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인간 군상들의 '오늘' 살아내기불행과 절망을 유머로 넘어가며 삶을 꿋꿋하게 긍정하는 힘

윤성희 <유턴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
[문학과 페미니즘] 소소한 인간 군상들의 '오늘' 살아내기
불행과 절망을 유머로 넘어가며 삶을 꿋꿋하게 긍정하는 힘


<거기 당신?> 윤성희 소설집, 문학동네, 2004.

1999년 등단하여 몇 년 사이 두 권의 소설집을 묶어 내고, 나름의 독특한 언어를 확보하고 있는 윤성희는 꾸준히 지켜볼 만한 작가다. 그의 소설은 몇 가지 점에서 매우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는데, 일단은 간결한 문체가 눈에 띈다. 대다수의 여성 작가들이 아름다운 혹은 섬뜩한 비유 등을 동원해 섬세하고 차분한 내면 묘사를 그 장기로 하고 있는데 반해, 윤성희는 단순하고 간결하게 일련의 사건을 요약하거나 어떤 상황의 외면만을 보고하듯 서술한다. 대부분의 문장은 단문이고, 감정을 드러내는 형용사나 부사는 거의 사용되지 않으며, 미사여구나 수사적 표현은 철저히 배제된다.

그는 어쩌면 소설을 읽듯이 소설을 쓰는 지도 모른다. 그의 소설에서는 장편 소설의 한 페이지 혹은 몇 페이지가 짤막한 몇 문장으로 정리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며, 간혹 문장 간의 공백(그 시간과 공간의 비약)은 너무 커서 독자가 재빨리 문맥과 논리를 더듬어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느낌과 정서 혹은 인식으로만 채워도 소설 하나가 나올 듯한 장면도 그는 단 몇 문장만으로 압축해버린다. 가령 이런 식이다. (이번에 풀어갈 소설 <유턴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에서) 몇 시간의 진통 끝에 쌍둥이를 해산하고는 숨을 거둔 어머니, 그 이후 아버지의 행보에 관한 서술은 다음의 단 두 문장이다. “어머니는 당신이 낳은 두 딸을 안아보지 못했다. 장례식이 끝나자 아버지는 언니를 업고 나를 안은 채 고향으로 향했다.”

그렇다면 정서의 표현이 억제된 그의 소설에서 인물들은 어떠한가? 문제는 그 인물들마저 주인공이라는 명칭을 붙이기에 무언가 석연찮은 ‘그럭저럭’한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그들 개개의 삶은 비통하고 참담할지 모르나 그들은 결코 그 비통과 참담, 혹은 절망에 함몰되지도 그것을 제대로 토로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이 의지적으로 삶을 개척해가거나, 대단한 꿈을 품고 있거나, 삶의 변혁을 대단하게 실현하지도 않는다. 삶에 냉소를 머금거나, 불행을 가능하게 만든 사회의 구조와 조직에 비판을 가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저 일상에서 마주쳐도 결코 기억되지 않을 소소한 인물들, 심지어 자신의 그림자도 갖고 있지 못한 희미한 인물들인 것이다. 그래서 그 대단치도 않을 인물들(대단하게 그려냈다면 대단했을 법도 할 터이나, 그렇게 그려지지 않아서)의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각기 ? 摸?10개의 단편을 읽었음에도, 그들 나름의 각양각색의 인생편력들을 다 알게 되었음에도, 누가 누구인지 분간조차 쉽지가 않다. 그들 혹은 그들의 삶이 비슷해서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존재감이 너무 간결하고 건조하게 그려져서, 늘 흐릿하고 희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런 희미하고 소소한 인물들을 너무나 간결하게 그려낸 윤성희 소설의 매력은 무엇일까? 그의 두 번째 소설집인 <거기 당신?>의 첫 작품 <유턴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를 살펴보면서 그 해답을 찾아본다.

