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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여성이야기] 이사벨 1세
위기를 기회로 만든 지략가
15세기 이베리아 반도 小國 카스티야의 여왕, 에스파냐 건국


‘ 위기는 바로 기회’ 라는 말이 있다. 땅에 닿아 있는 발 밑이 불안하다는 것은 몰락과 파멸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때론 흔들리는 상황을 박차고 나가 비상할 수 있는 찬스이기도 하다. 한 개인의 인생이든 혹은 한 국가의 역사이든 위기가 닥쳤을 때,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이후 상황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상황 판단과 대담성, 그리고 현명한 선택이 필요하다.

15세기 이베리아 반도의 작은 나라 카스티야에는 이사벨 1세라는 한 여왕이 있었다. 그녀는 위기를 기회로 돌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자신과 국가에 닥친 위기를 탁월한 지략과 배짱으로 헤쳐 나가, 자기 나라를 한때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대한 나라로 만들 었다. 그리고 유럽 역사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이 되었다.



- 정략결혼 뒤 왕위 등극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 (1451~1504) 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은 다소 복잡하고 평탄치 못했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한 카스티야와 나바르, 아라곤, 포르투갈은 모두 같은 종족으로 친인척 관계에 있으면서도 각각 다른 나라라며 호시탐탐 서로의 나라를 노리고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왕의 즉위에는 반드시 각국의 이해 관계가 얽혀 복잡한 양상이 빚어지곤 하였다. 이사벨의 경우에는 오빠 엔리케 4세의 딸 후아나 공주가 정적이 되었다. 후아나 공주는 포르투갈의 힘을 등에 업고 이사벨을 위협했다. 모든 상황이 이사벨에게 불리했다. 그녀가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마지막까지 그녀를 받쳐줄 힘이 있어야 했다. 그녀에게는 아라곤의 페르디난도 왕자가 있었다.

중세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하고 기독교를 믿었던 서고트족은 여러 아들에게 분할 상속을 했다. 그.결과 이베리아 반도는 카스티야, 아라곤, 나바르, 포르투갈로 나뉘어 졌다. 단결하지 못했던 이 네 나라는 8세기경 이슬람 세력이 팽창함에 따라 이베리아반도의 땅을 거의 다 잃어버린 채 작은 규모의 나라들로 축소되었다.

후안 2세의 두 번째 부인의 딸로 아들 엔리케 4세에 비해 세력이 약했던 이사벨은 어떻게든 자신을 도와 줄 세력을 모으는 것이 중요했다. 그녀는 이웃 아라곤의 힘을 빌렸다. 이사벨은 공주이던 시절 아라곤의 페르디난도 왕자와 비밀리에 정략 결혼을 한다. 그리고 그 힘을 빌려 카스티야의 왕위를 무사히 차지하게 된다.



왕위에 오른지 6년만에 왕위 계승 싸움을 끝내고 왕권을 안정시킨 이사벨 1세는 이제 전격적으로 카스티야와 아라곤을 통합함으로써 이베리아 반도에서 포르투갈을 물리치고 패권을 차지하게 된다. 아라곤의 왕위에 오른 남편 페르디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아사벨 1세가 만들어낸 나라가 바로 에스파냐였다.

이 두 나라의 통합에서도 이사벨은 절대 손해를 보지 않았다. 보통 여왕이 결혼하면 여왕은 남편에게 자신의 영토에 대한 모든 권리를 양도했지만 이사벨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내정면에서는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각자 종래의 독자성을 유지하고 외부적으로는 카스티야의 주도 아래 아라곤이 협조한다는 원칙을 세웠던 것이다. 게다가 페르디난도 2세는 내내 전쟁터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에스파냐에서 실권을 차지한 것은 이사벨이었다. 그녀는 현명하고 영악하게도 남편의 힘을 빌어 자신의 권리를 놓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결혼을 통해 더 강력하고 큰 힘을 얻었다.


