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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페미니즘] 신경숙의 <감자 먹는 사람들>
모든 슬프고 아픈 이들에게 가만히 가만히 속삭인다
내면의 이해와 공감으로 무수히 여울지는 삶과 마음의 결들


1990년대와 신경숙처럼 행복하게 만난 작가도 드물다. 1985년 등단한 그는 90년대 세목을 집중시킨 여러 소설집들을 펴냈고, 그의 소설들은 평론가들의 극찬 뿐 아니라 많은 독자들의 사랑도 얻어내었다. 그 이유는? 물론 한 마디로 답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가장 크게는, 신경숙의 소설이 기존의 소설이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어떤 은밀하고 고요한 내면의 풍경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은 세상의 소외되고 슬프고 아픈 사연들을 조곤조곤 말한다. 도무지 여성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신경숙의 언어는 소설 속 아픈 이들에게 건네질 뿐 아니라, 소설 밖의 위로가 필요한 이들에게도 가만히 속삭여진다. 그리고 그 고요하게 속삭이는 내면의 풍경 속에는, 80년대가 잊고 있었던 또 다른 세상이 스며들어 있다. 아니, 내면으로 스며들어 또 하나의 내면이 되어버린 70~80년대의 ! 사회가 오히려 절절하게 펼쳐지기도 하다. 어떤 억압되었던 목소리와 시선을 신경숙은 살게 만든 것이다.

소설에서 펼쳐지는, 수많은 환유들로 이어지는 마음결들을 따라가다 보면, 현실 속에 숨은 환상의 지점들까지 고요하게 풀어내는 그 언어들을 읽다보면, 독자는 어느새 무장해제가 되어 나른해진다. 그 조곤거림들에 취해버릴 것만 같다. 무수한 슬픔, 그리움, 애잔함들을 어루만지고 쓰다듬는 그 손길이라니. 그 속에서 길어올리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 신뢰, 공감들이라니. 그저 그 너울거림들에 순간 순간 여울지는 내면의 풍경 속에 잠겨버리면 족한 것이다.

1996년 발표된 <감자 먹는 사람들>은 신경숙 초기 소설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애잔하지만 결코 슬프지 않은, 고즈넉히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그의 초기 대표작 <풍금이 있던 자리>처럼 서간체 형식으로 씌어진 이 소설은, 보내지 않을 혹은 보내지는 못할 편지를 담담하고 나지막히 써내려간다.

- “마음이 슬픈 자는 행복하다. 그는 위로받을 것이다”
편지는 서른 다섯에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윤희 언니를 향하고 있지만, 그런 것은 중요치 않다. 화자가 말을 걸고 있는 것은 윤희 언니 뿐 아니라, 열한 살에 양 부모를 한꺼번에 잃고 모든 말들을 가슴에만 묻고 살아온 아버지, 힘겨운 유년을 견디고 살아내었지만 자신의 아이가 세 살도 안 되어 소아당뇨에 걸려버린 유순이, 치매에 걸린 남편을 간호하며 남편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자학하는 아내, 두 아이를 홍수에 잃은 한 남자,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위로가 필요한 모든 사람들에게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소설 속에서 조용히 복원되어 위안을 받는다. ‘나’는 그들의 삶과 아픔에 공감하고 그 상처의 지점들을 가만히 가만히 쓰다듬는다. 왜냐하면 “마음이 슬픈 자는 행복하다. 그는 위로받을 것”이기 때문이고, “인간으로서는 어찌해볼 수 없는 속수! 무책의 막다른 슬픔에 빠질 때는 그 말 자체가 또 도리 없이 비빌 언덕이 되어 가슴을 쓸어내려 주기도” 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보내거나 떠나야 하는 일은 너무 슬픈 일”이지만, “그럴 밖에 별 도리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에, 나는 그들의 삶이 지닌 아픔과 굴곡에 완전히 함몰되지도, 그들을 냉정한 시선으로만 보지도 않고 다만 찬찬히 그들을 바라보고 내 온기를 전한다. 그 은근한 거리 감각이 신경숙 소설이 보여주는 미학의 한 지점이다.

- “어찌던지 살아야 쓰겄는디 어찌 살거나…. 어찌 살거나”
아픈 남편이 손을 잡아 주면 “그렇게 손을 잡히고 나면 하루 분의 영양분을 공급받은 것 같이 아무렇지도 않게 하루를 버틸 수가 있었다”던 윤희 언니처럼. 이십 년 만에 만난 나에게 지금까지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고, “꼭 한 번만 만나봤으면 원이 없을 것만 같던 나를 만났으니 행복하다”고 말하는 유순이처럼. 홍수에 두 아이를 잃어버리고는 “사랑이란 그렇게 말이 많은 게 아니야. 못해준 것만 생각나는 것이 사랑이라구”라고 말하며 엉엉 울어버리는 한 남자처럼. 그들을 살게 했던 마음의 풍경들은 남루하지만 아름답다.

