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득이는 관능, 그리고 섬뜩한 아름다움문신이랑 '행위'는 성적욕구의 발산이며 자신의 추함과 결핍의 극복과정무한하고 생생한 에너지의 원천은 부드러움 속에 숨겨진 '여성'

[문학과 페미니즘] 천운영 소설 <바늘>
번득이는 관능, 그리고 섬뜩한 아름다움
문신이랑 '행위'는 성적욕구의 발산이며 자신의 추함과 결핍의 극복과정
무한하고 생생한 에너지의 원천은 부드러움 속에 숨겨진 '여성'


작가 천운영의 등장은 상당히 놀라웠다. 200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소설 ‘바늘’로 등단한 그녀는 문단에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일단 ‘바늘’은 신춘문예 당선작으로는 예외적으로, 매우 출중했다. 그리고 이 후 천운영이 활발히 써낸 섬뜩하고 도발적인, 그러나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작품들. 그녀는 신예 작가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독특한 소재를 생생하고 가차없이 풀어내면서도, 밀도 있고 노련한 수작들을 세공해 냈다.

‘바늘’은 섬뜩하고 도발적이다. 그래서 읽는 내내 신경은 ‘바늘’처럼 곤두선다. 그런데 뭐랄까, 그 속에는 찬란한 아름다움이 숨어 있다. 아름다운 여자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여자들을 어쩌면 이렇게도 모아놓았을까 싶은 ‘바늘’의 여성들이 내게는 팜므파탈(femme fatale)들로 다가 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그 답은 ‘섬뜩한 아름다움’을 지닌 소설들 자체에 있다.

격렬한 섹스를 하듯 문신을 새긴다
남자들의 몸에 바늘로 문신을 새기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그녀. 그녀는, 문신을 새기느라 한나절을 남자의 사타구니에 콧김을 불어넣어도, 그에게 ‘전혀 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들게 하는’ 여자이다. ‘툭 튀어 나온 광대뼈와 곱추를 연상케 할 정도로 둥그렇게 붙은 목과 등의 살덩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목소리, 뭉뚝한 발가락…’을 갖고 있는 그녀는, 그 추한 외모에 더해 심한 말더듬이이며, 간질 병력까지 갖고 있다. 마치 노틀담의 곱추를 연상시키는 그녀의 ‘추함’ 때문에 그녀의 성욕은 사회적으로는 이미 거세된 지 오래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언제나 ‘사회적으로’일 뿐. 그녀의 내부에는 억압되어 제대로 발산되지 못한 온갖 뒤틀린 성욕들이 스멀스멀 꿈틀거리다 못해, 성교를 제외한 다른 모든 행위들로 변형되어 발현된다. 문신을 새기고, 육식을 탐하며, 모든 시선에 관능을 품고 있는 그녀의 행위들은 그 자체가 개별적 섹스이다.

그녀는 섹스를 하듯 문신을 새긴다. ‘문신을 끝낼 때마다 격렬한 섹스를 하고 난 듯한 극심한 피로를 느낀다’고 토로하는 그녀에게 문신을 새기는 작업은 사회적으로 출구를 찾지 못하고 거세되어 버린 성적 욕구를 발산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자리한다.

자신의 추함을 이루는 부분인 말더듬증도 이 문신 새기기 작업에서는 해소되는데, 이 역시 의미심장하다. ‘일종의 충치’ 같이 느끼는 ‘발설의 욕구’를 그녀는 남자들의 몸에 뜨는 바늘땀으로 해소한다. ‘살에 꽂는 첫 땀. 나는 이 순간을 가장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녀는 ‘바늘땀을 뜰 때 나는 더 이상 말더듬이가 아니다’고 속삭인다. 뽑히지 않고 마치 자신의 일부가 되어 버린 충치, 그 충치 같은 말의 욕구는, 발휘되지 못하는 성적 욕구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녀는 문신을 새김으로써(어쩌면 남성들에게 성욕을 발휘함으로써) 자신이 모든 추악함과 생태적인 결핍을 극복할 수 있다.

