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 역할에만 충실했던 당신의오롯한 쓸쓸함을 어루만지기까지

[문학과 페미니즘] 박완서의 <너무도 쓸쓸한 당신>
가부장 역할에만 충실했던 당신의
오롯한 쓸쓸함을 어루만지기까지


<너무도 쓸쓸한 당신> 박완서 소설집, 창작과비평사, 1998.

사람에게 늙음이란 노년이란 무엇일까? 젊음에는 그것이 어떤 모습이라도 찬란한 생기가 따라붙지만, 늙음이라는 단어에는 늘 남루와 궁상스러움이 먼저 떠오른다. 아무 것도 대단하게는 혹은 제대로라도 하기 힘든 인생의 황혼기를 맞게 되는 날 어떤 생각들을 하게 될까? 어쩌면 남은 생을 죽음으로 향하는 “길고 재미없는 영화”로 여기고, 그것이 끝나기만을 묵묵히 기다리게 될 지도 모르리라. 그러나 늙어보지도 않고 어찌 늙음을 함부로 말할 수 있으랴?

고희를 눈앞에 두고 일곱 번째 소설집을 펴냈던 박완서에게서 작은 단서를 찾아 보자. 그는 “늙은이 너무 불쌍해 마라, 늙어도 살맛은 여전하단다”고 말한다. “아직도 사는 것을 맛있어하면서 살고 있”다는 박완서는, “물론 내가 맛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단맛만은 아니다. 쓰고 불편한 것의 맛을 아는 게 연륜이고, 나는 감추려야 감출 길 없는 내 연륜을 당당하게 긍정하고 싶다”며, 한 번 더 ‘노년의 살 맛’에 대해 못을 박는다. “젊은이들 보기엔 무슨 맛으로 살까 싶은 늙은이들 얘기가 대부분”인 이 소설집은 그래서 오히려 젊은이들에게 놀랍다. 생을 거의 다 살아내어도 결코 답을 주지 않는, 처음부터 정답이란 불가능한 그 놈의 삶에 대해 ‘이런 이런! 삶이란, 삶이란…’을 중얼거리게 만드는 것이다. 이야깃거리가 될 수 없을 듯 한 일상의 소소함들도 문학으로 만들어내! 는 박완서의 손맛, 노년을 말하고 있는 만큼 특히나 연륜이 빛나는 소설들이 담겨있다. 소름끼칠 정도로 가차 없고 매몰찬 성찰들로 상투적 허위들을 파헤쳐내다가도, 그 모서리들을 궁굴려 건강한 생명들을 찾고 마침내 삶에 대한 관용과 애정을 은은히 덧입히는 그 노년이 아름답다.

그리하여 독자는 노년의 삶에 대해 이런 정도의 결론에는 도달할 수 있으리라. “차라리 공식이 통하지 않는 그 난해함 때문에 그 일을 한 번 더 해보고 싶다”거나, “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아니라 “난해한 영화”이기 때문에, “혹시라도 이번엔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을까 해서 한두 번 더 보게 되는” 그런 것이 (남은 시간과는 상관없는) 삶이라는 괴물이 아닐까? “사람 팔자는 관 뚜껑 덮을 때까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그야말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난해한 숙제”이니 말이다.

- “내가 저를 불쌍해하면 했지 왜 저가 나를 불쌍해한담, 아니꼽게스리”
<너무도 쓸쓸한 당신>은 노년을 살아가는 한 부부의 이야기이다. 황혼기의 초라함과 궁색함이 구질구질하게 따라붙은 남편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들이 담담하게 펼쳐진다. 전직 초등학교 교장인 남편은 “입만 열었다 하면 옛날 고렷적 도덕책 같은 소리만 하는” 사람. “갈등 없는 추종”만을 하며 살아온 남편의 모습을 경멸했던 그녀는 “아이들 뒷바라지를 핑계”로 남편과 이미 오래 전 별거를 시작했다. 이후 남편은 퇴직을 했고 아이들은 장성해서 결혼했으나, 그녀는 시골에서 홀로 사는 남편과 결코 합칠 생각이 없을뿐더러, 남편의 새 거처조차 단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위로가 필요 없는 사람”인 남편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위로가 필요 없는 인간처럼 참을 수 없는 인격이 또 있을까. 그의 체제순응은 강요된 것도 의도적인 것도 아닌 체질적인 거였다. 그의 매력 없음의 본질 같은 거였다”라며 냉소할 따름.