그리고 아버지. 칠년 전의 병이 재발해 엄청난 기억력 감퇴와 심한 수면장애를 앓으며 병상에 누워있는 아버지는 “가난했던 과거, 병이 침투한 현재, 이젠 당신 혼자서 흙으로 돌아가야 할 미래“를 품고 내게 처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만든다. “표정에 마음의 일을 전혀 내비치지 않던” 아버지가 보여주는 눈물들. “문득 지난 생애의 자취를 한몫에 싹, 문질러버리고 울고 계시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나는 그의 삶의 갈피들을 넘나들며 그의 삶에 공감하고 이해하기 시작한다. 겨우 열한 살에 양 부모를 한꺼번에 잃고 기차 철로에 뛰어들어 죽을 궁리를 했지만 “기차가 그르케 무서운 걸 보면 그나마 죽기는 다 튼 거고 어찌던지 살아야 쓰겄는디 어찌 살거나…. 어찌 살거나”를 생각했다는 그. 그리고는 “암말고 안 허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무기”였다고 아버지는 처음으로 ! 내게 고백한다. 그리고 그는 “나는 오늘 같이 가을볕이 좋은 날, 밭에서 고구마를 캐다가 그렇게 갈라네. 늦봄볕이 따사로운 날 감자를 캐다가 가만히”라고 중얼거린다.

소설의 중간중간에는 환청과도 같은 “기차의 강철바퀴 소리”, “철거덕철거덕 그 무서운 소리”가 있다. 그것은 죽음을 불러오는 두려운 소리인 동시에, 죽음이 너무 무서워서 결국 살게 만드는 소리이기도 하다. 아버지를, 윤희 언니를 또한 나를 살게 만드는 두려운 소리. 결국 죽음의 소리는 삶을 끌어낸다.

신경숙은 삶에 대한 신뢰와 인간에 대한 애정을 이렇게 펼쳐놓았다. 그는 개개의 인간이 가진 심연에 대한 깊은 공감과 이해로, 사라져버리거나 사라져버릴 존재 혹은 기억되지 않거나 기억되지 않을 존재들을 가만가만 살려놓는다. 소통의 통로들이 너무 쉽게 차단당하고, 모든 것이 낯선 타자의 얼굴로 다가오는 현대에, 비록 내면화된 고립의 지점에서이지만 타인의 마음결들을 짚어내며 그 속에서 피어날 이해와 공감의 가능성을 신경숙은 보여주었다. 자신의 내면에 비추어진 타자의 삶에서 시작된 소설이라는 여정은, 새롭게 엮여가는 관계를 만들어 낯선 얼굴들은 서로 바라보며 상처를 어루만지게 된다. 이윽고 차근차근 쌓고 쌓기를 반복하는 상처의 기억들은 ‘나’와 ‘그’ 사이의 막연한 경계마저 서서히 무화시킨다. 근원적으로는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 포기하지 않는 마음들. 슬픔이나 애잔함, 그리움과 쓸쓸함들을 가만히 쓰다듬을 수 있는 마음의 무늬결과 언어의 여울짐들이 따뜻하다. 마치 고흐의 그림 속 ‘감자 먹는 사람들’이 빈곤하고 남루하지만 아름다운 이유처럼, 소설 속 ‘감자 먹는 사람들’은 아름답다. 소설 속 내가 노래를 부르고 싶은 까닭도 거기에 있다.

“한 사람의 일생으로부터 마지막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 나는 그만 조용해져서 창에 이마를 갖다 대게 됩니다. 그 어떤 것도 내 가슴속을 잠식하기 시작한 이 마음 시림을 투명하게 걷어내주진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미 누군가의 존재를 잊었듯이, 나의 존재를 기억할 나의 증인들도 사라지겠죠. 나의 아버지를 시작으로 해서 이제 나는 끝도 없이 나의 증인들을 잃어갈 것입니다. 가을이 끝나가는 저 하늘에 잠시 모였다가 흩어지는 저 구름처럼, 결국은 아무것도 남지 않겠죠. 존재의 무. 그러나 끝없는 순환. 한편에서 나의 증인들은 사라지고 다른 한편에서 나의 증인들은 태어나고… 생의 갑옷은 철갑옷인가 봅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은 욕망이 더 강해지는 건 또 어인 까닭인지.”

** <오래 전 집을 떠날 때> 신경숙 소설집, 창작과비평사, 1996.

소설에서는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에 대한 사유가 다음과 같이 펼쳐진다.

“그들은 희미한 등불 아래서 허름한 옷차림으로 낡은 탁자에 둘러앉아 감자를 까먹고 있었죠. (…) 낡은 의복과 울뚝불뚝한 얼굴은 어두웠지만 선량해 보였습니다. 감자를 향해 내밀고 있는 손은 노동에 바싹 야위어 있었지요. (…) 그들은 막 노동에서 돌아온 것 같았습니다. 불을 켜놓은 걸 보면 밤이 아니겠습니까. 불빛은 낡은 탁자를 온화하게도 비추고 있었습니다. 하루 분의 노동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하는 것일까? 저녁식사가 저 몇 알의 감자일까? 그래도 그들의 표정은 무척 풍부했습니다. 태양 아래의 감자밭이 그들 얼굴 위로 펼쳐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비참에 억눌릴 만도 한데, 오히려 그들의 표정은 인간에 대한 깊은 공감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눈빛과 손짓과 낡은 의복으로요.”

그리고 이 그림 속 풍경은 소설 전체를 반향한다. 남루하지만 인간과 생에 대한 공감을 잃지 않는 또 다른 ‘감자 먹는 사람들’이 언어로 펼쳐지는 것이다.




권민정 자유기고가 eunsae77@naver.com


입력시간 : 2005-03-08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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