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사랑과 순결한 결혼이라는이데올로기가 빚어낸 왜곡된 자아상

[문학과 페미니즘] 정이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
낭만적 사랑과 순결한 결혼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빚어낸 왜곡된 자아상


<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소설집, 문학과 지성사, 2003.

작가가 지닌 마음의 결이 만져질 듯 정직하고 담백한 소설이 있는가 하면, 도무지 그 속을 알 수 없어 삐딱하게 보고, 뒤집어도 보고, 이리저리 시선을 옮겨가며 읽어보아야 무언가 건져낼 수 있는 소설이 있다. 역설과 반어로 엮긴 정이현의 소설이 그러하다. 2002년 계간 ‘문학과 사회’신인상 수상작이자 처녀작인 ‘낭만적 사랑과 사회’는 현시대 결혼과 순결의 문제를 보다 정치적인 시각으로 조명하고 있다.

이 작품 뿐 아니라 소설집 대부분의 작품에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적 체계에 철저히 순응하고 편입해 살아가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이 그 속에서 자신의 여성성을 치밀하게 ‘연기’한다는 점이다. 후기 자본주의 소비 사회에서 하나의 대상이자 상품으로 치부되는 여성의 몸을 그들은 철저히 관리하고, 화장이나 다이어트 등으로 자신의 몸을 상품화하고 자본화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물질적 부를 얻기 위해 사회에서 통용되는, 특히 남성이 원하는 여성성을 ‘연기’하는 주인공들은, 그럼으로써 물질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세계를 기만하고자 하지만, 결코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태생적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런 여성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여전히 여성성이 사회적 관행들로 구성된다는 점, 그 속에는 권력적이고 정치적인 관계가 숨어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많은 여성 문학들이 내면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고백적인 언어를 쓰거나, 기존 제도로부터의 일탈(많은 경우에 불륜을 그 소재로 삼는)을 중심적 제재로 다루고 있는데 반해, 정이현 소설은 여성의 내면과 삶에 보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시각을 가미한다. 여기에 정이현 소설이 지닌 페미니즘 문학으로서의 새로운 가능성이 있다.

철저히 ‘여성성’을 ‘연기’하라
주인공이자 화자인 ‘유리’는 오래 된 사회적 관념(결국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산물인)인 순결하고 연약하며 순종적인 여성성을 연기하여 부유한 남성들을 유혹한다. 가부장적 가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오히려 자신을 철저히 그 질서에 순응시키는 인물인 ‘나’. ‘나’는 상대와의 관계가 품는 내적 진실성 따위엔 관심이 없다.

“팬티를 사수하는 것은 세상을 사수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고진감래! 참고 기다리며 지키면, 결국은 달콤한 열매를 얻게 된다”고 외치며 자신의 욕망마저 절제하려는 그녀는 자신의 결혼 상대자가 될 만한 사람을 고르고 골라 자신의 순결을 이용하고자 한다. ‘나’는 만나는 남자들이 어떻게 다르게 키스를 하는 지, 그들이 스킨십을 하는 순서가 각각 어떻게 되는지를 훤히 꿰뚫고 있으며, 그와 별개로 그들의 학벌, 출신, 재력을 꼼꼼하게 가늠하고 있다.

속으로는 “창의력도 없는 놈, 늘 똑같은 코스였다”를 중얼거리면서도, “이러지 마. 이러는 거 내가 싫어하는 거 알잖아”를 연발하는 ‘나’는 실은 남자들의 사랑이라는 것을 신뢰하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경멸하지만, 그것을 가장 잘 이용할 방법의 모색 또한 쉬지 않는다. “남자들은 다 똑같다. 기회만 있으면 어떻게 저 여자랑 한번 자볼까 하는 궁리밖에 하지 않는 주제에 급할 때마다 비밀 병기처럼 사랑을 들이댄다.

