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고의 섹스 심벌50~60년대 미국 대중문화의 대명사, 숱한 염문

[역사 속 여성이야기] 마릴린 먼로
20세기 최고의 섹스 심벌
50~60년대 미국 대중문화의 대명사, 숱한 염문


지난 20세기에 가장 수지가 맞았던 나라하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미국이다. 19세기 말까지 신대륙 촌구석의, 땅덩어리만 큰 나라로 무시당하던 미국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의 두 차례 세계대전, 공산주의 출현, 냉전 시대 덕분에 서방의 맹주로 떠오르더니 공산국가의 몰락 이후론 바야흐로 고대 로마를 넘어서는 ‘ 팍스 아메리카나’, 무소불위의 국가로 자리잡았다.

미국이 누구도 따라 잡을 수 없는 곳으로 높이 비상하기 시작하던 20세기 중반, 항상 열등감만 주던 유럽 문화를 박차고 나온 미국은 자신들만의 문화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팝 아트 혹은 대중문화라는 이름으로 미국의 국력과 함께 세계를 정복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1950~60년대 미국 문화의 대명사 마릴린 몬로가 있다.

- 불우한 어린시절

마릴린 몬로(1926~1962)의 짧은 인생은 20세기 초 중 반 미국 역사의 그늘과 함께 였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본명 노마 제인 모텐슨인 마릴린 몬로는 이제 막 헐리우드 영화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한 로스엔젤레스에서 필름 편집 일을 하던 어머니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약물과 알콜에 찌들었던 미혼모였고 그래서 제인을 제대로 돌볼 수 없었다. 노마 제인이 6살 때 어머니는 정신 병원에 수용되었고, 이 때부터 노마 제인은 무수한 보육원과 고아원을 전전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후견인이 있긴 하였으나 그녀도 완전히 노마 제인을 돌보아 주지는 못했다. 지긋지긋한 시설 생활과 후견인의 남편들로부터 당하는 성희롱 등을 견디지 못했던 노마 제인은 16살 나이에 도망치듯 결혼해 버린다. 그러나 이 결혼은 오래 가지 못한다. 마침 일어난 2차 대전에 남편은 군인으로 참가하고 그녀는 낙하산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이 되었다.

- 마릴린 먼로의 탄생

낙하산 공장에서 일하던 노마 제인에게 작은 기회가 왔다. 애국심 진작을 위해 군수 공장 여공들의 사진을 찍게 한 정부 시책으로 노마 제인이 모델로 설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녀는 태생적으로 자신의 몸으로 사람들에게 무엇을 어필할 수 있을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사진은 남자들의 눈길을 끌었고 곧 이어 노마 제인에게는 다른 사진 모델 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비록 그것이 누드 사진이라 할지라도 그녀는 지긋지긋한 공장 생활보다는 그 쪽을 선택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녀는 폭스사에 단역 배우 자리를 얻게된다. 이 때, 그녀는 자신의 본명 노마 제인 모텐슨을 버림과 동시에 서류상으로만 남은 결혼 관계도 청산한다. 그녀가 새로 얻은 이름은 마릴린 몬로였다.

풍만한 몸매에 굽슬거리는 금발머리, 얼굴 어딘가 찍혀 있는 매력 점, 도톰하니 살짝 벌어진 입술, 어딘가 나른하고 멍한 듯 보이는 푸른 눈. 이것은 마릴린 몬로의 외모임과 동시에 전형적인 미국 미인의 상징이기도 하다.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미국은 강한 남성성과 함께 이들 남성을 즐겁게 해 줄 마릴린 몬로라는 백치미를 가진, 어딘가 둔하지만 순진해 보이고, 보호해 줘야 할 것 같지만, 헤퍼 보여 매력적인, 그런 여자를 만들어 냈다.

몬로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들은 그것들을 정확히 표현해 냈다. 그녀는 새로 시작된 미국 대중 문화의 전파자이자 꼭둑각시였다. 남자들은 어두운 영화관에서 그녀를 보고 열광했지만 거리에 나서면 그녀를 창녀라고 외면했다. 여자들은 은밀히 그녀를 모방하고 다니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마릴린 몬로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속에서 마릴린 몬로는 고독했고 지쳐갔다. 그녀에겐 언제나 누군가가 필요했다.

- 사랑을 먹고 살았던 그녀

첫 번째 결혼 이후 마릴린 몬로는 수 많은 남자를 거쳤다. 사생아로 태어났던 그녀가 남자에게서 바란 것은 언제나 아빠의 이미지였다.

배우로 성공한 후 마릴린은 프로 야구 선수 조 디마지오와 세기의 결혼을 한다. 당대 최고의 선수였던 조 디마지오와 그녀의 결혼은 그러나 순탄치 못했다. 마릴린의 화려한 남성 편력과 결혼 이후에도 이어지는 남자들의 음탕한 눈길을 견딜만한 배짱이 조 디마지오에겐 없었다.

조 디마지오는 곧 이어 마릴린 몬로에게 손찌검을 하기 시작했고, 마릴린은 9개월만에 두 번째로 이혼장에 도장을 찍게 된다. 그리고 다시 그녀가 원하든 원치 않든 화려하고도 지루한 남성 편력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마릴린은 마침내 ‘아빠’를 찾아냈다. 섹스 심볼으로서의 자신의 이미지를 벗어 버리고 싶어 몸부린 치던 마릴린 앞에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던 극작가 아서 밀러가 나타났던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부부 관계라기보다는 사제의 관계에 가까웠다고도 한다. 마릴린은 지성적인 남편을 얻은 것으로 기존의 이미지를 벗어 던지고 싶어했다.

그리고 실제로 가정에 안주하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러나 그토록 바라던 임신이 유산으로 끝나버리고 난 뒤, 두 사람의 결혼도 위태로워진다. 마릴린은 아서 밀러와 4년만에 이혼하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이즈음 마릴린의 약물 복용은 도를 지나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그녀는 대단한 형제들을 만나게 된다.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그들이다. 이 두 형제와 마릴린과의 관계는 언제부터 언제까지인지, 그리고 그들 중 한 사람과인지 두 사람 다 인지, 누가 먼저 였는지, 모든 것이 베일에 싸여 있긴 하지만, 확실히 공공연한 비밀로 남아 있다.

- 알몸의 변사체… 의문의 죽음

인생의 마지막 1년 간 마릴린은 자신이 케네디가의 며느리가 될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두 형제는 실제로 그녀와 결혼할 마음이 눈꼽만치도 없었다. 방황과 혼란 속에 배우생활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때, 그녀에게 다시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은 전남편 조 디마지오였다.

마릴린은 그와 다시 결혼할 것을 결심한다. 그러나 결혼을 3일 앞둔 1962년 8월 5일. 마릴린 몬로는 자신의 침대 위에서 알몸의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약물과다 복용으로 인한 사고사 혹은 자살이었다. 그러나 모든 정황으로 볼 때 그녀의 자살은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은 결국 자살로 마무리되었다.

마릴린 몬로, 대중의 욕망이 만든 이미지 속에 고독하게 살다간 여인. 단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고 스스로 말했던 여인, 20세기 대중 문화 히로인의 쓸쓸한 삶은 지구상 어딘가에서 또 다시 복제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김정미 방송ㆍ시나리오 작가


입력시간 : 2004-11-03 11:49


김정미 방송ㆍ시나리오 작가 limpid7@ms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