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이 말소된 여성상에 대한 유감적나라하게 현실이기만 한 여성과 신기루로 동경의 대상이기만 한 여성

[문학과 페미니즘] 김훈의 <화장>
인격이 말소된 여성상에 대한 유감
적나라하게 현실이기만 한 여성과 신기루로 동경의 대상이기만 한 여성


한 작가가 첫 장편 소설로 2001년 동인문학상을, 첫 단편 소설로 2004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두 상이 한국 문학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으리라. 이 이례적인 사건을 가능하게 한 이는, 문학 기자에서 출발해 당대의 문장가로 불리게 된 김훈이다. 혹자는 그의 문장을 일컬어 ‘사리’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그의 언어는 지극한 산문 정신으로 일궈낸 밀도를 자랑하며, 한국어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다.

김훈은 글의 소재나 이미지들에도 가혹할 만큼 연마를 가하여, 단어 하나 하나에서 전체 글에 이르기까지를 실로 경이로운 밀도로 엮어 놓고 있다. 양립할 수 없는 이미지들이 결합해 만들어 내는, ‘모순’이지만 가장 진실로 와 닿는, 심장을 터트리고 감탄을 연발하게 하는 역설의 언어. 그리고 그 언어를 아름답게 하는 또 하나의 열쇠는 ‘동경’이다.

그리하여 김훈의 언어는 옹골지고 잔인하면서도 아름답다. 나 역시,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는 김훈의 어법을 빌어, 김훈의 언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 그 압축적이고 유려한 문장들. 세상의 시작과 끝에서 현실의 가장 적나라한 바닥과 이상의 가장 높은 경지까지를 모두 아우르고자 하는 그 언어들을.

그러나 이 글에서는 김훈이 그려내는 여성에 대해서만 말하기로 하자. 그러면 나는 김훈에게, 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김훈에게 아쉬움과 안타까움과 슬픔을 토로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아름다운 소설에 비판의 목소리를 추가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소설 ‘화장’의 여성들을 산문 ‘여자의 풍경, 시간의 풍경’의 여성을 조금 끌어 들여 이야기 해 본다.

김훈의 ‘화장’은 두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교차적으로 엮여 있다. 두 이야기란, 죽어가는 혹은 죽은 아내에 대한 이야기(소설은 아내의 죽음으로 시작해, 아내의 죽어가는 모습에 대한 회상을 곳곳에 배치하고 있다)와 결코 제대로는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하는 선망의 여성, 추은주에게 건네는 이야기이다. 첫 번째 이야기가 냉정하고 담담한 어조로 그려지고 있다면, 두 번째 이야기는 경어로 쓰여진 서간체로 보다 정서적이고 신비롭게 서술되고 있다. 물론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이야기들은 서로를 비집고 제각각의 밀도를 자랑하며 서로를 간섭한다.

인간을 잃고 적나라하고 참혹하게 동물적 존재인 아내
뇌종양이 걸린 아내는 “생명 현상의 일부”인 종양 때문에, 그녀가 살아있기 때문에(종양도 살 수 있어) 죽어 간다. 아내의 모습은 지극히도 적나라하고 처참해서 읽는 이를 부르르 떨리게 만든다. “두통 발작 때마다 손톱으로 벽을 긁”으며 “머리카락을 쥐어 뜯고 시퍼런 위액까지 토해” 내다가, “뼈만 남은 육신으로 몸부림을 치다가 실신”하는 아내. 그리고는 괄약근이 열려 “찌를 듯한 악취를 풍”기는 똥을 싸버리지만 후각 중추가 교란되어 “제 똥이 발산하는 그 지독한 악취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아내. 아내는 “성기 주변에도 살이 빠져서 치골이 가파르게 드러났고 대음순은 까맣게 타들어 가듯 말라 붙어 있었다. 나와 아내가 그 메마른 곳으로부터 딸을 낳았다는 사실은 믿을 수 없었다. 간병인이 사타구니의 물기를 수건으로 닦을 때마다 항암제 부작용으로 음모가 부스러지듯이 빠져 나왔다.”

자신이 항상 돌보던 개의 밥을 걱정하는 것만이, 똥을 싸고는 “여보… 미안해…”라고 말하며 시신경이 교란되어 앞도 보이지 않지만 수치심에 고개를 자꾸만 돌리는 것만이 아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언뜻 알려줄 뿐이다. 그 외의 모습에서 아내는 이미 인간 이하의 생물체로 전락해 있다.

