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상처입은 삶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공지영 소설집, 창비, 2004.

[문학과 페미니즘] 공지영의 <별들의 들판>
모든 상처입은 삶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별들의 들판> 공지영 소설집, 창비, 2004.


1988년 등단 이후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해오며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공지영. 속도감 있는 문체에 여성적인 섬세한 감수성이 더해져 그의 작품은 누구든 친근하게 접하고 읽으며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공지영의 신작을 볼 수 없었던 꽤 오랜 기간이 있었다. 그 공백기를 거쳐 지난 2004년부터 공지영은 다시 활발히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전작들에 비해 훨씬 성숙해진 목소리로 인간의 삶과 현실에 대해, 그것들을 더욱 심연으로 녹이고 녹여 세상을 향해 터트리고 있다. 역사와 시대에 대한 사유를, 여성의 삶과 현실에 대한 고민을, 그는 더욱 더 인간 속에서 옹골차게 꾸려낸다. 결코 늙지 않는, 퇴락하거나 쇠퇴하지 않고 한 걸음 더 성숙해진 작가의식을 보여준 오랜 만의 신작 <별들의 들판>은 작가가 일 년 간 거주하면서 보았던 베를린 사람들의 사연들을 원천으로 하여 엮은 연작소설집이다. 여기서 베를린은 과거와 현재가 뒤얽히며 교차하는 공간, 한국과 독일이 공존하는 공간, 오히려 한국에서보다 더욱 한국의 역사와 시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온 한국인들이 살아온 공간, 그러므로 더욱 치열한 현실의 공간이자 생생한 허구의 공간으로 자리한다.

- “그리워하기에는 너무 아는 게 없었고, 멀다고 하기에는 포기할 수 없었던, 엄마라는 이름을 따라오고야 만 도시. 베를린”
그 중 마지막 중편 <별들의 들판>은 어머니의 자취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쌍둥이 동생을 찾아 베를린에 온 한 여성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수연은 췌장암에 걸린 아버지의 오랜 투병 중에 아버지의 오래된 소품 상자에서 한 장의 빛바랜 사진을 찾는다. “사랑하는 딸들, 수연이 나연이 그리고 나, 별들의 들판, 1979”이라는 메모가 뒷면에 적힌 그 사진에는 “종잡을 수 없는 불안한 생기”와 “삶에 대한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을 얼굴에 담고 있는 한 여자와 두 명의 여자 아이가 있다. 그것은 할머니에게 “모진 년”으로 불리었고, 아버지는 결코 한 마디도 설명해주지 않았던 어머니의 모습. 처음으로 자신에게 쌍둥이 동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수연은 “영문도 모른 채 그녀와 그녀의 쌍둥이인 나연이라는 여자는 지구의 이쪽과 저쪽 서양과 동양에서 자신과 똑닮은 하나의 유기체가 걸어다니고 공부하고 노래하며 춤추며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죽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라고 되뇐다.

이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수연은 7년 동안 사귄 남자 친구에게 실연을 당하고, 직장까지 그만 두게 된다. 스물 아홉의 그녀는 생의 막막함 앞에서 “그녀가 태어난 고향이면서 고향이 아닌 곳, 가끔씩 혼자서 그 이름을 발음할 때마다 탯줄을 묻어버린 벌판처럼 막막하던 그리움들, (…) 인간은 과연 혼자인가보다 하는 생각을 했고 그럴 때 어김없이 떠오르던 그 도시. 그리워하기에는 너무 아는 게 없었고, 멀다고 하기에는 포기할 수 없었던, 엄마라는 이름을 따라오고야 만 도시. 베를린”을 찾게 된다. 그리고 하나 하나 알게 된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사연들.

수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국민소득이 87달러이던 시절 한국을 떠나 머나먼 타국을 찾아간 고학력의 광부와 간호사들 중 한 사람이었다. “떠날 때 월급의 구십 퍼센트를 송금한다고 도장 찍고서야 여권을 받았던” 당시의 젊은이들은 “비행기값이 일 년치 월급” “전화 한 통이 한 달 월급의 사분의 일”이었던 시절, 타국에서의 힘든 노역, 절절한 고독과 싸우며 그 시간들을 버텨내었다. 더러 동료들이 지하 1,200미터에서 목숨을 잃고, 타국생활을 견디지 못한 몇몇이 정신이 나가거나 자살을 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은 고향의 가족들을 생각하며 일하고 또 일해야 했다. 그들의 삼 년치 월급 빚보증으로 한국에는 차관이 들어갔고, 그 차관으로 한국의 경제개발이 시작되었지만 이후 집값, 땅값이 오르고 손에 모아놓은 돈이 없었던 그들이 정작 돌아갈 자리는 없어졌다. 삼 년이 삼십 년이 되어버려도, “자신이 이곳에 도착한 연도에 모든 채널을 맞추고” 살아가는 그들에게는 그들이 떠나온 60~70년대의 한국과 변화하는 독일에서의 삶,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가는 한국이 공존하고 있었다.