불행을 불행이라고 말하지 않기
어떠한 불만이나 절망의 토로도 없이 간결하게 서술된 나의 불행을 먼저 보자. 내 할아버지는 배 다른 자식을 여덟이나 둔 나이트클럽의 사장이다. 그 장남인 아버지는 철이 들어 가출했던 집을, 쌍둥이(나와 언니)를 낳고 죽은 아내의 장례를 치르고 다시 찾는다. 이웃 할머니의 손에서 자라며 나와 함께 서로를 장난감으로 여기던 쌍둥이 언니는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자장면 배달 오토바이에 치어 죽는다. 할아버지의 사후 재산문제가 불거졌을 때 다시 집을 나간 아버지는 기차칸에서 숨을 거둔다.

이후 나는 다니던 여행사를 그만두고 부산행 새마을호 기차를 타고 “아버지가 기차를 탔던 서울역에서 시체로 발견된 부산역 사이, 기차가 어디를 통과할 때쯤 아버지의 심장이 멈췄는지 짐작”해보면서 서울과 부산을 왕복한다. 그러다 우연히 만나게 된 Q. “원래의 꿈은 기차를 몰아보는 것”이었으나 “그 꿈을 이루지 못한 대신 가장 비슷한 일”인 지하철 기관사로 일하던 그는 열차로 뛰어들어 자살한 여자를 본 이후 중국집을 하고 있다. 그들에 유명 여배우의 숨겨진 딸로 어머니 외에?자신의 존재를 모르는, “유령”이라는 별명을 가진 W가 가세한다. W는 사람들 눈에 잘 띄지도 않고 “자신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경험까지 있지만, 매운 음식을 먹으면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고 말하면 자신만의 매운 소스를 늘 지니고 다닌다.

어느 날 그런 우리 셋에게 가출한 고등학생 여학생이 “사실 저에겐 보물지도가 있는데, 생각 있으면 저랑 같이 찾으러 가실래요?”라는 제안을 던진다. “우리 셋은 지금 몹시 심심해”라고 말하며, 고등학생의 제안을 받아들인 그들은 갖가지 준비를 마친 후 보물을 찾으러 떠난다. 우여곡절 끝에 보물지도의 정점에 도달했으나, 1미터나 흙을 파내어도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가지고 온 모든 것을 구덩이 속에 던져 넣고는 집으로 돌아온다. “보물을 찾으러 갔다 온 사이, 주방장이 도망을 갔”고 “Q는 주방 바닥에 주저앉아 어린아이처럼” 운다. 그러나 나는 “그만 울고 싶을 때까지 울어요!”라고 말하고 W는 “이럴 땐 매운 음식을 먹는 게 최고예요”라고 말한다. “슬퍼서 울었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매워서 울었다고 말하는 게 덜 쪽팔리잖아요”라면서.

매운 냉면을 먹다 문득 든 생각으로, 새롭게 만두와 쫄면 가게를 차린 그들. 가게가 성업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후, “밤이 길게 느껴지는 날이면 나는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렸다. 한참 달리다 마음에 드는 휴게소에 들어가 어묵을 한 그릇 사먹는 게 유일한 취미였다. 방에 전국지도를 붙여놓고, 붉은색 펜으로 어묵이 맛있는 휴게소에 동그라미를 쳤다.” 어느 날 고속도로를 달리던 나는 “생일 축하해, 언니.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언니가 몇 년만 더 살았다면 (…) 내가 언니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치사해!” 한참 후 “국물을 마시다 말고 나는 내게 말했다. 생일 축하해.” “나는 다음 톨게이트에서 유턴을 한 다음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은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려볼까, 어느 휴게소의 어묵이 맛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불행한 과거를 짊어지고 늘 고독하지만, 웃고 교감하며 ‘오늘’을 살기
각자의 불행한 사연들을 지니고 있지만 절망하지는 않는 이들, 단지 ‘심심해서’ 보물을 찾으러 나섰으나 보물이 없어도 크게 실망하지는 않고 지도를 묻고 유턴을 할 줄 아는 이들, 또 다른 불행을 만나도 매운 음식을 먹으며 살아있음을 느끼려 하는 이들, 슬퍼서 눈물이 나도 매워서 눈물난다고 말할 수 있는 이들. 이들에게서 피어나는 정감 어린 애정과 따뜻한 유머가 윤성희의 소설에 숨은 매력일 것이다.

