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하지만 풍부한 영양의 '웰빙빵'철부지 어린과 애늙은이의 좌충우돌 얘기에 등장하는 영국 시골 빵

[문화 속 음식기행] 영화 <어바웃 어 보이> 코티지 로프
투박하지만 풍부한 영양의 '웰빙빵'
철부지 어린과 애늙은이의 좌충우돌 얘기에 등장하는 영국 시골 빵


올해도 달력 한 장을 넘기면서 가슴이 뜨끔해 지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을 것이다. 굳이 친척 어른들에게 “올해는 결혼해야지”라던가 “취직이 힘들어서 어쩌나?”라는 덕담(?)을 듣지 않더라도, 나이를 먹어 간다는 것은 심각한 스트레스임이 분명하다. 세상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점점 책임이 무거워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그 책임을 피하고 싶어 아예 어른이기를 포기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찌감치 ‘애 늙은이’가 되어 버리기도 한다. 영화 ‘어바웃 어 보이’의 두 주인공 윌(휴 그랜트)과 마커스(니콜라스 호울트)는 각각 전자와 후자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38세의 독신남 윌은 소위 말하는 화려한 싱글이다. 부모의 유산으로 평생 일을 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고, 주위에는 항상 매력적인 여자들이 따라 붙는다. 다만 한 가지 문제라면 관계를 정리하려 할 때마다 상대방 여자로부터 독설과 저주에 시달린다는 것. 고민 끝에 그는 가볍게 즐길 수 있으면서 헤어질 때 부담이 없는 여자는 바로 독신모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급기야 있지도 않은 아들을 만들어 내고 독신 부모 모임에 나가기 시작한 윌. 마음에 드는 여자와의 작업이 수월하게 진행되던 찰나, 느닷없는 훼방꾼을 만난다.

"우리엄마를 책임지세요"
마커스는 우울증 환자인 엄마와 살고 있는 12세의 왕따 소년이다. 철없는 엄마를 돌보고 지켜 주어야 하는 그에게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근심이 따라다닌다. 어느 날 자살을 시도한 엄마, 피오나(토니 콜레트)를 우연치 않게 윌이 구해준 일을 계기로 그는 무작정 윌을 찾아가 ?窄?쓰기 시작한다. 독신부라고 속인 그를 협박하면서 비밀을 지켜주는 대가로 엄마와 데이트 해 달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부터 이 영화는 계속해서 관객의 예측을 배반한다. ‘당연히’ 윌과 피오나가 사랑에 빠지리라고 예측한 이들은 오히려 피오나가 주변 인물로 밀려나 버리는 구도에 당황한다. 윌이 마커스의 아버지 노릇을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커스가 윌을 정신적으로 성숙하게 만든다는 결론에 어리둥절하게 된다. 그러다가 마커스와 윌이 흘러간 가요,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을 함께 부르는 장면에 와서는 거의 실소에 가까운 웃음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이 어처구니없는 철부지 어른과 애늙은이의 이야기 속에는 인간 관계에 대한 담백하면서도 명쾌한 해답이 숨어 있다.

항상 수심에 찬 꼬마 마커스가 그래도아이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다면 호수에서 오리에게 빵을 던져 주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채식주의자에, 요리 솜씨마저 없는 피오나가 기껏 만들어준 점심이래야 고작 딱딱하고 맛도 없는 빵이다. 아마 다른 아이들처럼 맥도널드에도 가 보고 싶었을 마커스는 엄마에 대한 무언의 불만을 빵을 호수에 내던짐으로써 풀게 되고, 그 결과 애꿎은 오리 한 마리가 맞아 죽는다.

담백한 맛에 쫀득한 질감
오리를 죽인 문제의 빵은 ‘코티지 로프(Cottage Loaf)’라고 불리는 영국의 시골 빵이다. 커다란 빵 위에 작은 빵 한 덩어리가 붙어 있는 것처럼 생겼다. 코티지 로프의 특이한 형태는 좁은 오븐 공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한때 가정식 빵으로 많이 먹었다는데 요즘은 그리 흔하지 않다. 분류상 코티지 로프는 갈색을 띈 밀가루를 사용한 ‘팜 하우스 브레드(Farm House Bread)’에 속한다. 19세기 후반에 대량 생산된 팜 하우스 브레드란 흰 밀가루 빵과 구분하기 위해 붙여진 명칭. 이름이 주는 이미지처럼 투박하고 거친 듯한 맛이 특징이다. 시쳇말로 ‘웰빙 빵’이기도 하지만 마커스 또래의 아이들 입맛에는 아무래도 별로였을 것이다.

‘유럽 최악’ 이라는 오명을 갖고 있던 영국 요리가 최근 크게 변하고 있다는데, 빵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다. 1980년대 들어 대형 슈퍼 마켓은 대륙의 새로운 빵을 팔기 시작했고, 여기에 위기 의식을 느낀 중소 제빵업자들은 잊혀졌던 전통 빵 레시피들을 연구하고 부활시키게 된다. 몇 년 전부터 우리ざ?빵집에서 산 모양의 영국 식빵이나 스콘 등이 인기를 끌게 된 것도 그러한 노력의 결과라고 볼 수 있겠다.

영국 빵은 맛이 진한 미국식 빵과 담백한 대륙식 빵의 중간 정도 되는 맛이 특징이다. 영국 하면 떠오르는 빵으로는 역시 ‘잉글리쉬 머핀’이 있다. 호떡처럼 동글납작하고 담백하며 약간 쫀득한 질감이 나는 이 빵은 따뜻할 때 홍차와 함께 먹으면 맛이 좋다. 흔히 햄버거 빵이라고도 불리는 번이나 호텔 등의 아침 식사에 곁들여 나오는 각종 롤 종류도 유명하다. 이처럼 소박하면서도 영양가 풍부한 영국식 빵들은 검소한 영국인들의 기질과도 닮아 있는 것 같다.

정세진 맛 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5-01-12 12:58


정세진 맛 칼럼니스트 sejinjeong@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