사랑하니까 키스해야 하고, 사랑하니까 만져야 하고, 사랑하니까 안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당당하다 못해 뻔뻔한 요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사랑! 피가 한곳으로 몰려 갑갑한 느낌을 해소하고 싶은 몸의 욕망이 도대체 사랑이랑 무슨 관계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아, 산다는 건 정말, 수많은 판단과 무수한 선택의 연속이었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패를 아직 손에 쥐고 있을 때 최대한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 임신 중절의 흔적이 있다면, 이를테면, 의사를 직업으?가진 남자와의 결혼은 택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를 중얼거리는 것이다.

‘내’가 이러한 생각을 품게 된 이면에는 “세상이 아무리 바뀐 거 같아도 여자는 여자야” “여자 몸”은 “금 가는 순간” “그 순간 끝장나는 거야!”라는 부모님의 훈육이 있고, 그보다 더 ‘나’를 두렵게 하는 웰에갚鄕?유리를 붙이지 못해 여기까지 온 사람”인 중산층 주부 엄마처럼 살게 되는 것이다. “내 인생, 엄마처럼 사는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까”는 인생의 가장 중심 모토이다.

낭만적 사랑과 순결한 결혼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가장 잘 이용함으로써 그것을 넘어서려는‘나’. ‘나’에게 그런 자유 연애의 신화는 가족과 사회 제도에 자신을 적응시킴으로써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살아가기 위한 그럴 듯한 명분이다. 그러나 순수, 순결, 정숙함 등을 내세운 ‘나’의 실체는 속물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위장된 순응의 방식 안에서 실은 지독히도 현실적인 ‘나’는, 낭만적 사랑을 하나의 비즈니스로 여기며 그 이데올로기를 역이용한다. 소설은 낭만적 사랑과 결혼에 대한 내밀한 적응 과정을 주시하며, 철저히 사회적이고 정치적으로 구성되는 이 시대 또 하나의 여성상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결국 사랑이라는 가장 일상적 사건에도 사회적 관계가 숨어있고, 낭만적 사랑 역시도 사회적 요구가 만들어낸 시대의 이데올로기임을 작가는 반어적으로 폭로한다.

여성 개인의 욕망이 실은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점에 우리는 보다 주목해야 하는데, 그 속에는 사회의 조직과 규범을 생산해내는 남성의 관점과 그 남성적 틀에 갇혀진 채로 그 틀이 요구하는 이미지에 자신을 맞춰가는 여성들의 나르시시즘이 있다. 그런 권력 구조 속에서 여성은 남성 욕망에 의한 소비의 대상으로, 대상화한 자신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주체로서만 존재하게 된다.

정이현은 이 남성적 규범에 희생된 여성을 오히려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그 규범과 사회적 권력관계를 의문시한다. 그는 철저한 이데올로기 순응자들이 지닌 욕망들과 모순들을 파헤침으로써 그 이데올로기의 작은 틈새를 파고들고자 한다. 그 정치적 시선을 읽어내어야만 정이현 소설을 제대로 읽는 것이다.

연기하며 기만하고자 하지만, 결국 벗어날 수 없는 낭만적 사랑의 환상
다시 소설로 돌아와, 그런 ‘나’에게 “은방울꽃 같다”라고 말해준 남자. “나에 대한 그의 매혹이 진심”이 분명한 남자가 “사랑한다는 둥, 너를 원한다는 둥 입에 바른 소리를 하지 않”고 “대신 자기 가족에 대한 찬찬한 설명과 함께 구체적인 미래의 계획을 들려주었”기에 부유한 집 막내아들에 미국 유수의 로스쿨 학생인 그를 “마침내 내 인생 스물두 해를 걸고 배팅해볼 만한 남자”로 명명한다.

그 관계를 성공시키기 위해 “청순함”을 “나의 컨셉트”로 삼고 철저히 그것을 연기한다. 그리하여 그에게 처녀성을 내주기로 결심하고 “조금 머뭇거려라” “엉덩이를 들지 마라” “모든 것을 그에게 맡겨라” 등의 십계명을 가슴 속에 품고 그 단계를 철저히 실천한다. 그러나 첫 경험이라 제대로 섹스를 하지도 못하는 ‘나’에게 그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렇지만, 이제 곧 나의 흔적을 확인한다면 틀림없이 그도 기뻐할 것이다”라고 위안하며 시트를 들어보는데, 십계명의 마지막 항인 “혈흔은 함께 확인해라”는 가능하지 않다. 시트 위에는 어떤 흔적도 없고, 그는 “너 되게 뻑뻑하더라”라는 말을 던질 뿐이다. 처녀성을 연기했으나(연기가 아니라 실제로도 첫 경험이기는 했다), 그 순결의 증거와 흔적은 전혀 없다.