관능적 욕구를 따라 꿈틀대는 감각들
문신 새기기나 말더듬증에 관련된 부분 이외에도 이 소설은 (모든 세부 문장에서) 성적인 비유들로 가득 차 있다. 그 이유는 물론 화자인 그녀가 모든 시선에 관능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루어질 수 없기에 더욱 강렬한, 선망과 시기와 질투. 동시에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갖게 된 패배감과 무력감이 그 시선들에는 얽혀있다.

육식을 주로 하며 ‘고기를 삶아 입안 가득 육질의 맛을 느끼고 싶다’고 중얼거리는 그녀, 승강기로 뛰어 든 남자의 모습까지도 ‘문은 덧없이 활짝 열렸다가 다시 천천히 모아진다. 남자는 등을 돌린 채 가쁜 숨을 내 뱉고 있다. 남자의 등이 위아래로 심하게 움직인다’고 묘사하는 그녀의 시선과 감각은 관능적 욕구를 따라서만 꿈틀댄다.

그리하여 이 소설 전체는 에로스를 꿈꾸나 실현하지는 못하는 곱추의 사랑 같은 것. 그 옴팡지고 음흉하나 이룰 수 없기에 거대하게 슬픈, 애증의 덩어리로 독자의 가슴에 덜컥하고 던져진다. 스멀스멀 꿈틀거리?관능, 위험하면서도 아름다운 그것, 그 섬뜩한 아름다움의 비밀은 다음에 있다.

전복되는 가치들, 남성과 여성
남자들은 그녀에게 와서 ‘협각류의 단단한 외피를 얻으려’고, 전갈이나 거미 문신 같은 것을 새기고는 ‘들어 갈 때보다 훨씬 더 당당한 표정’으로 그녀의 집을 나온다. 그들에게 문신은 ‘인생에 있어’ ‘막강한 숨긴 패’가 된다. 옷 안에 그렇게 강력한 무기들을, 화투장의 광들을, 독을 품은 협각류나 파충류들을 숨기고 있어야만 안심이 되고 위안이 되는 ‘약해 빠진’ 그들은, 세상의 강한 반쪽이라는 남성들이다.

그들에게 ‘앞으로 감수해야 할 삶의 시련들까지도 포함되어 있’는 문신, 그것은 ‘스스로는 결코 이룰 수 강인함’에 대한 열망과 갈망의 상징이기도 하다. 문신은 그리하여 ‘육체와 그 위에 새겨진 글귀 사이에 공존하는 어떤 것. 그것은 아름다운 상처, 혹은 고통스러운 장식’이 된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무기, 바늘로 그 ‘강인하나’ ‘강인함을 꿈꾸는’ 남성들에게 ‘막강한 숨긴 패’를 새겨 주는 그녀. 문신을 새기는 그녀는 더 이상 성적으로 수동적 대상이 아니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성욕을 남성의 육체에 새긴다. 문신 새기기로 변형된 그녀의 성행위는 남성의 육체에 상처를 내고 아픔을 남긴다. 그리고 그 ‘고통의 상처’, ‘아름다운 장식’이 된 문신은 강인함을 꿈꾸는 남성들에게 ‘막강한 숨긴 패’가 되어 그들에게 ‘훨씬 더 당당한 표정’을 선물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혼란, 전복되는 모든 것들의 혼란 속에서 ‘섬뜩한 아름다움’은 스멀스멀 피어난다.

은폐된 치명적 상처, 바늘
한편 그녀의 이야기가 큰 줄기로 진행되는 중간에는 엄마의 이야기가 겹쳐진다. 어느 날 그녀를 떠나 절로 가버린 엄마. 그녀는 한 스님의 죽음과 맞물린 엄마의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엄마가 자신이 스님의 살해자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그녀는 ‘내 뒤틀린 성욕과 함께 뒤섞여, 고운 여자의 손이 스님의 머리통을 부여잡고 정사하는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지곤 했다’라고 한때 자신이 상상했던 것들을 되새기며, ‘많은 전쟁들이 미화되어 있었듯이, 스님의 아름다움을 지켜주기 위해 누군가가 사건을 은폐했을 수도 있다’라고 엄마를 의심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엄마는 (아무도 엄마의 말을 믿지 않았으므로) 구속되지도 수사의 대상이 되지도 않고, 그녀는 ‘실현 불가능한 살의’로 그 사태를 정리해버리지만, 엄마는 돌연히 자살하기에 이른다.

