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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여성이야기] 케테 콜비츠
독일 민중 예술의 어머니
걸개그림의 효시, 판화로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메시지 전달


예술이 사회를 위해 복무하고 또 사회를 이끌어 가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오늘날에는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인식된다. 그러나 인류의 지난 역사에서 예술작품은 사회전체보다는 일부 지배계층에 아부하는 경향이 짙었다. 그 중에서 미술작품은 아뜰리에와 화랑에 국한된 좁은 영역에서 사회를 외면하고 오로지 순수의 세계를 추구하며 발전해왔다. 이런 미술 작품을 향유하는 계층은 돈있고 권력있는 사람들뿐이었다. 대다수의 민중들에게 예술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다. 민중들은 자신의 고통과 삶을 표현할 도구를 박탈당한 채 살아왔다.

19세기 말 20세게 초에 케테 콜비츠라는 한 여성 화가가 있었다. 유럽의 어떤 국가보다도 더 잔혹하게 민중들이 착취당하고 있던 나라, 독일의 화가였던 그녀는 고통받는 민중들에게 예술의 영역을 열어주었다. 그녀의 일련의 판화작품들은 민중을 대변했고, 민중들을 위해 공개되었다. 미술의 사회 참여는 케테 콜비츠에 와서야 가능한 일이 되었다.


- 사회주의자 집안의 그림 그리는 소녀





케테 콜비츠(1867-1945)의 결혼전 성은 슈미트였다. 케테의 외조부는 1848년 시민혁명이후 민주헌법 제정에 참여했고 정치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외치는 자유교회를 처음 세운 사람이었다. 사회운동에 관심이 많던 외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케테의 집안에서는 사회를 위해 투신하는 것을 가장 큰 덕목으로 여겼다. 케테의 아버지는 법관이었지만 프로이센 정부의 민중억압과 부패상을 보고 법관자리를 박차고 나와 미장이가 된 사람이었다.

자유롭고 혁신적인 가문이었던 만큼 여성들에 대한 차별도 없었고 어린 케테에게서 미술적 소질을 발견하고 성장을 적극 도왔다. 18세 때 케테는 사회주의자인 오빠 콘라드를 따라 베를린으로 가 그곳에서 마음껏 미술을 공부한다.


- 남편 콜비츠와의 결혼



케테는 1891년 스물네살 때 의사이자 사회주의자였던 칼 콜비츠와 결혼하였다. 칼 콜비츠는 자신이 가진 의료 지식을 사리사욕을 위해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칼 콜비츠는 베를린 외곽에 자선 병원을 세워 그곳에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의료활동을 펼쳐나갔다. 가난한 노동자와 빈민들이 칼 콜비츠의 병원으로 모여들었다. 케테는 남편을 도와 자선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미술 활동을 하기는 했지만 일단은 눈앞에 고통 받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케테는 남편의 자선병원에서 많은 고통받는 독일 민중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자신이 해야할 그 무엇인가를 막연히 찾고 있었다.


- 연극 <직조공>에서 얻은 영감



단지 미술을 공부한 자선병원장의 아내일 뿐이던 케테 콜비츠를 한사람의 예술가로 일으켜 세운 것은 한편의 연극이었다. 1893년 하우프트만의 연극 <직조공>을 보고 강한 영감을 얻은 케테는 일련의 연작 판화 <직조공의 봉기> 작업에 매달리게 된다, 이 작업은 4년 동안 계속됐다. <빈곤>, <죽음>, <회의>, <직조공의 행진>, <소요>, <결말> 등 여섯 점의 판화로 이루어진 작품은 직조공 가족의 비참한 삶과 빈곤 속에 드리우고 있는 죽음의 그림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은밀히 모의를 한 후 거리로 나서는 직조공들, 그리고 그 결과 비극적으로 죽음을 당한 자와 남겨진 자의 모습을 차례로 보여 주고 있다. 이 연작 판화는 베를린 예술 전람회에서 금상으로 확정되었지만 황제 빌헬름 2세의 거부로 수상이 취소되었다. 제국주의자이며 가혹한 착취자였던 지배자들에게 케테의 판화는 너무나 껄꺼러웠던 것이다. <직조공의 봉기> 이후 케테 콜비츠의 작품은 하나의 방향을 향해 곧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억압받고 착취당하며 그 누구에게 호소할 길 없는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민중을 위로하고 그들을 일으켜 세우는 예술. 케테는 그 예술의 길을 뒤돌아보지 않고 후회하지 않으며 곧바로 걸어갔다.


- 반전작가로 나서다



연작판화 <농민전쟁> 등 일련의 민중 미술을 주도해가던 케테 콜비츠에게 커다란 개인적 슬픔이 들이닥친다. 그녀의 막내아들 페테가 1차대전에 징집되어 나갔다가 전사한 것이다. 그녀의 개인적 불행을 독일 어머니들은 모두 겪고 있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독일 지배자들의 제국주의 야욕에 의해 원치도 않는 전쟁에 끌려나가 희생당했다. 전쟁은 전 유럽의 젊은이들의 꽃다운 목숨을 의미도 없이 빼앗았다.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 침잠하던 케테 콜비츠는 마침내 자신의 불행을 민중의 고통을 대변하는 것으로 승화 시켰다. 그녀는 반전을 주제로 한 많은 작품을 내놓았다. 이것은 이때까지 아뜰리에에만 머물렀던 미술을 사회로 끌어 낸 것이었으며 예술을 통한 사회참여가 단초가 되었다.


- 민중의 힘, 참여미술

지난 세기 말 한국사회에는 말도 되지 않은 억압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말도 안되는 억압을 물리치기 위한 많은 시위들이 있었다. 시위의 비장한 각오와 신념을 대변해 사람들은 시위대의 한쪽에는 늘 걸개그림을 걸었다. 걸개그림은 강렬한 주제의식과 강한 사회참여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들이 많았다. 그림으로 시위대의 의지를 한눈에 알아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걸개그림. 이것의 효시가 바로 케테 콜비츠였다. 그녀는 단 한 점 밖에 낼 수 없는 유화작품보다는 판화를 택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메시지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그 강렬한 필치를 통해 민중들의 호소를 한번에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하였다. 케테 콜비츠 이후 많은 민중 미술들은 그녀가 걸어간 길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이러한 참여 미술은 억압자와 피억압자들의 고통스러운 분쟁에서는 언제나 민중들의 힘이 되어 주었다.



김정미 방송 시나리오 작가 limpid7@msn.com


입력시간 : 2004-06-17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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