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잘 알고 있다는 착각과 결코 우리들끼리만이라는 비밀

[문학과 페미니즘] 하성란의 <기쁘다 구주 오셨네>
그를 잘 알고 있다는 착각과
결코 우리들끼리만이라는 비밀


사람들은 누구나 타인을 잘 알고 있다는 환상들을 품고 있다. 특히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 가족이나 연인, 아내나 남편에 대해 우리는 곧잘 그들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존재란 그 실체에 다가가기조차 얼마나 불가능한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자기 자신도 늘 배반하며 사는 것이 우리네 인간이 아니던가. 인간 존재에 관한 환상, 특히 타인을 잘 알고 있다는 환상을 풀어헤쳐 그 속에 숨은 가혹한 진실을 보여주는 작품, 2000년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하성란의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본다.

이 작품에서도 내면 심리를 서술하기보다는 사건과 주위의 정황, 구체적인 세부 사물들을 꼼꼼히 묘사하는 하성란 특유의 극사실주의적 문체가 여전하다. 그런 치밀하고 정확하며 세밀한 묘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잘도 흘러가는 일상 속에 숨어있는(어쩌면 우리가 늘 무시하고 경시하는) 비정하지만 진실인 무엇, 또 하나의 잡히지 않는 그것을 향하고 있다.

- “우리의 결혼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난 내가 결혼할 남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위의 두 문장으로 시작되는 소설. 여자 고등학교 수학 선생인 약혼자에 대해 화자인 ‘나’는 그가 “칼을 쥐거나 걸레를 빨아 비틀 때만 왼손잡이가 되는” 것까지 알고 있고, “발걸음 소리만으로도 대번에 그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그에 익숙하며, “그 또한 내가 쓰는 샴푸의 향을 기억하고 있을” 만큼 나를 알고 있으니, “난 그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연애가 지루해질 무렵” “음식의 맨 마지막 코스인 후식처럼” 결혼을 결정한다. 그러나 문제는 “아무러면 어떻겠는가”라는 사고방식에 있었다. “문제라면 별 문제가 없다는 것이 문제”인 관계란 실은 얼마나 큰 문제인가! 특히나 사랑하고 결혼하려는 연인의 관계에서 말이다. 별 문제가 없다는 말은 아마도, 문제가 될 만 한 점을 단 한 번도 제대로 보려 하지 않았다는 말과 동일할 터이다.

결혼을 앞 둔 어느 날 임신을 한 나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약혼자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한다. “결혼 전의 임신은 예정에 없는 일이었지만”, “우리가 결혼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기 때문에 임신에 대해 고민할 필요는 없었던” 나는, 그가 “정말 대단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했군”이라고 말해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지난 그의 생일날 밤에 아기를 가졌다는 나의 말에 대해 그는 “그앤 내 애가 아니야”라며 표정이 굳을 뿐이다. 몇 달 전 그의 좁은 자취방에서 그의 세 친구와 함께 술을 마셨던 그날, 나와 몸을 섞은 것이 그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그날 처음 만났던 그의 오래 된 친구들 중 하나가 내 뱃속 아이의 아버지여야 한다. 약혼자와 14년 만에 함께 모였다는 그들. 유머가 풍부한 외과의사, 아직 미혼인 은행 대리, 무슨 기관에 다닌다는 지독히도 과묵한 남자가 그날 함께 있었는데.

- “우린 파우스트가 아냐. 우린 결코 구원받지 못할 테니까”
그날 나는 술이 취해 잠이 들었다가 그들이 나누는 비밀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그들이 고등학교 2학년이던 시절 범했던 그들의 악행, 지금은 완전히 비밀이 되어버린 그들의 죄악에 대한 이야기였다. 당시 파우스트라는 모임의 일원이었던 그들은 한 여학생을 집단으로 강간했고, 때문에 그 여학생은 아파트에서 투신자살을 했던 것이다. 나는 겨우 “내가 그에 대해 모르는 것도 있었다. (…) 낯선 사람 같았다”고 느꼈다.

그들 중 가장 마음이 약한 은행원은 흐느끼며 “이런 비열한 놈들. 그러구두 너희가 사람이야. 아무 일 없었던 듯 두 발 뻗고 깊은 잠을 잤단 말이지? 너흰 짐승이야, 짐승”, “꼭 등을 떼밀어야 밀친 거야? (…) 그 일이 없었다면… 우리가 그 아일 그 지경으로 몰고 간 거야. 우린 살인마…”, “우린 파우스트가 아냐. 우린 결코 구원받지 못할 테니까”라고 소리치지만, “계집애처럼 질질 짜는 것 좀 봐. 끝까지 말썽이야. 함량 미달이라구”라는 말을 들을 뿐이다. 은행원은 나머지 ?사람에게 구타를 당하기도 하고, 약혼자는 내가 들어본 일 없는 낯선 목소리로 “씨발, 너 조용히 하는 게 좋아. 우린 무덤 속에 들어갈 때까지 함구해야 해. 밝은 태양빛을 받으면서 살고 싶으면 말야”라고 말했다. 그러다 함께 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거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술을 마시고 있었던 네 남자.