작가는 순결을 실현하려는 순간에 그것이 증명 불가능한 가상이라는 실체를 드러냄으로써, 처녀성에 대한 환상을 깨뜨린다. 처녀막은 처음부터 실체가 아닌 가상과 기호에 불과한 것이며, 남성적 질서 속에서 철저히 고수 되어온 신화에 불과하다는 점을 통렬한 아이러니로 풀어내는 것이다.

어색한 표정과 느낌으로 호텔을 나온 그와 ‘나’. 그는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로 루이뷔통 백을 들려주고, ‘나’는 그것이 진짜일지를 고민한다. “조용히 운전에 몰두하고 있는 그의 옆얼굴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져서, 나는 마음속으로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아니다. 누가 뭐래도 그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다.” 낭만적 사랑을 외피로 연기하며, 실은 자신의 이해타산만을 따져보던 ‘내’가 기댈 곳도 결국 낭만적 사랑일 수밖에 없다는 아이러니. 연기와 위장이라는 전략의 참패도 자신인 것이다.

‘나’는 낭만적 사랑의 환상을 이용해야 하기에, 그 환상을 떠나서는 존재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철저히 낭만적 사랑을 연기하던 한 여성의 허위를 통렬하게 드러냄으로써, 낭만적 사랑의 실체를 야유하고 비판한다. 그리하여 소설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유리의 성이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 큐빅처럼 흩뿌려진 서울의 불빛들이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나를 바라다본다.” 젊은 층에서 가장 호감도가 높은 특급 호텔이라는 서울 남산의 하얏트 호텔, ‘유리의 성’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하는 호텔을 바라보는 ‘나’. “큐빅처럼 흩뿌려진 ?岾?불빛들”은 철저히 내면적 진정성을 잃은 자본주의의 욕망에 다름 아니다. 그들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짝퉁 명품이 그러하듯이, 실체에서는 모방이자 가짜일 따름이다. 가짜들의 공간에서 가짜인 ‘내’가 있으니, 어찌 보면 이상할 것도 없다.

제도적 이데올로기에 균열을 만들고자 하지만, 그 속에서 철저히 순응하는 외피를 지닌 여성들을 그리며 정이현은 여성성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가면이라는 사실을 폭로한다. 그는 현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에게 연기와 위장을 부여함으로써 그들의 내밀한 욕망과 왜곡상을 그려낸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허위를 비웃고 그 틈을 공략하고자 한다. 특히 독자가 인식하고 고민해야 할 점은 왜곡된 욕망이 궁극적으로는 불평등한 성 구조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환상이 하나의 사회적으로 공인된 허구라는 점이다. 그 모두를 얼마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시각에서 보아내고 인식, 실천하는가는 물론 독자 개개인의 몫이다.

소설에는 명품이나 강남으로 상징되는 현대적 부에 대한 욕망, 상품의 기호들이 출몰한다. 임신을 해서 고민하는 친구에 대해 연민을 갖다가도 친구가 모는 뉴비틀을 보고 "어차피 출발선이 다른 게임이었다"를 외치는 나. 강남이지만 서민 아파트에 살고, 정말 진짜 같지만 짝퉁인 핸드백을 들고 다니는 나는 "혼자 힘으로 이 척박한 세상과 맞서야"하고, "진정으로 강한 여성이 되어야만" 한다고 외친다. 소비 자본주의가 낳은 물신숭배가 여성을 또 다른 통제의 틀로 묶는 상황을 소설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권민정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5-06-01 16:58


권민정 자유기고가 eunsae7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