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페미니즘] 권지예의 <꽃게 무덤>


굳이 영화 속 한 장면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상 생활의 한 순간에 과거 사랑했던 사람, 혹은 깊이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의 사소한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똑같이 따라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다. 굳이 암기를 한 것도, 의도하지도 않았는데도 말이다. 프로이트는 일찍이, 사랑하던 고양이를 잃고 고양이 흉내를 내는 아이를 관찰, 치료하면서 이러한 현상을 기술한 바 있다.

그는 인간이 지극한 애정의 대상을 잃었을 때 그 상실감을 견디기 위해 그 대상의 어떤 속성을 무의식적으로 습득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고 설명했다.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상실감을 메우기 위해서는, 대상의 속성이라도 자신의 것으로 간직해야 그 대상을 잃어버린 상태를 견딜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권지예의 <꽃게 무덤>에서도 그러한 사랑의 한 속성이 깊이 있고 섬세하게 그려진다. 등단 초기부터 신인답지 않은 원숙미를 보여주었던 작가 권지예. 이 작품에서도 역시 그녀의 특장인 이미지와 이야기의 정교한 구성, 에로티시즘을 섬세하게 녹여놓은 상징물, 예민하게 삶의 본질을 포착하고 있는 문장들이 돋보인다.

텅빈그녀에게 죽음은 대나무 속의 바람처럼 가볍게, 꽃게 껍질 속의 연하고 향기로운 살처럼 찐득이면서 그녀의 생 안에 도사리고 고여 있었다”

이 작품은 과거와 현재, 꿈이 정교하게 짜여져 있으나, 이 글에서는 그 정교한 퍼즐들을 풀어 시간순으로 다시 꿰어 보도록 하자. “죽도록 사랑해서 결혼한 아내와 몇 년간 살다가 이혼”하고 “여자혐오증”을 갖게 된 ‘그’. 그는 어느 날 사진을 찍으러 석모도에 갔다가 우연히 자살하려는 ‘그녀’를 구한다.

같은 날 “자신의 치부를 드러냈던 상황에서 이해할 수 없을 만치 맹렬하고 적나라한 식욕을 드러내며” 세심하게 꽃게 살을 발라 먹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애무를 받고 있는 느낌”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까지” 갖게 된 그는 그녀를 집으로 데려와 함께 살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그녀를 점점 더 사랑하지만, “그녀의 육체를 모조리 장악하고 소유하더라도 바람 같은 한 줌 그녀의 영혼이 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느낌”으로 “끝내 마음을 주지 않는 것 같은 그녀에게 스스로 상처를 입는 건 바로 그였다.”

그렇게 그녀가 그에게 선사하는 결핍, 그녀 속에 도사리고 있는 결핍은 이미 그녀가 다른 사랑을 거쳐 갖게 된 결핍이다. 실은 그녀의 연인이 오래 전에 바다로 들어가 자살해버렸던 것(소설은 몇 가지 정황을 묘사한 짧은 문장들을 중간 중간에 배치해 그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니 “그녀에겐 오래 발효된 죽음의 냄새 같은 게 떠돌았다. 텅 빈 그녀에게 죽음은 대나무 속의 바람처럼 가볍게, 꽃게 껍질 속의 연하고 향기로운 살처럼 찐득이면서 그녀의 생 안에 도사리고 고여 있었다.”

이미 몸속에 연인의 죽음을 품어 “가슴속에 텅 빈 무덤”을 지니고 있는 그녀가 몰두하는 유일한 일은 게의 속살을 발라 먹는 것이다. 어느 날 밤 알몸으로 앉아 게를 파먹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는 에로티시즘이 녹아 있는데, 그녀에게 게를 먹는 일은 이미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옛 연인의 생생한 몸을 탐하는 일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 넓은 바다… 당신, 어디 있는 거예요. 당신의 그 생생한 몸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예요”라는 독백을 품고 꽃게살을 파먹는 그녀.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의 온 존재를 집중시키고 집약한다. 그녀의 표정은 어딘가 절실하고도 진실해 보인다.”