소설의 말미에서 그녀는 엄마의 유품인 바늘쌈지를 들추다 20개의 빛나는 바늘들을 발견하고, 엄마가 바느질에 썼던 그것들을 문신의 도구로 쓰려고 생각한다. 그러다 그녀는 바늘의 끝이 모두 잘려있음을 발견한다. 순간 그녀에게 들리는 것은 바늘을 잘게 잘라 녹즙에 넣어 마시면, 내장을 돌며 치명적인 상처를 만들고 심장에 이르면 맥박을 잠재워 죽음을 부르는데, 아무런 외상도 남기지 않는다는 ‘엄마의 생생한 목소리’이다.

삶을 나눠 갖게 된 모든 반대편의 것들
그러면 다시 그녀의 이야기, 그녀에게 일어난 사건의 내막들로 돌아와 보자. 승강기를 축으로 그녀와 정반대편에 사는 남자, ‘쌀밥처럼 하얗고 말끔한 남자’는 어느 날 그녀의 삶으로 걸어 들어온다. 곱살하고 허약하고 소심해 보이는, 역설적으로 전쟁기념관에서 하루 종일 가짜 포성을 들으며 일하는 이 식물성의 남자는 ‘나는 전쟁이 좋아. 전쟁은 강하거든. 강함은 힘에서 나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힘이야’라고 말하며, 그녀에게 ‘내 몸을 가장 강력한 무기들로 가득 채워줘’라며 문신을 부탁한다. 그리하여 소설은 다음의 문장들로 맺어진다.

‘나는 그의 가슴에 새끼 손가락만한 바늘을 하나 그려 주었다. 티타늄으로 그린 바늘은 어찌 보면 작은 틈새 같았다. 어린 여자 아이의 성기 같은 얇은 틈새. 그 틈으로 우주가 빨려 들어 갈 것 같다. 그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기를 가슴에 품고 있다. 가장 얇으면서 가장 강하고 부드러운 바늘.’

결국, ‘승강기를 축으로 반을 접는다면 남자와 나는 한 곳에서 만난다. 골리앗 거미의 보각처럼’이라고 중얼거렸던 806호의 나와, ‘내가 매일 다니는 길 반대편에는 무엇이 聆뺑?궁금했어’라고 말하던 801호의 남자는 매일 저녁 만나는 사이가 된다. 육류를 탐하는 추한 여자인 나와, 식물처럼 ‘아름답게 생긴’ ‘쌀밥처럼 하얗고 말끔한 남자’인 그는 그렇게 서로 겹쳐진다. ‘쌀눈이 살짝 비치도록 말간 밥알에 약간 검어진 육류의 핏물이 스며들 때, 고기의 맛은 정점’에 이르듯이, 그녀와 그도 그렇게 정점을 갈구하며 만나 갈 것이다.

바늘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기
추해서 소외되고 주변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들. 그러나 인간에게 욕구와 욕망은 추함과 아름다움, 성스러움과 천박함, 남성과 여성…. 그 모든 차이와는 상관 없이 동등하고 생생한 실체다. 모든 가치들은 그 동등한 개별 욕망들의 이름으로, 그 변주와 얽힘들 속에서 서로 겹쳐지고 자리를 나누어 갖는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감히 아름다움이라 불러야겠다.

남성과 여성, 강함과 약함의 가치들을 매우 교묘하게 얽고 전복하고 있는 소설 ‘바늘’. 소설의 말미에서야 드러난 바늘의 실체, ‘어린 여자 아이의 성기 같은 얇은 틈새’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침범되지 않은 무엇일지 모르지만, ‘우주가 빨려들어갈 것 같’은 힘을 갖고 있다. 서서히 스님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그 치명적 바늘은, 세상에서 가장 약한 남자 그의 가슴에 그려져, ‘가장 얇으면서 가장 강하고 부드러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기’가 된다.

세상의 가장 약하고 부드러운 것들은 어쩌면 가장 강한 힘을 숨기고 있는 무한하고 생생한 에너지의 탄생 지점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모든 것들이 전복되고 가치를 교환하며 찾아낸 그 작은 틈새의 강력한 힘은, 감히 아름답다. 오늘은 그 틈새에 여성이라는 이름을 붙여 본다.

권민정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4-12-16 14:07


권민정 자유기고가 eunsae7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