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린 장편소설, 문학동네, 1999.

전경린의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문학과 페미니즘]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전경린 장편소설, 문학동네, 1999.


파멸할지라도 생생하게 살아 있으라, 비상하라
작가 전경린이 그려내는 여성들은 끊임없이 일탈을 꿈꾼다. 그들은 기만적이고 허위적인 삶에 안주하기보다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그것이 자신의 파괴나 파멸로 이어질지라도 그 욕망의 극단까지 질주하고자 한다.

그들은 오롯이 자신의 욕망으로만 채워지는 삶을 꿈꾸며 그로 인해 진정한 자아로서 살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금기를 깨뜨릴 수밖에 없고(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금기들이 여성의 삶을 억압하고 규정하므로), 그들은 결국 현실과 단절되어(혹은 사회에서 축출되어) 고립되고 유폐되는 “언제나 혼자”인 존재가 되곤 한다.

1999년 출판된 전경린의 장편 소설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은 금지된 사랑의 끝까지 달려갔던 한 여성의 격정적인 사랑을 그리고 있다. 변영주 감독의 영화 <밀애>로 영상화되기도 했던 이 소설에서, 어쩌면 진부하고 통속적인 불륜의 줄거리가 하나의 불꽃처럼 찬연하고 아름답게 피어난다.

소설 속을 살아가는 한 여성의 치열한 자의식과 격정적인 내면의 깊이가, 그를 밟아가는 작가의 섬세하고 선연한 문장들이 독자의 영혼을 울리게 만드는 것이다. 그 은밀한 열정 속에 야성과 광기를 동반한 실존적 사랑이 거친 숨을 쉰다. 사랑은 하나의 실존이자 광기임을, 그것이 사회에서 용인될 수 없는 나쁜 것이라 하더라도, 사랑이란, 사랑이란… 불 속에서 타올라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그 불 속을 뛰어들게 만드는 것임을. 너를 통해 나를 확인하고픈 열망이, 다른 어떤 것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그래서 늘 그저 사랑이라고 밖에는 부를 수 없는 그 지독한 열병을 앓게 만든다는 것을, “삶을 무너뜨리고 얼굴을 다치며 내쫓기는 비합리적인 사랑에 매혹”된다는 전경린이 보여준다. “그런 사랑은 야생적인 것이고 제도 바깥의 것이며 세상이 쳐놓은 휘장 너머로 무한히 열려 있기에”, “그 섬광은 늘 아름다웠기에”.

“넌 단지 부정을 저지른 게 아니라 내 생을 빼앗아버렸어”
어느 날 남편 회사의 여직원이 집으로 찾아와 “행복이란, 무지한 상태의 다른 말이죠. 행복하다는 말은 모른다는 말과 같아”, “당신 같은 안전주의자가 평생을 나누어도 못 나눌 양의 사랑을 우린 나누었어”라며 남편과 자신의 불륜 사실을 폭로한다. “스물 한 살에 만난 남자가 그의 전 생애 동안 오직 나만을 사랑하고 나 또한 단 하나의 남자만을 사랑하며 평생 동안 하나의 생을 온통 함께 사는 것”을 꿈으로 여기던 나는 “생이 두렵다 못해 구역질이 나도록 불결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두통과 불면증에 시달리며 모든 일에서 무감각해진 나. 그런 나를 위해 남편은 시골로 이사를 한다. 남편은 관계 회복을 위해 갖은 노력을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참을 수 있게 하는 사랑이 박탈된” 나는 결코 회복될 수 없다.

“사랑은 교훈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실존적으로 하는 거”
세상의 모든 일에 무심하기만 한 나는 우연히 한 남자를 만난다. 그는 “내가 어딘가 아프다는 것을… 내 속에 고인 피가 나를 잔뜩 누르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 같이” 내게 “괜찮아요?”라고 묻는다. 그 문장은 오랫동안 잃고 있었던 내 생의 감각을 깨워, 내 가슴에 선명히 새겨진다. 그리고 시작된 그와의 사랑. “늘 그렇지만 그런 일은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어떤 사람이 다시는 모르는 사람이 아니게 되는 일. 그 영혼을 보아버리는 일. 나는 즉시 그를 통째로 이해해버린 느낌이었다.”

그는 “사람들은 옷을 입은 채로는 바닷물에 빠지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지만, 옷을 입은 채 바닷물에 빠지는 것도 인생이죠. 마음속에 금지를 가지지 말아요. 생은 그렇게 인색한 게 아니니까. 옷을 말리는 것 따윈 간단해요. 햇볕과 바람 속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되죠”라고 말하며, 서로를 허용하되 상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 끝내는 게임을 제안한다. “오히려 행복이나 불행이 인간을 자유롭게 선택”하듯, “행복이면서 불행인 것이 동시에 우리 둘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나는 나의 상처를 알아봐 준 그에게 나를 허락하게 되? 젓였?그에게 빠져든다. “정말로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끝까지 하는 자들은 나쁜 사람들”, “보다 덜 선량하고, 부도덕하고, 연약하고 이기적이고 히스테릭하고 예민하고 제멋대로이고 불행하고 어둡고 자기 도취적이고 집요하면서도 변덕스럽고 독선적이고 질투하는 사람”들이라면 나 역시 그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휩싸인 사랑의 열정은 나를 확인하고자 하는 열망의 다른 이름이다.