그러나 그녀를 사랑하는 또 다른 남자, 그는 “섹스로도 채울 수 없는 그녀의 허전함을, 그 비어 있음을 아득하게 느낄 수밖에 없어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그럴 때 그는 그녀에게서 보이지 않는 각질을 느끼게 된다. 갑각류의 껍질처럼, 속이 빈 대나무의 외피처럼 단단한 껍질로 싸여 그가 닿지 못하는 그녀의 내부엔 무엇이 있는 걸까. 그녀를 만약 사랑했었다면, 그것은 끊임없이 단단한 외피 속의 그곳에 닿고 싶다는 안타까운 호기심의 몸짓이었을까.”

어쩌면 그녀에게 지난 사랑의 상처는 딱딱한 껍질을 만들어 그 속에 여린 속살을 숨기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런 결핍은 또 다른 사랑을 생성해내고 있다. 그는 그녀의 죽은 연인이 자리하고 있을 그 빈 자리(자신은 결코 채울 수 없을)를 열망하기에, 그의 그녀에 대한 사랑은 오히려 늘 강렬하다. 그러니 사랑은 차라리 끊임없는 결핍을 욕망한다고 해야 옳다.

명백한 불가역 화학 반응인 사랑

“내게 너무 집착하지 말아요. 난 언젠가 떠나버릴지도 몰라요”라고 충고했던 그녀의 말을 지키지 못하고, 기어이는 그녀를 많이 사랑하게 된 그는, 어느 날 질투심에 불타 그녀의 뺨을 때리고 목을 조름으로써 그녀를 영영 떠나게 만들어 버린다.

“사랑이 일종의 재앙이라면 그것은 집착 때문일 것”이고, 그 집착으로 인해 그녀는 그를 떠났으나, 그는 다른 방식으로 여전히 그녀에게 집착한다. 그녀가 꽃게의 살에 집착하며 연인을 그리워했던 것처럼, 그도 그녀가 즐겨 먹었던 게장에 집착한다. 그녀가 즐겨 먹었던 게장의 냄새, 그 간장 끓이는 냄새는 끊임없이 그녀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그는 그녀를 그리워하듯이 게장을 그리워하고 있는 자신의 입맛을 느낀다.”

그리하여 그는 중얼거린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란 이렇게 체질의 변화를 가져오기도 하는(사실 그녀를 만나기 전 그는 게 알레르기가 있어 게를 먹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는 화학변화”라고. 그리고 그것은 “명백한 불가역반응”이라고. 그리하여 그는 게살을 파먹으면서 또 하나의 갑각류가 되어버린 자신의 속을 채우고(물론 그가 채우고 싶은 것은, 자신이 결코 채우지 못했던 그녀의 텅 비고 고독한 내면이리라), 그녀가 없는 허전함을 달랜다. “밥 두 공기를 배불리 먹고 나면 텅 빈 게 껍질처럼 허전함과 그리움의 공기만이 들락거렸던 몸속으로 무언가 알이 꽉 찬 듯 충만감이 생생히 전해져 오는 것이다.”

“바닷게는 연인의 몸을 먹고 또 한 사람의 연인은 바닷게의 살을 파먹고”

어느 날 꿈에서 그는 그녀가 자살하려고 했던 석모도 갯벌에 있는 그녀를 본다. 그녀는 자신이 파먹은 꽃게 껍질로 만들어진 거대한 꽃게 무덤 속에 있다가 사라져버린다. 그는 마침내 그녀를 보내주기로 결심하고, 그 바닷가를 찾는다. 그곳에서 그는 그녀의 신발과 옷가지를 하나씩 바다에 떠내려 보낸다. “그는 이제 그녀를 바다에 묻었다. 이제는 그녀를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꿈도 꾸지 않을 것 같다.

