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처럼 사라진 여성들, 그러나 소설로 복원되는 그 아픔의 시기

[문학과 페미니즘] 최윤의 <회색 눈사람>
흔적처럼 사라진 여성들,
그러나 소설로 복원되는 그 아픔의 시기


소설을 읽다보면 마음을 긁힐 때가 있다. 굳이 내게 일어날 만한 일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묵묵히 소설에 스며들어 읽다가 내 마음에도 작중 인물의 상처가 너무나 선연히 자국을 낼 때. 그 상처의 자국은 간접적인 경험에 의한 것이지만, 지독히도 선명해서 한 동안 가슴을 아리고 아프게 만든다.

그런데도 그런 상처는 감히 아름답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다. 그 아픔들이 살라고, 살아내라고 나지막히 나지막히 마음속에서 여울지기 때문이다. 1992년 동인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최윤의 <회색눈사람>도 그러하다. 이 소설은 최윤 특유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문체가 특히 빛나는 작품이기도 하다.

역사의 한 시기를 분투하며 살아내었지만 흔적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한 여성의 삶을 그리고 있는데, 화자인 여성의 삶은 다른 남성들의 삶과 대비되어 그려진다. 순간 순간 여성이 고민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남성의 그것들과 다른지를, 여성의 언어가 무엇인지를 작가 최윤은 은근히 내보인다.

늘 관계와 존재에 대한 고민을 쉬지 않는 여성들이 어떻게 사회라는 체계 속에서 사라지게 되는지, 왜 그들은 흔적 같은 존재로만 살아가게 되는지를, 작가는 여성의 내면과 언어 속으로 모든 독자들을 유인하여 보여준다.

“짧은 시기지만 일생을 두고 영향을 미치는 그러한 시기”, “혼란”인 동시에 “아픔”이었던 그 시기
화자인 ‘나’ 강하원은 한 신문 기사(나의 이름을 가지고 타국에서 아사한 한 여성의 기사)를 읽고 이십 년 전의 그 시기, “아, 그때… 하고 가볍게 일축해버릴 수 없는 과거의 시기”, “많은 곡해와 불안과 의혹의 시기였다 할지라도 그때부터 무언가가 다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 시절을 떠올린다. 소설은 “그렇다, 지금쯤은 우리라고 불러도 좋겠다”라는 토로로 시작되는데, 이는 그들(세 명의 남성들)과 함께 일했지만 ‘우리’라고 명명하지도 못했던(그들에게는 늘 타인이었던) 나의 이야기가 비로소 오랜 후에 소설로 복원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난한 고학생이었던 나는 이모에게 나를 맡기고 미군 운전병을 따라 미국으로 가버린 어머니를 원망도 하며, “삶은 불가해하고 생소한 것이었던 반면 최소한 죽음의 느낌은 분명한 것이었고 쉽사리 친해질 수 있는 것이었다”는 식으로 늘 우울과 죽음에의 충동에 시달린다.

그런 “사방이 맥주병 바닥의 두꺼운 유리처럼 어두웠던 날”들에 나는 우연히 ‘안’을 만나 그의 인쇄소에서 일하게 된다. 나에게 “친절을 베풀어준 단 하나의 사람”이 되어버린 안을 연모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안을 통해 내 존재의 충만함을 느끼고 싶지만, 안은 늘 나를 타인으로 대한다. 어느 날 밤 우연히 밤에 모여 일을 하는 그들의 대화를 엿들은 것에 대해서도 “내가 죽음의 유혹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자꾸 밖으로 나오고, 갈 곳이 없기 때문에 인쇄소 근처를 서성이고, 문 뒤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안심이 되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면 그는 이해할 것인가. (…) 그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를 추궁하는 안에게 나는 “가끔 당신에게는 하찮은 것이 위로가 될 때는 없습니까.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의 목소리나 어떤 분위기 같은 것 말입니다. 내가 당신의 목소리와 당신들이 하고 있는 일을 선망으로 바라보면서 약간의 안도와 위로를 얻었다고 해서 당신에게 누가 된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말하고 싶지만, 입 밖으로 내지도 못하고 “저 사람은 결코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 생각만 되뇌었다.”