- 남편의 힘 보태 더 큰 통치권 행사

왕권을 둔 정략적인 비밀 결혼이라는 대담한 일을 벌였던 이사벨 1세답게 그녀는 정치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배포 있는 방법을 취했다. 그 어떤 나라도 몰아내지 못했던 남부의 이슬람 국가 그라나다를 몰아낸 것도 그녀였다. 이후 그녀는 이베리아 반도에 뿌리 내리고 있었던 비기독교 세력을 잔인하게 몰아냈다. 개종하지 않은 이슬람교도는 사정없이 죽였으며 많은 유대인을 추방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그녀와 남편 페르디난도 2세가 얻은 것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받은 ‘ 카톨릭 부부왕’이라는 칭호와 이사벨 1세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였다. 당시 교황청의 지지를 얻는다는 것은 불안한 왕권을 일시에 안정시키는 가장 좋은 방편이었다.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이사벨1세는 사업에 나섰다. 당시 이웃나라 포르투갈은 새로운 항로의 개척으로 누구보다 빨리 동양과의 무역선을 이으며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에스파냐는 후발 주자였다. 따라 잡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그때 콜롬부스가 나타났다. 콜롬부스는 지구가 둥글다는 가설 臼?서쪽으로 가는 항로를 개발하면 동양에 쉽게 닿을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아무도 콜럼부스를 믿지 않았다. 콜롬부스는 사기꾼 취급을 받으며 여러 나라를 떠돌고 있었다. 포르투갈의 왕으로부터 마지막 거절을 당한 후 오갈 데 없던 콜롬부스를 이사벨 1세가 불렀다. 그리고 여왕은 그에게 항로 개척을 위한 자금과 함께 선박 2척을 제공하고 선원모집도 도와주었다. 물론 그가 들여오는 무역품에 대해서는 에스파냐가 독점권을 가진다는 조건이었다.



콜롬부스는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가 도달한 곳은 원래 가고자 하였던 인도는 아니었지만 새로운 대륙이었다. 그러나 콜롬부스의 절반의 성공은 후일 에스파냐를 한때 유럽의 가장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 준 황금밭이 되었다. 이사벨 1세는 200% 성공한 것이다.


- 유럽의 신대륙 발견 물꼬 터

현명하고 대담하며 또한 영악한 여인 이사벨 1세. 이사벨 1세 시절 이루어진 일들은 당대에 그치지 않고 그후 유럽과 세계 역사에 많은 여파를 미쳤다. 이사벨 1세의 모험으로 이루어진 신대륙 발견과 해상 활동은 다른 유럽 국가들을 부추겨 해외 식민지 개발에 열 올리게 하였다. 길게 보면 그 여파는 20세기 초반까지 지속된 서구 제국 주의와 연결되어 있다. 더불어 신대륙의 발견은 오늘날 미국이라는 강대국을 존재하게 한 단초이기도 하였다.

이런 거대한 영향을 차치하고라도 이사벨 1세가 유럽 역사에 남긴 자취는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그녀의 뒤를 이은 후아나 왕비의 아들 칼 1세는 에스파냐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헝가리, 이탈리아 등 전 유럽 중 3분의 1이상을 차지하고 20세기초까지 존속된 합스부르크 왕가를 열었다. 또한 이사벨 1세의 막내딸 캐서린은 헨리 8세에게 시집가, 훗날 이혼 문제를 일으키며 영국의 성공회를 성립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자칫하면 왕위를 빼앗겼을 수도, 또한 남편에게 모든 왕권을 양도하였을 수도 있었던 이사벨 1세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의 권리를 지켰다. 그리고 탁월한 대담성과 모험 정신으로 신대륙 발견에 이바지하여 에스파냐와 유럽의 역사를, 나아가 세계의 역사를 새롭게 그리게 한 사람이었다.



김정미 방송ㆍ시나리오 작가 limpid7@msn.com


입력시간 : 2004-06-02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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