그녀는 없다. 어디에도. 그의 머릿속에도, 추억에도, 기억에도. 이제 텅 비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불가역 반응에 그의 몸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하여 그는 중얼거린다. “아아 오늘밤은 게를 먹고 싶다. 속이 허하다. 간장에 곰삭은 게를 오래도록 파먹고 싶다. 이 입맛을 이기기엔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 걸까. 바닷게는 연인의 몸을 먹고 또 한 사람의 연인은 바닷게의 살을 파먹고….

그는 갑자기 맹렬한 식욕이 돋는 걸 느낀다.” 이제 그는 또 다른 그녀가 되어, 그녀가 그랬듯 꽃게살을 탐하며 잃어버린 연인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바닷게 속에 스며든 연인의 몸, 그리고 그 바닷게를 파먹는 하나의 연인이었던 그녀. 그녀는 연인을 따라 바다로 들어가 버렸지만, 남겨진 그는 그녀가 스며든 바닷게의 살을 탐하며 “또 한 사람의 연인”이 되어 살아갈 것이다.

얼마나 영겁의 세월을 거쳐야 결코 마주치지 못할 그 사랑과 고독이 사라질 것인가. 사랑하지만 결코 완벽한 충일감을 느끼지 못하고 결핍감에 시달리는 그들은, 그렇게 꽃게를 매개로 그 지진하지만 맹렬한 사랑을 이어나간다. 작가가 소설 중간에 피들러 꽃게의 습성을 묘사(“암컷이 모습을 드러내면 수컷들은 광적으로 발을 흔들고 춤을 춤으로써 욕망을 드러내”지만, “성교 후에 자기 집의 구멍을 막아버린다”)하며 암시한 것처럼, 사랑이란 늘 그 순간에만 강렬한 불가역적인 욕망이다.

때문에 사랑하므로 “결국 그들은 고독한 존재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잃어버린 연인의 습성마저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마는 누구도 어쩔 수 없는 강력하고 지독한 것이기도 하다.

늘 결핍되고 그리하여 대체되고 전치되지만 결국 또 다른 결핍일 수밖에 없는 사랑이라는 환유. 소설이 보여주듯, 사랑의 본질은 늘 결핍되고 맴돌기만 하는 그 과정 속에서 결코 정확히 포착되지는 않는다. 더 나아가 인간의 욕망도, 그 욕망들로 이루어진 생도, 인연의 고리를 넘고 넘어 몇 번의 삶과 죽음을 겪으면서 끊임없이 전치되어 가는 영원히 잡히지 않을 기표임에 분명하다.

존재를 갈구하지만, 끊임없이 미끌어져가는 그 수많은 기표들, 늘 정확히는 들어맞지 않는 그것들이 인간을, 인간의 삶을 구성한다. 그러니 그 연결 고리들만을, 그 미끄러짐만을 긍정하며 또 그렇게 살아낼 수밖에.

연한 속살을 다 파먹힌 갑각류의 죽음이 만든 꽃게 무덤은 그런 인간의 비극을 상징한다. 사랑의 갈망을 숨긴 그 허무한 폐허에는, 사랑을 하며 자기 속의 혹은 타인 속의 결핍을 찾고 만들고 또한 채우려 하며(실은 채우기보다 늘 새로운 결핍을 만들어가며) 그러다 폐허를 만들곤 하는 인간의 숙명이 담겨 있다.

사랑은 결코 완전하고 충일하게 채워지지도 채워질 수도 없기 때문에, 그것은 끝없이 불완전한 대상들을 넘나들 수밖에 없고, 인간의 고독감 역시도 해소될 수 없다. 고독인 줄 알면서도 누군가를 끊임없이 사랑하고, 또 결국은 빈 껍질만 남은 꽃게 무덤을 만들 수밖에 없는 존재가 우리네 인간들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오늘도 무언가를 갈구하며, 또는 누군가를 갈구하며 꽃게살을 파먹고 있을 것이다. 혹은 또 다른 어떤 습관으로 나도 모르게 그를, 혹은 그녀를 기억하는 내 몸에 한 번쯤 귀를 기울일지도.

입력시간 : 2005-08-17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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