그리고 그날 지독히도 어두운 방 안에서 술에 취한 나는 한 남자에게 몸을 허락했다. “어두웠지만 약혼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술 냄새가 섞여 있었지만 그의 옷에서 나는 냄새는 내게 익숙했으며”, “깜깜한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내 엉덩이를 더듬었을” 때 “약혼자의 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에만 내 옆에 누워있다가 화장실을 다녀온 뒤로 방문 가까이에 누워있었다는 약혼자는 “다른 남자와 놀아난 건 너야. (…) 멍청한 계집애. 네가 임신한 사실을 말하지 않았더라면 난 아무것도 모르고 너와 결혼했겠지. 그럼 난 완전히 놀림감이 되었을 거야”라고 흥분하고, “찻집에서 나왔을 때 나와 그는 더 이상 결혼할 사이가 아니었다.”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 충고하고는 등을 돌려버린 그는, 이미 “3년 동안 내가 알아온 그 남자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크리스마스의 선물이자 축복이어야 할 아이는 저주이자 불행이 되어버린다. 아무리 취했다고는 하지만 나는 어둠 속에서 그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으며, 그런 일로 결혼에 대한 모든 약속을 순식간에 접고 말 정도로(겨우 염려하는 것이 아내가 될 여자의 임신이 아니라 자신이 놀림감이 될지 모른다는 사실이니) 그는 나를 제대로 사랑하고 있지도 않았던 것이다.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고민하는 나는 나머지 남자들을 차례로 만나보지만, 그들 역시 약혼자와 비슷한 알리바이를 대며 자신은 아니라고만 말한다. “소독약 냄새”, “치마 밑에서 발견한 동전들”, “샤워를 하면서 발견했던 가슴의 상처” 등은 각각의 세 남자일 가능성을 시사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가 없다. 이윽고 소설은 문제의 지점이 “난 한 번도 우리의 결혼이 잘못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난 내 약혼자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자부했었다”는 것임을 서서히 드러낸다. 특히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이든 간에, 그들 중 누군가(약혼자를 포함해-그가 나와 몸을 섞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더더욱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는 나에게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와 약혼자 사이에 신뢰가 없었던 것처럼, 영원한 우정을 맹세한 그들 사이에도 신뢰라고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 “네 아버지는 파우스트란다. 파우스트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지만 결국은 구원을 받게 되지. 내 아가, 난 널 사랑한다”
그날 밤을 떠올리며 아파트 옥상을 찾아간 나. 마치 15년 전에 투신자살을 한 여학생처럼 나는 난간 위에 한 발을 올려놓는다. “저 아래로 옥상에서 투신한 한 여학생의 모습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실제로 나는 그 여학생과 닮았던 모양인지, 그날 밤 그들이 나를 처음 보았을 때 “무심코 내 얼굴을 쳐다보던 한 남자의 얼굴이 두부가 엉기듯 경직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나는 투신을 하는 대신 내 아이를 하나의 생명으로 인정하기에 이른다. 옥상을 내려와 성당을 지나치던 나는 성모 마리아상을 보고 “뜻밖의 임신으로 당황했을 사람이 나 말고도 여기 또 있었다”고 중얼거리는 것이다. 성당에 들어간 내게 들리는 것은 ‘기쁘다 구주 오셨네’. 나는 지금쯤 파우스트 멤버들이 함께 모여 서로를 윽박지르며 또 한 번 영원한 우정을 맹세하리라 생각해본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던 파우스트처럼,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영혼을 팔아버렸고 진실 따위에는 눈을 돌리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그들이 죽음에 몰아넣은 여자애도, 그들 중 누가 임신을 하게 만든 나도, 영원히 그들에게는 비밀이 될 따름이다. 그들이 만든 우정이라는 껍데기 안에서 “비밀은 영원히 어둠 속에 묻힐 것”이므로.

한편 “나는 뱃속의 아이에게 소곤거렸다. 네 아버지는 파우스트란다. 파우스트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지만 결국은 구원을 받게 되지. 내 아가, 난 널 사랑한다.” 이제 아이의 아버지는 그들 중 한 명이 아니라, 악마에게 영혼을 저당 잡힌 불특정 다수로 확대된다. 그 누군가가 자신의 회오를 인정하고 구원을 받을 날이 올 지는 결코 알 수 없다. 비밀을 영원히 어둠 속에 묻고, 진실을 마주대하려 하지 않는 자에게 구원이란 불가능할 테니 말이다. 그러나 아이를 사랑한다는 나. 나는 어쩌면 모두가 파우스트일지도 모를 이 삭막한 인간 세상에서 다만 아이의 생명을 존중할 수 있을 뿐이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들으며.

하성란은 실은 무엇 하나 제대로 소통되지 않는 인간관계의 진실을 이렇듯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냈다. 그러나 소설의 이야기가 다소 작위적으로 짜여져 있으며, 성모 마리아나 파우스트의 모티브가 소설 속에 제대로 담기지 못한 점은 아쉽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악행을 저지르고도 반성할 줄 모르며 세상의 밝은 빛을 욕심내고 살아가는 인간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마저 갖고 있지 않으면서 친구니 연인이니로 서로를 묶는 사람들, 본질이나 실체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으면서도 상대를 잘 안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들. 그들 모두는 어쩌면 파우스트의 후예들이라는 점이다. 자신의 욕망(그것이 성적 욕망이든 지적 욕망이든)을 만족시키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파우스트. 욕망의 최대치를 실현하려다 결국 온갖 악행과 불행, 파멸을 겪고서야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마침내 구원을 받게 되는 파우스트처럼, 우리 인간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글쎄, 그것은 모를 일이다. 그리고 어쩌면 구원은 언제나 너무 때늦어서야 찾아올 지도. 그래서 인간은 고작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부르며 살아야 하는지도.


권민정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5-08-23 15:38


권민정 자유기고가 eunsae7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