“아내가 이제 그만 죽기를 바”라는 나의 심정을 고백하며 “그것만이 나의 사랑이며 성실성”이라 단정하는 것도 이해될 정도로. 아내의 죽음을 서술하는 부분들도 감정이 철저히 통제되고 있는데, 죽은 아내를 냉동실로 보내고 원무과에 병원비를 계산하고… 화장을 하는 장면까지도, 철저히 정서가 배제된 사실만이 냉정히 서술된다. 무엇보다 나는 단 한 번도 아내의 삶과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다.

선망과 동경의 대상인, 생을 확인하게 하는 추은주
그런데 그런 아내의 병상을 지키면서도 떨쳐내 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동경하는 추은주는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가? 신입 사원으로 들어온 이후 나에게 온갖 선망과 경이를 불러일으키는 여인 추은주. “햇빛처럼 완연”한 몸, “세상 속으로 밀치고 나오는 듯한 몸” “스스로 자족해 보”이는 몸을 가진 그녀는 나에게 “아, 살아 있는 것은 저렇게 확실하고 가득 찬 것이로구나”를 연발하게 한다. 물론 그것은 죽어가는 아내, 생을 잃어가는 아내와, 지독한 전립선염에 시달리며 인위적 배뇨를 해야 몸의 무거움을 덜어낼 수 있는, 역시 노화한 자신에 대한 사유가 선행되기에 가능한 토로이리라. “만질 수 없는 풍문과도 같”은 추은주.

그녀가 결혼하던 날, 나는 현실의 온갖 추잡한 업무(화장품의 대량 부작용 사태를 무마하기 위해 피해자들에게 돈을 건네고, 총판장들을 모아 놓고 룸살롱에서 술을 사며 그들이 여자들의 옷을 벗기고 사타구니를 더듬는 광경을 지켜보는 등)를 다하고, “저승에 뜬 달처럼 창백한 달빛이 가득” 펼쳐지는 개펄을 바라보며, “불우”하게 그녀의 몸을 생각한다. 이렇듯, 현실의 잔혹함과 추태들은 내 사유 속에서 추은주를 동경의 자리로만 더욱 깊이 밀어넣는다.

사무실에서 그녀를 오랫동안(신입 사원이던 그녀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그 아이와 함께 밥을 먹는 것까지도) 지켜보았던 그이지만, 그는 그녀에게 단 한 번도 추파 어린 말 한 마디 던진 적이 없다. 그러니 그에게 추은주는 “그토록 확실히 존재”하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것”인 언제나 “3인칭”인 존재이다.

그는 동경의 대상이기만 한 추은주에게 “말로 환생하기를 갈구하는 기갈이나 허기” “눈보라나 저녁놀처럼,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말의 환영”들을 붙잡아 경어체로 편지를 쓴다. “당신께 달려가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사랑한다고, 시급히 자백하지 않으면 아내와 저와 그리고 이 병원과 울트라 마린블루의 화장품과 이미지들이 모두 일시에 증발해 버리고 말 것 같은 조바심으로 저는 발을 구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저의 조바심을 아신다면, 여자인 당신의 가슴은 저를 안아주실 것만 같았습니다”라고. 그러나 독백은 독백에 그칠 뿐 현실의 그는 단 한 걸음도 그녀를 향해 내딛지 않는다. 추은주라는 동경의 대상은 그의 사유 속에서만 오히려 지극한 환희를 줄 것이므로.