그러다 나는 오년 이상 지하 운동으로 활동해온 그들의 문화혁명회에 가담하게 된다. 낮에는 인쇄소로, 밤에는 문화혁명회의 편집 작업장으로 사용되었던 그곳에서 나는 ‘안’, ‘김’, ‘정’과 함께 일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내게 그들의 신상이나 본명조차 제대로 알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안과 정, 김이 존재하는 것은 확실했고 그 확실성이면 내게는 충분했다”고 회상한다.

“그들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 나는 사는 일이 그다지 지옥 같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엷은 희망이 생겨나기도 했다. (…) 이들과 한식구가 되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한 걸음을 걸어도 그것이 푹푹 발이 빠지는 모래밭을 걷는 기분이 아닐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낙천적인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나는 그들에게서 멀리 있었다. 그들은 내게서 멀리 있었다.” 그들이 나를 대하며 보이는 “약간의 불신을 동반한 불안의 기색”은 여전하고, “어느 누구도 그들의 회합에 같이 가지 않겠느냐?제안하지 않았다.” “나의 존재가 그들의 언쟁에조차 방해가 되는지 나의 눈치를 보는 게 역력”하기도 했다. 정은 “나의 참여가 위험하다는 식”으로 “나에 대한 드러내놓은 의심”을 보이기도 했다. 함께 일하면서도 늘 나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있었던 남성들과는 달리, 나는 그들에게 언제나 의미 있는 존재이고자 했고, 그들로 인해 내 존재감을 느끼고자 했다. 여성인 내가 바라는 것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신뢰하는 것에 기반한 관계였지만, 그들은 내 바람을 결코 충족시켜주지 않는다. “선생님은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요”일 뿐인 것이다.

“희망이라는 것은 마약과 같은 것”
그러나 어느 날 문화혁명회 활동은 당국에 발각된다. 나는 환히 밝혀진 인쇄소를 보고 뒤돌아서 뛰면서도 “제발 내가 이 자리에서 잡혀서 동료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게 해주십시오. 나는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할 일이 많은 사람들입니다”를 마음속으로 외친다. 이후 시간이 지나며 나는 “기다림”과 “그리움”에 시달리고, 그것을 견디기 위해 그들과 일하면서 준비하던 원고의 내용을 기억하고 요약해 “감히 눈을 붙일 생각도 못 하고 미친 듯이” 세 편의 논문을 재구성한다. “그것은 일종의 기도라면 기도였다. 기억이 살아 있는 한 그들을 향한 나의 송신기가 작동을 하고 있다는 미신적인 자기 암시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교정하는 원고의 많은 부분을 써냈던(한 번도 실제 본 적은 없었던) ‘김희진’이 나를 찾아온다. 그들과 달리 여성인 “김희진은 오래 사귄 사람의 깊은 신임을 가지고 내게 모임이 처한 위험에 대해 말했다.” 나는 그런 김희진을 보고, 그녀에게 내 여권을 빌려주라는 안의 “사무적인 편지”에도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다. 마치 사촌 언니처럼 내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병든 그녀를 나는 “막연한 희망에 대한 막무가내의 기대”로 돌본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오래 전부터, 나도 모르게 그 성격을 규정하기 어려운 희망이란 것에 감염되었음을 알아차렸다.” “그것이 무엇이건 그 가능성을 조금 맛본 사람은 무조건적으로 그것에 애착하게 되는” 그 “마약과 같은” 희망, “고통을 동반하”기에 “그 고통을 알고 있기”에 “더 강화”되는 “희망에의 열망”에 말이다.