결국 “나 아닌 것들은 다 털어내버리고 오직 나만으로 구별되고 싶었다”는 내 정체성에 대한 갈구가 그에 대한 내 사랑을 더욱 불붙게 만든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삶이 기획한 조건”으로 “구역질과 공포”로까지 규정되는 가정. “아이란, 가정이란 그 아름다운 동화로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유폐시키는가.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이 생에서 실종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여기 있다고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어야 했을까”라는 여성의 삶에 대한 성찰이 있다. 나는 한 사람의 인간이자 여성으로서 내 본질과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만약 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보다 일상적인 일을 할 것이라 토로한다)을 활활 불사른다.

“그 남루하고 무상하고 일시적인 망상에 영혼을 다 던지는 그것이 우리들 존재의 유일한 진실인 것처럼”
그러나 어느 날 이미 예정되어 있던 파멸은 찾아왔다. 나의 불륜을 알게 된 남편은 오열하며 나를 폭행한다. 온몸이 상처와 멍으로 얼룩진 나는 마지막으로 그를 만나 사랑한다는 고백을 듣고, “충분해, 이것으로 충분해”를 되뇐다. 그는 “이제부턴 강해지기를 바라. 강하다는 건 이를 악물고 세상을 이긴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상관없이, 어떤 경우에도 행복하다는 거야”라는 말을 남기고, 나는 “남루하고 무상하고 일시적인 망상에 영혼을 다 던지는 그것이 우리들 존재의 유일한 진실인 것처럼 나는 그에게 파고들었다.” “쾌락의 끝에 보랏빛으로 회오리치는 내 죽음의 모습이 보였다. 사람은 그 자신이 빠져드는 욕망 속에서 동시에 자신의 죽음의 모습도 선택하는 것이다.” 이튿날 나는 그 동안의 “열정이란 그것으로 충분할 뿐 나의 생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가 나고, 그와의 관계가 세상에 모두 알려지기에 이른다.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집을 나온다.

“다른 어느 때보다 더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며 세상을 향해 인사한다”
홀로 낯선 곳에서의 삶을 시작한 나. “낮에는 규를 받아들이고 밤에는 효경을 받아들였던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파괴의 궤적…. 살 속에서 불꽃이 튀어오르던 관능과 격정과 회한의 편린들이 한 차례 몸을 훑고 지나간 뒤에 나는 중얼거렸다. (…) 그때도 지금처럼 가난했어. 그때도 난 혼자였고….” 그런 나를 수소문해 찾아온 남편은 “우리에겐 이제 집이 없어. 우린 집을 가질 수가 없어. 우리가 날려버린 거야. 아주 값싸게…. 하필이면, 내가 너를 위해 안간힘을 다하던 때에, 너와 수를 위해서 모든 좋은 것을 다 해주고 싶었던 때에. 가족을 위해 내 전체를 희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거라고 믿기 시작했을 그 때에…”라고 말한다. 그렇듯 사랑은 늘 어긋났다. 남편만으로 일생의 사랑은 충분하리라 믿었던 나를 남편이 배신했듯이, 남편이 나를 사랑하는 것만으로 생을 채워가고 싶었던 나날들에 나는 남편을 배신했다. 나도 남편도 이제는 더 이상 과거의 나와 그로 돌아갈 수 없으니, 달라진 현재의 나와 그로 각자의 미래를 살아낼 수밖에 없는 일.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지루한 평화. 가난과 고독, 불쑥불쑥 치솟는 화염같이 살갗을 데우는 기억들” 속에서도 “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런데도 생에 대한 나의 의욕은 불가사의하다. 다른 어느 때보다 더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며 세상을 향해 인사한다.” 소설은 다음의 문장으로 끝이 난다. “내 생은 살이 망가진 우산을 펴고 보이지 않는 먼 공중으로 아득히 날려가고 있는 것만 같다. 삶도 둥글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바다를 건너 언젠가는 그 처음으로 가 닿고 싶다. 훼손되지 않은 내 꿈의 맨 처음으로….”

마침내 홀로, 파멸의 광시곡이 끝난 폐허를 딛고 나는 무덤덤하게 낯선 생을 살아간다. 그러나 “지극히 짧은 한순간 하늘을 가른 번갯불이거나 사막을 떠도는 신기루, 여름 한낮의 무지개 같은 근거 없는 낭설일 뿐”이지만, 가장 생의 본질에 맞닿아 있던 그 시간들을 어찌할 것인가. 그 시간들은 결국 廈?求鳴?밖에는 말할 수 없는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로 영원히 내 속에 새겨진 나의 일부인 것을. 그 시기를 거쳐왔기에 나는 더욱 더 ‘나’로 ‘나의 생’을 살고 있는 것을.

날기 위해서는 30도 이상의 체온을 유지해야 한다는 나비. 최대한 햇빛을 쪼여 그 복사열로 체온을 올린다는 나비는, 소설에서 "제도의 온실 속에서 복무하기보다는 차라리 남몰래 나빠지고 싶어하는", 비상을 꿈꾸는 여성을 상징한다. "체온에 대한 욕망, 바로 비상에 대한 욕망"으로 불 속으로 날아드는 나비를 생각하며, '나'는 말한다. "때로 여자가 스스로 불속으로 몸을 던지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에 대해서는 누군가가 규명을 했던가. 혹은 규명하려고 노력이라도 했던가. (…) 나비의 비밀은 체온이 뜨거운 동안만 날 수 있다는 데 있지 않을까. 그리고 여자의 비밀도…"


권민정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5-06-15 16:05


권민정 자유기고가 eunsae7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