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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고 작게, 큰 울림 남긴 성자
[역사속 여성이야기] 마더 테레사
철저한 자기 희생으로 현대 인류사에 빛나는 정신 보여준 수녀






인간은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이성으로 다듬어 지기는 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육식 동물성 욕구를 완전히 누를 수 없는 존재이다. 약자를 괴롭히고 더 많은 것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며, 심한 경우는 서로를 죽인다. 세계 곳곳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고 심지어는 전쟁이란 가해 의식을 정당화하려는 세력들이 권세를 부리기도 한다.

모든 것이 어두운 정글의 법칙 속에서 인류는 타인을 밟고 일어서기 위해 위만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여기 한 사람, ‘허리를 굽혀 섬기는 자는 위를 보지 않는다’ 며 자신의 몸을 가장 낮은 데로 낮추어 사람들에게 희망의 빛을 보여준 사람이 있다.

보통의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끊임없는 자기 희생으로 약육강식의 논리로 흘러가는 각박한 현대 인류사에 빛나는 정신을 보여주었던 그 사람은 마더 테레사이다.

조국 알바니아를 떠나 빈자의 땅 인도로



마더 테레사(1910~1997)의 본명은 아그네스 곤히아 브약스히야로 알바니아의 비교적 부유한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1910년대 흉흉하고 복잡했던 유럽 상황 속에 끼인 작은 나라, 알바니아에서 정치 활동을 하던 중 암살 당했다.

이후 남겨진 아그네스의 가족들은 카톨릭 종교 속에 화목한 가족으로 그들의 삶을 가꾸어 가기 시작했다. 그 중 막내딸이던 아그네스의 신앙은 각별했다. 아그네스는 성장기의 대부분을 성당에서 보냈고 자신의 일생을 신의 뜻에 따라 바칠 것을 결심했다.

그녀는 해외에서 들려오는 선교 소식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인도로부터 오는 선교 소식은 어쩐지 그녀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마침내 1928년 아그네스는 신에게 자신을 봉헌하고 인도로 갈 수 있는 길을 발견한다.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 역시 영국 식민지이던 아일랜드의 로레토 수녀회에서 많은 선교인단을 파견하고 있었다. 아그네스는 조국 알바니아를 떠나 아일랜드를 거쳐 마침내 어렸을 때부터 가고 싶었던 나라, 인도에서 수녀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아그네스는 인도에서 다시 세례를 받고 테레사로 세례명을 고친다. 그녀는 성마리아 수녀원 학교에서 영국에서 온 귀족 집안 소녀들에게 지리학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다.

애초 생각했던 선교의 길은 아니었지만 별 불만은 없었다. 테레사 수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가 성 마리아 학교의 교장이 되었으며 로레토수녀회 안에서 평생을 다할 것을 서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저 신 안에서 평온하고 평범하게 살아갈 것만 같았던 테레사 수녀에게 어느 날 신의 부르심이 들려왔다.

1948년 캘커타에서 다즐링으로 피정을 가던 기차 속에서 테레사 수녀는 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그녀가 로레타 수녀회를 나와 거리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종교에 일생을 바치고 있던 테레사 수녀에게 또 다른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훗날 테레사 수녀는 이 일을 ‘부르심 속의 부르심’이라고 불렀다. 이후 테레사 수녀는 2년여 간의 지리한 수녀회 탈퇴 절차를 마치고 혈혈단신 인도의 거리로 나섰다. 이제 그녀를 보호해 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테레사 수녀가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홀로 캘커타의 빈민 거리로 나선 1950년대 인도는 복잡한 상황을 맞고 있었다. 2차대전 이후 마침내 200여년 간의 영국 지배를 벗어난 인도는 독립의 기쁨을 누리기도 잠시, 종교적, 정치적인 상황에 맞물려 여러 곳에서 전쟁과 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회는 불안정했고 인도 거리 어디를 가나 난민들이 넘쳐 흘렀다. 그들은 대부분 아무런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굶주림과 병마 속에서 죽어갔다. 테레사수녀는 그들을 돌보기 위해 거리로 나왔지만 처음에는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할 지 막막했다. 게다가 막 독립을 한 인도에서 영국계 수녀회 출신의 수녀는 반목의 대상이었다.

안식과 위안을 나누어 주다





대부분 힌두교를 믿는 인도인들은 테레사 수녀의 봉사의 손길을 선교의 뜻으로 오해하고 적대시하였다. 그러나 수녀회를 벗어나 홀로 인도 사람들 앞에 나선 테레사 수녀에게는 이미 오래전에 품었던 선교의 뜻 같은 것은 없었다. 그녀는 오로지 신의 부르심을 실천하며 가난하고 병들어 죽어가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안식과 위안을 나누어주는 것을 목표로 삼았을 뿐이었다.

테레사 수녀는 수녀복을 벗고 인도의 흰색 사리를 입었다. 흰색 사리는 인도의 여인 중 가장 가난하고 미천한 여인들이 입는 옷이었다. 그리고 테레사 수녀는 인도의 국적을 취득해 인도인이 되었다. 그녀가 베푸는 봉사와 박애는 이미 카톨릭을 벗어난 더 큰 의미의 종교 같은 것이었다.

처음 5명의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시작했던 테레사 수녀의 봉사는 점차 그 영역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테레사 수녀는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고 병든 사람들을 간호하고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이 조용히 임종할 수 있는 집을 지었다. 미혼모와 고아들을 위한 집이 만들어지고 나병환자들이 모여 재활의 기회를 마련할 수 있는 마을이 생겼다.

그녀의 헌신적인 봉사와 박애를 지켜 본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들기 시작했다. 테레사 수녀를 중심으로 한 ‘사랑의 선교수녀회’가 결성되고 후원 단체도 생겼다.

사람들은 테레사 수녀를 마더 테레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계 각국에서 기부금이 모여졌고 테레사 수녀에게는 노벨상을 비롯한 많은 상들이 수여되었다. 사랑의 선교수녀회는 마침내 카톨릭교단에서 인정받았다. 교황도 테레사 수녀의 활동에 감동하였다. 그러나 테레사 수녀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들어오는 기부금은 통째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썼고 본인은 다 낡아 여기저기 기운 자국이 역력한 흰색 사리 하나만을 걸친 채 나병 환자를 씻기고 아이들을 돌보았다. 사람들은 그녀를 살아 있는 성녀라고 불렀다. 그 같은 세상의 찬사 속에도 정작 테레사 수녀는 자신은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며 돌보아야 할 사람들에게로 달려갔다.

테레사 수녀는 죽음을 맞이할 때에도 더 나은 의료 시술을 거부한 채 자신이 돌보았던 환자들과 똑같은 치료를 해줄 것을 원했다고 한다.

1997년 마더 테라사의 임종은 그녀의 보살핌을 받던 인도 사람들 뿐만 아니라 많은 세계인들의 미음을 울렸다. 세계인들은 그녀를 진심으로 애도하였다. 그것은 테레사 수녀의 삶 자체가 보여준 희망, 인간에게 반드시 있으리라 믿어 지는 또 다른 한 면, 숭고함이 저물어 가는데 대한 애도였다.



김정미 (방송ㆍ시나리오 작가) limpid7@msn.com


입력시간 : 2004-11-24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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