그리고 나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 김희진이 내 여권을 위조해 출국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 와중에 만나게 된 정은 그때도 “나에 대한 불신의 역력한 흔적”을 보인다. 나는 “저 사람은 나를 영원히 모르는 채로 다시는 보지 못하겠지”라고 중얼거릴 뿐. 진정한 인간적 신뢰로 맺어진 김희진을 보내고 시간이 지난 후 “강양, 고맙소”라고만 적힌 안의 엽서를 받고, 오래지 않아 안의 검거와 동료들의 활동에 대한 왜곡되고 과장된 해석의 기사를 읽는다. 나는 그 이후 “내가 맛본 희망의 색깔을 주변과 나누려고 여러 가지 일을 벌이기도 했다. 그 후의 나의 삶도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한편 “그 사이 안은 유명한 민중 예술가이자 운동가”가 되어 있었고, 내가 간접적으로 전해준 그 시절 재구성한 논문의 일부를 어떤 잡지에 싣기도 한다.

“아프게 사라진 모든 사람은 그를 알던 이들의 마음에 상처와도 같은 작은 빛을 남긴다”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난 오늘에 와서야 “아, 그 길고도 긴 길의 우울한 초겨울 풍경이라니! 사방은 술병 바닥 두꺼운 유리의 짙은 색깔처럼 흐렸지만 나는 그때 처음으로 희망이라는 단어를 만났다”로 시작되는 “그 시기에 대한 짧은 보고서 형식의 글을 쓰고 싶어했다”고 토로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의 삶은 얘기될 만한 흔적이 없다. (…) 하오의 잠 같기도 한 음악의 소절 같은 나의 삶에 대체 그 누구가 관심을 가질 것인가. 당치도 않은 일”인 것이다. 그러나 소설의 말미에 있는 이 토로는 하나의 반어이기도 하다. 이 소설 속에는 흔적이 없는 나의 삶, 내게 큰 의미로 자리했던 그 시절의 삶이 고스란히 복원되기 때문이다.

내가 끊임없이 고뇌하며 살았던 그 시절, 묵묵히 당시의 원고를 기억해 재구성하기까지 했던(그러나 그 원고의 일부를 잡지에 게재한 것은 내가 아닌 안이었다) 그 시절은 김희진에 대한 애도와 맞물려 하나의 소설이 되었다. 김희진은 타국에서 타인의 이름을 가지고 아사하는 불행을 맞고, 나의 존재 역시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한 시대 속에서 사라졌을 뿐이지만(유명한 민중 예술가이자 운동가가 된 안의 삶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소설 속에서 김희진과 나는 의미 있는 존재로 자리매김되었다. 긴긴 기억의 통로를 지나온 나 역시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이 계절의 하늘은 이토록 무연히 맑을까. 그리고 그 시절의 아픔은 어쩌면 이리도 생생할까. 아픔은 늙을 줄을 모른다. 아픔을 치유해줄 무언가에 대한 기구가 그만큼 생생하고 질기기 때문일까. (…) 아프게 사라진 모든 사람은 그를 알던 이들의 마음에 상처와도 같은 작은 빛을 남긴다.” 이제 아픔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소설의 서두와 말미에 등장하는 아픔에 대한 토로는 실은 내가 갖게 된 희망의 다른 표현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희망이 소설을 만들지는 않는다. 소설은 아픔과 상처로 씌어지는 미완성의 글이므로. “완성된 것은 상처를 지운다. 미완성되는 것만이 상처에 더께가 내려앉게 하여 그 아픔을 한없게” 하기 때문에. 미완성의 상처와 아픔은 그렇듯 끝없이 삶을 완성하고 싶은 열망, 희망과 기구를 불러일으켜 그 시기 이후 나를 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아픔들이 감싸 안은 부재했던 내 과거의 삶들은 고스란히 존재의 자리로 이동해, 마치 부재와도 같던 그 시절을 내 전체 삶 속에서 가장 의미 있는 시기로 명명하게 한다. 그 시절은 사라져버린 부재의 시간이 아니라, 현재의 나와 관계하는 살아 있는 시간이 된 것이다. 결국 “상처와도 같은 작은 빛”으로 그 흔적 같은 여성들의 삶은 복원되었다. 그리고 그 빛은 독자의 가슴에도 새겨져 아리지만 아름다운 빛을 발할 것이다.


권민정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5-06-22 16:28


권민정 자유기고가 eunsae7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