 모직코트며 세상에! 색상이며 모양이 똑같은 터틀넥 니트가 두벌이네요. 니트 모자는 또 예닐곱 개나 되고요.

우리는 이제 옷이 낡거나 없어서 쇼핑센터를 찾지 않습니다. 소비경제 철학자인 사이먼 패튼은 “높은 생활 수준을 영위한다는 것은 어떤 즐거움을 누리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그 즐거움을 얼마나 빨리 싫증내느냐의 문제”라고 했습니다. 새 물건을 팔기 위해 유행을 창조했지만, 결국 ‘싫증’을 해소하기 위해 유행을 뒤쫓습니다. 그렇게 넘쳐나는 풍요 속에 살고 있고, 풍요가 행복을 가져다 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풍요는 또 다른 고민을 안겨주었지요. 바로 ‘공허’입니다. 우리는 소비를 위해 일하고 삶의 공허를 보상받기 위해 소비합니다.

수필가 전혜린은 자신의 에세이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가장 비싼 물건을 입거나 신은 여자의 얼굴에는 반드시 어떤 빛나는 생기가 떠 있다’고. 그리고 이를 ‘사치스러운 복장에 대한 여성의 판타지는 억눌려진 야심 사회에서 해당하고 싶은 본질적인 욕망과 자기와 다른 여자가 다르다고 어떤 여자든지 믿고 있는 광신’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옷도 신발도 곧 닳고 유행도 바뀝니다. 자아의 바벨탑이 무너지는 것이죠. 그래서 끊임없이 탑을 쌓을 새로운 물건들을 소유하기 위해 쇼핑에 나서는 것 아닐까요.

미국의 전 대통령 로날드 레이건이 GE사의 대변인으로 있을 당시 “발전은 가장 중요한 제품”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이 발전을 중단하지 않는 한 우리의 옷장과 신발장은 바벨탑까지는 아니어도 ‘발전의 산물’들로 나날이 넘쳐 나겠지요.

박세은 패션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4-02-26 17:12


박세은 패션칼럼니스트 suzanpark@dreamw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