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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여성이야기] 마가렛 생어
"여자는 아이낳는 기계가 아니다"
임신과 출산·육아에 대한 여성주도와 권리를 부르짖은 최초의 여성






“아들 딸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이 표어는 1960년대와 70년대 한국사회에서 가장 유명한 표어였다. 나라에서는 출산율을 떨어뜨리기 위한 운동에 앞장섰고 국민들도 이 운동에 동참해 대개의 가정은 두 자녀만 두는 것을 당연한 일처럼 생각했다. 그 결과 현재 우리사회는 급격히 떨어지는 출산율로 인해 출산을 장려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두 자녀 이상을 출산하는 가정에 경제적인 도움을 줄 계획도 있다고 하니 몇 십 년 사이 ‘가족계획’은 구시대의 유물에 보태지게 됐다. 1960년대 한국의 가족계획운동은 인구 억제를 통해 사회가 창출하는 부의 몫을 늘리기 위한 것이었지만 원래 가족 계획, 산아 제한운동은 여성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여성운동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오랫동안 아이 낳는 기계처럼 취급 받았던 여성의 몸을 여성 스스로에게 돌려주기 위한 것이 바로 산아제한 운동이었다. 그 중심에 마가렛 생어가 있다.


- 어머니가 되지 않을 권리

‘어머니가 될 것인가 되지 않을 것인가를 뜻대로 선택하게 되기 전까지는 어떤 여성도 스스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다“ 산아제한운동의 제창자 마가렛 생어(1883-1966)의 말이다.

마가렛 생어는 여성이 주도가 되어 임신과 출산여부에 대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최초의 사람이다. 그 이전까지 여성들은 임신과 육아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했다. 피임에 대해 교육하는 것 조차 금지되어 있었으며 여성의 임신은 여성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남성들의 손에 놓여 있었다. 원치 않은 임신을 한 많은 여성들은 하는 수 없이 혼자서 유산을 하려고 애쓰다가 죽어갔다. 때로 마지못해 아이를 낳았어도 그 아이들은 축복 받지 못한 채 유기되기 일쑤였다. 그래도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은 여전히 아이 낳는 기계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것은 하층민으로 갈수록 더 심각했다.


- 가난과 다산으로 죽어가는 여성들

마가렛 생어 자신의 어린시절도 다산과 가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아일랜드계의 석수장이였던 아버지와 카톨릭 신자인 어머니의 11명의 자녀 중 6번째로 태어난 마가렛 생어는 16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40대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은 과도한 출산과 가난으로 인한 것임을 절실히 깨닫는다. 그리고 간호사가 되어 뉴욕의 빈민가에서 여성들을 돌보면서 임신과 출산이 여성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가를 목도한다.

마가렛 생어는 원치 않는 임신을 하고 스스로 유산을 하려다가 병원에 실려온 한 가난한 노동자의 아내가 결국 두 번째에도 똑같은 실수를 하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노동자의 아내는 피임법을 알고 싶어했지만 의사는 이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성이 스스로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임신을 조절할 수 있는 피임법이 절실함에도 사회는 이를 외면하고 있었다.


- 산아제한의 선구자

1914년 마가렛 생어는《산아제한평론》을 발간하면서 적극적으로 산아 제한 운동에 나선다. 이 산아 제한 운동은 여성이 스스로 임신을 조절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자는 여성운동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운동은 환영받지 못했다. 특히 1873년 제정된 <풍속교란방지법>으로 그녀의 책은 독자들에게 우송되지도 못했다. 그 속에 게재된 피임법에 대한 글이 풍기문란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마가렛 생어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1916년에 브루클린에 산아제한진료소를 열었다. 많은 가난한 여성들이 그녀를 찾아와 피임법을 교육받고 처치를 받았다. 그러나 마가렛 생어는 공안 질서 방해죄로 체포되었다. 그녀가 체포될 때 진료소 밖에서 기다리던 많은 여성들이 ‘남은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고 울부짖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떠》?생어는 이 일로 재판에서 30일 노동형을 선고 받았지만, '성병 예방과 치료를 위해 여성에게 피임기구를 제공할 권한을 의사에게 준다'는 판결도 이끌어냈다. 이것은 제한적이나마 여성에게 피임의 권리를 부여한 첫 발걸음이 되었다.

이후 계속된 그녀의 투쟁은 결국 하나하나 결실을 하기 시작했다. 1921년 미국산아제한연맹이 결성되었고, 1927년에는 제1차 세계인구문제회의가 제네바에서 열렸다. 이것으로 최초의 국제산아제한기구가 결성됐다. 보수적이었던 의학계도 점차 산아제한 운동에 참가 하기 시작했다. 의사들에게 무제한으로 피임처방권을 부여하는 법이 1939년 제정되었다.

1960년 마가렛 생어와 과학자들이 이루어낸 먹는 피임약 개발은 산아 제한 운동에 큰 획을 그었다. 이것은 불편하고 불완전한 피임법을 벗어나 편리하고 손쉬운 방법으로 100% 피임을 보장했다. 여성들은 마침내 원치 않는 임신의 공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이 경구용 피임약의 개발은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활동을 더욱 앞당겼고 여권의 신장에도 큰 몫을 담당했다.


- 산아제한운동과 인구문제

마가렛 생어의 산아제한 운동은 여성운동 뿐만 아니라 생식과 성 경험을 분리하였다는 의미에서 인류학적으로도 큰 의미를 가진다. 더불어 1950년 당시 인구폭발로 인한 인류사회의 어두운 미래에 대한 관측에 하나의 해결책처럼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가렛 생어의 산아제한운동은 여성운동의 차원을 떠나 민족과 인종, 국경을 넘어 전세계에 퍼지기 시작했다. 특히 후진국들은 인구의 억제를 통해 가난을 구제하고 경제적 부의 분배를 조절하기 위해 산아 제한운동을 국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우리나라의 1960년대 가족계획운동도 이러한 세계적 흐름 속에서 실시된 것이었다.

여성이 스스로의 몸을 지킬 수 있는 권리를 되찾기 위해 시작한 마가렛 생어의 산아 제한 운동은 인류를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인도했다. 새로운 성의식과 종족 번식에 대한 개념이 형성되었고 인구 조절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경제 정책 또한 불러 일으켰다. 20세기 이후 인류의 미래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은 바로 마가렛 생어였다.



김정미 방송 시나리오 작가 limpid7@msn.com


입력시간 : 2004-08-18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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