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으로 한 시대 풍미삼류 배우에서 퍼스트 레이디로, 신데렐라 같은 삶과 죽음대중적 인기영합 정책, 오늘날 아르헨티나 혼란의 '원흉'

[역사 속 여성이야기] 에바 페론
포퓰리즘으로 한 시대 풍미
삼류 배우에서 퍼스트 레이디로, 신데렐라 같은 삶과 죽음
대중적 인기영합 정책, 오늘날 아르헨티나 혼란의 '원흉'


"Don’t cry for me Argentina. The truth is I never left you….” (나를 위해 울지 마오. 아르헨티나 나는 그대를 떠나지 않아요) 란 가사의 노래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미국 브로드웨이의 거장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작곡한 노래이다. 이 노래의 주인공 에비타는 바로 아르헨티나의 퍼스트 레이디였던 에바 페론이다. 머나먼 남미의 퍼스트 레이디를 미국의 공연 거장이 주목한 이유는 그녀가 한 시기를 가장 극적으로 풍미했던 여인이며 그 인생 역정 또한 남다르기 때문이다. 현재 국가 부도위기에 처한 나라, 아르헨티나는 20세기 전반기에는 세계 7위의 경제 부국이었다. 그 시기 에바 페론은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퍼스트 레이디로서, 선동가로서, 정치가로서, 봉사자로서 짧은 생을 살았다. 그리고 그녀 이후 아르헨티나는 바닥없는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다.

- 팜파스의 사생아

에바 페론(1919-1952)은 아르헨티나의 드넓은 초원 지대, 팜파스에 속한 작은 마을 로스톨도스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 후아나는 인근의 농장 주인 후안 두아르테의 정부였다. 에바는 후아나와 후안 사이에 태어난 5명의 아이 중 4번째 사생아였다. 출생부터 불우했던 에바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 불행의 연속이었다. 현실을 잊기 위해 에바는 대중잡지의 기사를 읽으며 도시로 나가 화려한 배우가 되는 것을 꿈꾸었다. 그리고 그녀 나이 14세 때 팜파스의 흙먼지를 털어내고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다.

- 남자들 품을 전전하는 삼류배우

그러나 가진 것 없는 시골의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에바는 어린 나이부터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는 자기가 가진 것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에바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것. 그것은 바로 그녀의 몸이었다. 에바는 자기의 앞길을 이끌어 줄 것 같아 보이는 남자와 스스럼없이 동침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실속이 없으면 가차없이 떠났다. 에바는 여러 명의 남자를 전전하며 삼류극단의 삼류 배우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여러 남자의 품을 떠도는 가난과 비참함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을 귀엽고 순진하게 꾸미고싶어 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에비타라고 불렀다. 에비타는 꼬마 에바라는 뜻이다.

- 후안 페론과의 만남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온지 10년 만에 에바는 큰 행운을 잡는다. 당대 실력자인 ‘통일 장교단’의 리더 후안 페론을 만난 것이다. 에바와 후안은 만나자마자 서로의 이용 가치를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당시 후안은 페론주의라는 새로운 기치를 걸고 정치적 입지를 다져가고 있었다. 페론주의란 산업의 국유화, 외국 자본의 축출, 노동자 위주의 사회 정책 등 국가 사회주의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페론주의의 기치는 참신하고 바르게 보였지만 아르헨티나 현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게다가 군부에 의지하는 성격이 강해 독재로 흐를 가능성이 많았다,

에바와 후안이 동거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후안에게는 정치적 시련이 닥친다. 반 페론주의자들이 정권을 획득한 후 후안을 구금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 시련은 에바의 오랫동안 숨겨져 있던 재능을 발현시킨다. 정치적이며 선동적이고 남을 설득할 줄 아는 그녀의 재능이 애인 후안의 석방운동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더불어 가난한 대초원의 딸이라는 그녀의 출생과 인생 여정이 빈민과 노동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에바는 후안을 위해 노동자들을 부추겨 총파업을 일으킨다. 그리고 파업 10일 만에 후안은 노동자들의 환호를 받으며 풀려나와 에바와 정식으로 결혼한다.

- 에바 페론과 포퓰리즘

포퓰리즘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대중을 기만하고 대중적 인기를 정치적인 입지 확보에만 이용하는 데에 잘못 쓰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에바와 후안은 자신들의 인기를 포퓰리즘으로 이끌어 나갔다.

1946년 에바의 도움으로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 된 후안은 대중이 좋아할만한 정책을 내세우며 정권을 유지하려했다. 수많은 개혁안들이 발표되고 대중의 인기를 확보하기 위해 나라의 경제 사정을 무시한 정책들이 속출했다. 이런 페론 치세의 정치 상황은 겉으로는 노동자와 여성 등 약자를 위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속은 전혀 없었다. 외면의 폭발적 인기에 반해 실제로는 페론 부부에게 반대하는 민주적인 비판세력은 무자비하고 폭력적으로 제거되었다. 그 결과 사회는 경직되고 페론과 군부를 중심으로 하는 독재가 이루어졌다.

에바는 아르헨티나 전역을 다니며 복지사업과 봉사활동을 벌이며 성녀를 자처하였지만 실제로 사회적 약자들의 삶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페론 정권이 내건 정책들은 기본적인 사회개혁 아니라 대중을 사탕발림으로 마비시킨 후 기존의 지배구조는 그대로 지속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페론 정권시기에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이미 하향곡선을 긋기 시작했다. 그러나 에바와 후안은 이미 비판세력이 없어진 나라에서 나라돈을 자기 것처럼 마음대로 썼다. 에바의 사치는 극에 달했고 횡령한 많은 돈이 스위스 은행의 비밀계좌에 입금되었다.

- 에바에 대한 엇갈린 평가

에바 페론은 9년 간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였다. 그녀는 1952년 33살의 나이로 척수 백혈병과 자궁암에 걸려 세상을 떠난다. 아르헨티나 대중들은 에바의 죽음을 광적으로 애도했다. 한달간의 장례식은 국민이 바치는 꽃으로 뒤덮였다. 에바의 죽음 이후 그간에 숨겨왔던 페론 정권의 문제점들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무리한 경제정책이 실패로 돌아가고 끊임없는 인플레이션과 실업, 노동자의 동요 등등 후안 페론은 에바라는 방패를 잃고 문제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결국 군부마저도 후안 페론에게 등을 돌려 후안은 군부 쿠테타로 쫓겨나고 만다.

에바 페론, 혹은 에비타. 그녀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로 엇갈린다. 앞서 말한 것처럼 에바의 인생은 공연의 작품거리가 될 만큼 많은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녀 이후 아르헨티나와 남미 정국이 페론주의와 에바가 남긴 표퓰리즘의 그늘에 놓여 있어 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다. 아직도 아르헨티나의 많은 대중들은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궁핍하고 가난한 아르헨티나는 에바 페론으로부터 시작됐다.

김정미 방송ㆍ시나리오 작가


입력시간 : 2004-04-08 14:30


김정미 방송ㆍ시나리오 작가 limpid7@ms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