- “언제나 무엇이 옳?길인가 생각하고 살면 불편해져요. 어떤 의미에선 피투성이가 되니까” “피투성이가 되는 거라면 엄마의 삶은 그런 종류의 가시밭길이었을까”
수연은 어머니의 친구들을 만나며 어머니의 사연들을 하나 둘씩 듣는다. 독일로 가는 비행기에서 유일하게 미니스커트를 입었고, 돈을 내야할까봐 비행기에서의 식사도 거절하고는 먼먼 타국에 도착해 삼킬 수도 없는 죽을 앞에 놓고 울음을 터트렸던 스무 살 무렵의 예비 간호사들 속에서 “먹자, 우리 어차피 여기서 삼 년 있다 갈 건데, 울 시간은 많잖아?”라고 말했던 어머니. “무서울 게 없는 것 같았던” 사람이었지만, “남자를 만나고 헤어지고, 이념에 연루되고, 이 베를린 교포사회에서 소외를 당하고, 독일 남자들을 전전하고…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그녀. 어머니는 동성애자인 독일 의사에 속아 “시선의 방패막이가 될 여자”로 이용당하는 동거를 하게 되었고, 그와 헤어진 이후 한국 사람들 권익을 보호하는 일에 앞장서고, 유신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교류도 하다 아버지와 결혼했다. 그러나 한국에 다니러 갔을 때, 어느 날 친구 집에 가는 기차에서 찍힌 동독 스탬프 때문에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그 석달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스물 아홉에 피골이 상접해 말을 잃은 그녀. 한국에 돌아와 살아야만 했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이혼을 하게 되었고, 어머니는 친구 부부와 함께 신혼여행을 갔던 곳, “별들이 자신의 치마폭으로 쏟아지는 꿈”을 꾸고 쌍둥이를 가지게 된 그곳, ‘별들의 들판’으로 두 딸과의 마지막 여행(“엄마가 세상에 태어나 한 여행 중에 가장 슬펐고 가장 기뻤던 여행이라고 말했었죠”라는)을 하며 사진을 찍었던 것이다. 그녀는 “어머니의 삶에 대한 연민이 가슴 깊은 곳으로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그것은 엄마라는 존재에게보다 그냥 여자가 여자에게 보내는 그런 공감, 혹은 동정 같은 것이었다.”

쌍둥이 동생 나연은 “엄만 내 친구이고, 언니이고, 그리고 사랑의 수호천사였어요. (…) 엄마 곁에서 엄마를 사랑하지 않고 견딜 사람은 없었으니까요”라고 말하고, 어머니의 절친했던 친구는 그녀의 아버지가 “만일 네게 엄마에 대해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면 (…) 그건 미워서가 아니라 매우 사랑해서였을 거야. 네 아버지 네 엄마 정말 사랑했으니까. 너무 사랑하면 너무 무서워져서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아무 기억도 하고 싶지 않은 법이니까”라고 말한다. 시련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자신을 꺾지 않고 살아낸 어머니, 자유분방하고 무구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녀는 수많은 고통을 겪어내야만 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순수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인생을 살아내었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피는 수연과 나연에게 전해져, 각기 다르지만 현재의 그녀들을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 “무구함에 머물지 않고, 무구함을 버리지 않으면서, 무구함을 넘어서, 다시 무구함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을 때”
수연이 접한 어머니의 사연은 그녀를 한층 성숙한 인간으로 이끌어가게 된다. 그녀는 독일에서 옛 연인이 결혼한다는 전화를 받고, 문득 문득 그를 떠올리지만 천천히 그를 마음속에서 내보내주게 된다. “먼저 상대방이 싫어진 사람이, 아직 상대방이 싫어지지 않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가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룰을 지킨 사람이 궁지에 몰려 벌을 받는 유일한 게임, 그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인지도 몰랐다.” “돌아볼 수는 있지만, 달려가 붙잡을 수 없는 거, 바꿀 수도 없는 거, 수선할 수도 보수할 수도 없는 거. 헤어짐이란 결국 돌이키고 싶은 갈망으로부터 돌이킬 수 없는 현실로 건너가는 일이라는 것”이라는 점들을 수연은 수긍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과거의 어머니도 현재의 수연도, “무구함에 머물지 않고, 무구함을 버리지 않으면서, 무구함을 넘어서, 다시 무구함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을 때 그들은 이미 같은 혈육이니까.” 그렇게 고통들을 겪어내고 이겨내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생이니까.

한국역사의 어느 지점에서 불현듯 자신도 알 수 없는 소용돌이로 말려들어가 삶의 굴곡을 고스란히 살아내어야 했던 어머니는, 결국 서른이 다 되기까지 어머니의 삶에 대해서 그리고 쌍둥이 동생이 지구의 다른 한쪽에 살고 있다는 사실마저 모르고 살아야 했던 수연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들은 둘 다 역사가 던져준 우연한 불행의 피해자였던 것이다. 어느 날 사랑하던 연인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처럼 삶에 있어 불행이란 그렇듯 불행을 의도하지도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은 사람에게 찾아오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상처입더라도 패배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상처입은 것들을 사랑하고 포용하게 되는 성숙에 도달한다. 수연이 “여기 와서 깨달아진 것이긴 하지만 그녀는 실은 오래 전부터, 기억 속에서 소리를 잃은 아마도 그날부터 깊이 상처입은 것들을 사랑하고 있었다. 버림받은 것들, 잃어버린 것들, 상처를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들, 용서하게 해달라고 울고 있는 것들, 울 시간은 많다면서 밥을 먹는 것들을. (…) 무서우면서도 사랑해야 했던 그 생애들을”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니 말할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소설은 삶에 대한 애정과 관조, 무수한 상처를 입었으나 삶을 벗어나지 않고, 언제나 삶을 향해 영원히 사랑을 토로하고야 마는 지점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이미 지나가버린 것이 인생이고 누구도 그것을 수선할 수 없지만 한 가지 할 수 있는 일도 있다. 그건 기억하는 것, 잊지 않는 것, 상처를 기억하든, 상처가 스쳐가기 전에 존재했던 빛나는 사랑을 기억하든, 그것을 선택하는 일이었다. 밤하늘에서 검은 어둠을 보든 빛나는 별을 보든 그것이 선택인 것처럼.”


권민정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5-06-30 16:10


권민정 자유기고가 eunsae7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