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엿보기] 바람을 품고 떠난 여행


그녀는 무작정 짐을 챙겼다. 새삼스런 일도 아니었다. 창으로 보이는 풍경이 그녀의 마음에 살며시 바람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이따금 지나가는 비행기와 장난감처럼 움직이는 자동차와 느리게 떠도는 구름과 고추 잠자리가….

결정적으로 찬란한 햇살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해마다 그랬듯이 바람을 품은 자들에게 가을은 떠나기 좋은 계절이다.

디지털 카메라와 충청남도권 지도 한 장을 들고 그녀는 그렇게 길을 떠났다. 국도를 달리며 그녀는 배수아의 소설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를 떠올렸고 지방의 작은 사진관 앞에서는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기억해 냈다. 지방의 허름한 슈퍼마켓과 중국집을 보면서 이상하게 향수를 느꼈는데, 시골에 산 적이 없는 그녀에게 그 모든 풍경은 영화 속의 한 장면과도 같았다.

백마를 미끼로 해서 용을 잡았다는 백마강. 유람선을 타면서 백마강 위에 유유자적 떠 있던 그녀는 낙화암을 올려다보며 삼천 궁녀가 빠졌던 높이를 가늠하기도 했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동네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부소산성을 끼고 도는 백마강과 주변의 오밀조밀한 작은 소읍이 둥그렇게 둘러싸여 자존심 강했던 백제의 영광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금강줄기가 부여로 흘러 오면서 백마강으로 바뀌는데 그녀는 ‘백마’라는 이름조차 맘에 들었다. 꽃처럼 분분히 떨어지는 궁녀를 빗대 이름 붙힌 낙화암과 궁녀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어졌다는 고란사. 젊어진다는 약수물을 챙겨 마신 그녀. 무왕이 만들었다는 한국 최초의 연못 궁남지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눈앞의 장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칼을 늘어뜨린 버드나무 숲과 연못에 피어있던 수많은 봉우리의 연꽃.

해질 녘 그녀는 공주로 들어가야만 했다. 하지만 계백장군 동상을 돌면서 그녀는 내내 부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를 붙잡는 것은 무엇일까? 궁남지의 연꽃인가? 아니면 백마강이던가? 설마 젊어진다는 고란사 약숫물의 유혹은 아니겠지? 태풍의 영향 때문인지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졌다. 우산 없이 비를 맞던 그녀는 마치 자신을 위해 준비라도 한듯 꺽어진 연꽃 잎을 우산삼아 정자 안으로 몸을 숨겼다.

그녀를 기다리던 것은 선화공주와 서동처럼 드라마 같은 사랑도, 우연 같은 인연도 아니었다. 비 오는 연못의 정자에는 그녀 혼자뿐이었고, 사공 없는 나룻배만 홀로 비를 맞고 있었다. 거기서 그녀는 기원을 알 수 없는 강렬한 뿌리 의식을 느꼈다. 공주의 무령왕릉 앞에서도, 당진의 삽교천 갯벌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서해안 고속도로로 진입할 때쯤 마음속에 남아 있는 부여의 잔영이, 그녀로 하여금 ‘어쩌면 전생에 백제 부여의 후손이었을지도 몰라’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방랑이라는 병으로 한동안 떠나는 자의 몸짓으로 시끄러울지도 모르는 계절이 돌아왔다. 가을은 꼭 남자만의 계절이 아니다. 잠시 그녀들의 떠남에 모르는 척 해주자. 때가 되면 돌아오는 계절병이니 말이다. 맘속에 바람을 품은 자는 떠나야 살아갈 수가 있다.

입력시간 : 2004-09-03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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