그러나 평생 가부장의 역할에만 충실한 남편은, 은퇴 후에도 홀로 궁색하게 살면서 “집념”에 가까운 노력으로 “연금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조금 축내고 전액 식구들한테로 가게 하려”고 애쓴다. 평생을 자신의 행복 같은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살았건만, 현재는 “외딴집 홀아비 살림의 썰렁함, 스산함”을 “구질하게” 풍기며, 촌스럽고 초라한 모습일 뿐일 남편.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 그녀?혐오스럽다.

“피차 보호막 없이 부딪친다는 건 잔인한 일”인 부부가 되어 버린 두 사람은 막내 아들의 대학 졸업식장에서 사돈까지 앞에 놓고 마주한다. 남편의 손톱 밑에는 때가 끼어 있고, 그 손을 본 그녀는 “이물감에 허방을 밟은 것처럼 움찔했다.” 남편의 구질구질하고 꾀죄죄한 행색을 바라보다, “감질나는 옛 기억을 붙잡으려” 시도해 보며 “그땐 그를 사랑했었나?”를 떠올려보지만 “한때 있었던 것의 사라짐”은 “일말의 우수”조차 남기지 않는다. 그런데 남편의 “짧은 눈길”은 오히려 그녀에게 “연민 같은 걸” 보인다. 당황스러운 그녀는 “내가 저를 불쌍해하면 했지 왜 저가 나를 불쌍해한담, 아니꼽게스리”라고 중얼거리는데.

- “흔히 등을 긁어준다는 식의 스킨십 정도였다고 해도 그것으로 이 거대한 허전함을 메우고 싶어했다면 그건 욕망보다 크고 아름다운 꿈이 아니었을까”
졸업식을 마치고 쫓기듯 사돈들을 피해 빠져나온 그들은 남편의 집을 방문하려 하다가, 엉겁결에 전망 좋은 러브호텔을 찾게 된다. 그러나 그곳에서 찾은 것은 러브가 아니라, 서로에 대해 제대로 성적 욕망조차 지녀보지 못한 지금까지의 삶이다. “그런 데 한 번도 못 가봤다는 걸 서로 믿을 뿐만 아니라 설사 어느 한쪽이 거기 들어가는 걸 목격했다고 해도 바람피우러 들어간다는 의심도 안할 위인들이었다. 그래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래서 좋은 부부란 말인가. 왜 이 지경까지 되고 만 것일까. 스산한 낭패감으로 잔뜩 추슬렀던 그녀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이윽고 남편에게서 발견한 잔인하도록 가차 없는 늙음. “군더더기 없는 혐오 그 자체”인 남편의 실체. “넓적다리에 약간 남은 살은 물주머니처럼 축 처져 있고, 툭 불거진 무릎 아래 털이 듬성듬성한 정강이는 몽둥이처럼 깡말라 보였다.” 그녀는 “일생을 헛산 것 같은 거대한 허전함”을 느끼며, “검부러기라도 움켜잡듯이 마지막으로 움켜잡은 확실한 게 펴보니 고작 남편의 정강이였다. 그건 그와는 도저히 다시 살을 대고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절망감의 생생한 실체이기도 했다”라고 토로한다.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 제대로 한 번 피어나지도 못하고 시들어버린, 어쩌면 영원히 회복 불가능한 그들 사이의 욕망, 또는 사랑. 그것은 “거대한 허전함”으로 마음속의 공동을 만든다. 그녀는 “구체적 욕망”이 아니라도, “흔히 등을 긁어준다는 식의 스킨십 정도”도 “가망 없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그동안 완전히 단절됐던 몸의 만남을 후회하는 마음으로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그것이 이렇게도 돌이킬 수 없는 실수라고는 미처 몰랐었다.”