슬퍼도 슬퍼하지 않고,-“한숨을 쉬었다. 슬프지 않았다. 가슴에서 메달처럼 환한 무엇인가가 반짝였다. 울면 그것이 녹슬 것만 같았다.”(<어린이 암산왕>)-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 크게 미련을 두거나 욕심을 부리지도 않는 이들은 오히려 그래서 건강하게 ‘오늘’을 살아낸다. 묵묵히 ‘오늘’을 살아내는 꿋꿋함은, 운명을 받아들이고 삶의 부조리를 유머로 수긍하며 넘어설 수 있는 따뜻한 활기를 생산해낸다-“평생 이렇게 지나가버려라! 책을 꽂다 말고 그녀가 웃었다. 아르바이트 학생도 따라 웃었다. 웃다가, 그녀는 경쾌한 자신의 웃음소리가 너무 어색해서 주춤했다. 내 웃음 소리가 이랬나? 잠시 이런 생각을 한 다음, 허리를 움켜잡고 더 큰 소리로 웃었다.”(<그 남자의 책 198쪽>) 유턴을 할 지점에서는 아무 미련 없이 보물지도를 버리고 유턴을 해서 다른 삶을 살아갈 ? ?있는 용기와 건강함이 그들에게는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일상은 묵묵하고 대수롭지 않지만 하나의 축제가 된다. 어떤 과장의 몸짓도 보이지 않는 소소한 사람들의 간결한 이야기 속에는 비참하고 불행한 사연들이 숨겨져 있지만, 그 ‘과거’들은 ‘오늘’의 활기 때문에 오히려 이야기의 배경으로 가라앉고 만다. 인물들은 진부하고 지루하며 잡다하기만 한 삶을 나름대로 특이하고 유쾌하게 혹은 그저 묵묵히 잘도 넘어 간다. 어쩌면 그것이, 어떤 특출한 삶도 그리 특출할 수는 없는 후기 자본주의의 현대적 일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인지도 모르겠다. ‘경험’을 상실한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일상을 긍정하고 묵묵하고 꿋꿋하면서도 웃어야 하는 지혜를 윤성희의 소설은 보여준다. 그리고 어쩌면 어느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고, 망각으로 지워져버릴 그 소소한 존재들, 우리가 늘 마주치게 되는 (실은 ‘우리’ 자신일지도 ? 霽? 그들은 숨은 활기와 삶에 대한 에너지를 조용히 뿜어내며 ‘오늘’을 살아낸다. 끊임없이 자신을 객관화하는 힘으로, 자기 연민에 함몰될 가능성들을 사뿐하게 넘어가며, 자신을 세상 속 한 인간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조금은 씁쓸하고 쓸쓸하지만 나름의 반짝이는 건강함과 애정이 숨을 쉰다.

늘 불운하고 고독할지라도 지치거나 절망하기보다는, 타자와의 작은 소통을 긍정하며 살아가는 그들. 그들은 고독에 함몰되지 않듯, 타자와의 교감이나 애정에도 함몰되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당신’들은 늘 ‘거기’ 있기 때문이다.-그의 허리를 꽉 잡고, 그녀는 어머니 뱃속에 있었던 여덟 달 동안 얼마나 외로웠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녀는 가만히 그의 등에 귀를 대보았다. 난 당신의 말을 믿어요. 그의 몸 속에서 그런 말들이 들려왔다.”(<거기 당신?>) ‘거기, 당신’이 어느 날 홀연히 나를 배반하고 떠난다 하더라도, 나는 또 다른 ‘당신’들을 바로 ‘거기’에서 만날 터이니, 그리하여 숱한 ‘오늘’들을 살아야 하고 살아낼 터이니 말이다.

입력시간 : 2005-03-02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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