신비로운 생명의 존재이나 인격은 없는 여성들
이렇듯 김훈의 여성은 철저히 대상이다. 그들은 관찰과 사유와 사색과 동경의 대상일 뿐, 그 스스로는 결코 온전히 생생하게 살지 않는다. 김훈에게 여성은 생명이며, 아름다움이며, 동경이며, 사랑이지만, 결코 주체이거나 인격을 지닌 사회적이고 심리적이며 정서적인 존재는 아닌 것이다. 그들은 철저히 3인칭이라, 내가 현실적으로 다가가는 2인칭의 당신(너무나 현실적이기만 해서 내게 아무런 환희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당신으로는 존재한다)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김훈이 그려내는 여성은 인격이 없다는 점이 나는 슬프다. 그녀들은 완전히 처절하고 적나라한 현실의 일부이거나, 아니라면 생명 이전의 존재, 오직 생명 그 자체이자 신비로운 존재이기만 하다. 그들은 여성이라는 인간이기보다는 암컷이라는 성을 지닌 신비로운 생명체일 뿐이다. 특히 같은 책에 실린 산문 〈여자의 풍경, 시간의 풍경〉은 김훈이 여성을 보는 시각을 보다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여성은 마치 시간과도 동일시되는 혹은 시간이라는 것을 완연히 넘어선 시초의 무엇, 어떤 생명, 그러나 인격이기보다는 풍경일 수밖에 없는 아름다움이다.

이 산문에서 김훈은 자신 속에서 피어난 “만유 관능의 충동”을 호텔 창 밖으로 보이는 한 토인 여자에게 전가한다. “(…) 관능은 불멸의 추억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육신에 대한 그리움은 아니었으며 여자에 한 그리움도 아니었으나, 그 그리움의 대상이 인간의 여자였다 하더라도 무방했으며, 들개나 염소의 암컷이라 해도 역시 무방했다”고 토로하는 문장은 김훈이 지닌 여성의 이미지를 분명히 드러낸다.

“익명의 여자였으며 나로부터 문명의 수 세기와 지리의 수억만 리로 격절된 여자”인 그녀, “문명이나 교육에 의하여 형성된 여자는 아”닌, “오직 종족의 유전자만으로 형성된 여자”인 그녀를 창을 통해 내다 보며(물론 그는 결코 단 한 걸음도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다가간다면 동경의 환상과 신비를 잃을 것이 기 때문이리라), “저 익명의 여자를 축으로! 삼아 회전하는 세계와 시간의 공전은 따스하고 포근했으며, 비릿하고 달았고, 서늘하고 축축하였다”라고 김훈은 쓴다. 그에게 여성은 “인식되지 않은 불귀순의 시간과 공간을 헤치고, 세계의 표면을 걸어서” ‘오직 사유 속에서만’ “한 걸음씩 내게로 가까이 오는 여자”(실은 내가 사유 속에서만 다가온다고 구성하는 여자)인 것이다.

“내가 잠든 사이에 저 토인의 여자가 내 방에 찾아와서 시간 속에서 출렁거리던 그 젖가슴으로 나를 안아주고, 그리고 내가 잠에서 깨기 전에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었을까”라며, “나에게 찾아온 새로운 힘을 ‘사랑’이라고 이름 붙였다”라는 문장은 아름답지만, 씁쓸하다. 그에게 ‘사랑’이라는 단어는 이토록 동경과 신비감이 없이는 불가능한, ‘결코 닿을 수 없는 무엇’이어야만 하는가? 모순과 동경의 힘으로 섬세한 천을 짜듯 아름답게 언어를 기우고 짜집으면서 그가 갈구하는 여성은 이다지도 꼭 동경 속에 있어야만 아름다운가?

김훈의 문장이, 김훈의 언어가, 김훈의 작품들의 원리가, 김훈의 여성까지도 ‘모순’과 ‘동경’을 기본 원리로 하고 있다고 여기면서도, 여성을 그렇게 양극단으로 혹은 동경의 대상으로만 그려내는 데는 불만과 아쉬움을, 슬픔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 이유를 나의 성이 여성이라는 사실에서만 찾아야 할까?

〈화장〉에서 그려진, 그저 철저히 자연에 가까운 동물로서의 여성과 서글프도록 아름답게 생을 발산하는 여성. 그러나 그들은 인격을 지닌 하나의 인간이기보다는, 생명 그 자체로 흡수되어 버린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나는 그 여성들의 중간 지점에, 여성을 사유하는 남성과 마찬가지로 사유하고 느끼며 때로는 인간답게 때로는 인간답지 않게 살아갈 그 여성들의 드러나지 않은 모습들에 말을 건네고 싶다. 여성은 (물론, 너무나 확실하게도) 남성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고매한 인격을 가진 인간이자 주체이니, 그들은 남성의 ‘대상’이 아니라 ‘상대’여야 하지 않을까?

권민정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5-01-26 15:31


권민정 자유기고가 eunsae7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