- “목구멍으로 뜨겁게 치받”치는, 당신에 대한 연민
갖가지 생각으로 홀로 방황하다 들어온 그녀는 “헐렁하게 낡아빠진 팬티를 입은 채 코를 골고 있”는 남편을 바라본다. 이윽고 연민이 스며들고, 작은 화해의 손놀림이 시작된다. 모기에 물린 자국을 보며, “이 말라빠진 정강이에서 피를 빨다니, 아무리 미물이라도 어떻게 그렇게 잔혹할 수가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그녀에게는 “스스로 원해서 가부장의 고단한 의무에 마냥 얽매여 있으려는 남편에 대한 연민이 목구멍으로 뜨겁게 치받쳤다. 그녀는 세월의 때가 낀 고가구를 어루만지듯이 남편 정강이의 모기 물린 자국을 가만가만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지금 일흔을 바라보는 혹은 넘긴 나이가 된 부부들에 해당하는 것일까. 생의 즐거움을 제대로 영위하지도 못하고 어느새 늙어버린 사람들. 그리고 특히나 한국의 아버지들이란! 가부장의 권위를 위해, 가장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풍요와 속도를 향해서만 치달아온 그들의 청ㆍ장년기. 60~80년대 근대화의 최전선에서 자신의 몸과 정신을 묵묵히 희생하기만 했던 그들에게 남은 것은 이렇듯 쓸쓸한 황혼일 따름인가. 당신들은 응당 부모에게 배운 자식의 도리들을 지켜내며 살았건만, 이미 변화한 세상에서 당신들의 자식들에게는 같은 것을 온당히 요구할 수조차 없다.

평생을 가족을 위해 살아내었지만, 실은 가족에게도 점점 멀어지는 생을 살아내었던 그들. 소외당하는 줄도 모르고 스스로를 소외시키며 살아온 그들에게 남은 것은 어쩌면 모기에나 물린 앙상한 몸뚱어리거나, 쓸쓸하다 표? 痴뗏?할 수 없는(또는 표현할 줄을 모르는) ‘너무도 쓸쓸함’일 뿐인지도 모른다. 차라리 권위나 단상을 잃지나 않았다면, 그에 합당한 경배나 온당한 경멸을 해줄 수도 있으련만. ‘너무도 쓸쓸한 당신’들에게는 씁쓸하고 애달픈 연민만이 가능하다. 그래서 봄의 색들이 서로를 시기하듯 피어나는 이 아름답고도 잔인한 4월에, 오히려 더 ‘너무도 쓸쓸할 당신’들에게 애가를 바친다. 새봄의 찬연함을 온전히 향유하기 위해서라도, 혹은 ‘생의 난해함’을 연습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졸업식장을 “박차고 나가고 싶”은 ‘그녀’는, “잔뜩 긴장하고” 단상만을 바라보는 남편을 차마 끌어내지 못한다. “남편에게 단상이 뭐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단상을 좋아했다. 단상에만 올라가면 저절로 목소리에 권위적인 억양이 붙고, 아무도 흠잡을 수 없는 지당한 소리만 줄줄이 나왔다. 아무리 조그만 집단에서도 단상은 권위의 상징이었다.
그는 단상에 있을 때, 단하에 있는 단 하나 사람이라도 자기를 주목하지 않는 걸 참지 못했다.
주목만이 아니었다. 그가 단상에서 단하에 요구한 것은 경배였을 것이다.” 남편의 전 직업이 교장인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즈음 완연한 노년을 맞이한 어떤 아버지가 단상과 권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그들을 ‘너무도 쓸쓸하게’ 만든 것은 현재에 와서는 결코 아무 것으로도 증명되지 않는 그 가부장의 권위가 아닐런지? 단상에서 내려온 아버지들의 축 쳐진 어깨와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그래서 늘 애달프고 씁쓸하다.

권민정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5-04-12 18:57


권민정 자유기고가 eunsae7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