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프리티 우먼, 가을을 수놓다

[패션] 블랙패션
블랙 프리티 우먼, 가을을 수놓다

가을겨울 패션쇼의 주된 색은 ‘블랙’이었다. 프라다, 루이비통, 이브 생 로랑, 구찌 패션쇼는 모두 ‘블랙’으로 통일했다. 가을을 맞는 패션브랜드들의 광고사진들에 등장하는 의상들도 하나 같이 ‘블랙’이다. 에메랄드빛 바다, 꽃과 과일, 햇살 가득한 태양의 나라를 선망해 마지않던 그들이 갑자기 단체 조문이라도 나선 것일까.

올 가을과 겨울을 지배하게 될 색은 ‘블랙’이다. 가을겨울이 되면 으레 어두운 색에 눈을 돌리게 되고 블랙은 이 시기의 기본 색이지만 올해만큼은 절대적이다. 발랄한 색으로 사랑스러운 여성을 대변해왔던 마크 제이콥스와 안나 몰리나리 조차 ‘블랙우먼’을 무대에 올렸다.

파리 뉴욕 밀라노 런던 등 세계 4대 컬렉션이 올가을 색으로 지정한 블랙 컬러는 이 땅에서도 효력을 발휘했다. 미니멀리즘을 대표하는 여성복 브랜드 ‘구호’. 구호를 이끄는 디자이너 정구호는 자신의 가을패션쇼에서 두 번째 스테이지를 원피스부터 바지정장에 이르기까지 온통 검정색으로 채웠다.

그것도 모자라 피날레는 검정의상뿐 아니라 검은색 장갑에 검은색 우산까지 받쳐 들고 등장시켰다. ‘블랙 매직 우먼(Black Magic Woman)’들의 행렬이었다.

품위와 존엄성의 상징

흔히 검정색 등 어두운 색이 유행할 때는 불경기의 영향이라는 말이 있다. 검은색은 어둠, 슬픔, 죽음을 대표하는 색이다. 블랙코미디, 검은 돈, 암시장 등의 단어들은 들지 않더라도 많은 부분 검은색은 부정적인 암시들을 담고 있다.

반항과 암울한 미래를 온몸으로 표현한 펑크족들은 검은 가죽재킷을 입고 검은 화장을 함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애도의 뜻으로 검은 옷을 입기 시작한 것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남편을 여의고 검은 옷을 입으면서부터였다고 한다.

그 후로 서양 여성들은 남편을 여의면 검은 옷만 입고 나머지 여생을 보내는 풍습이 생겼다.

검은색은 힘을 나타내기도 한다. 1500년대 스페인의 지도자들은 모두 검은색 옷만 입었고 유럽전역에 검은색 옷입기를 유행시키기도 했다.

성직자의 의복색으로 선택되는 검은색은 극도로 절제되고 점잖은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지배를 암시하는 검은색의 속성 때문에 권력과 권위를 상징한다. 검은 수트, 검은 드레스 등 오늘날 패션계에서도 블랙은 신분, 품위, 부유함과 존엄성을 나타낸다.

블랙은 의복에서 기본적인 색상이다.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고민될 때는 검정 옷을 고르면 그보다 좋은 선택이 없다. 샤넬은 1920년대 ‘리틀 블랙 드레스’를 발표한 이래 검은색 드레스는 여성패션의 보편적인 의상이 되었다.

똑같은 옷을 입어도 소품의 변화로 항상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이 검은색이기 때문이었다.

검은색 양복은 점잖고 고상한 남성을 만들어주고, 검은색 드레스는 여성들에게 변함없는 우아함을 선사한다. 검은색은 여체의 풍만함을 돋구어주고 빛에 따라 명암을 드리워 곡선미를 살려준다.

검은색 옷을 입으면 원래 자신의 몸매보다 날씬해 보이는 ‘수축효과’도 누릴 수 있다. 결정적으로 사소한 결함을 감춰주기도 한다.

몸매는 날씬하게, 피부색을 건강하게 돋보이게 만들어 주는 것도 ‘블랙’의 타고난 장기다. 검정은 함께 한 다른 색의 명도를 높여서 그 색들을 더 밝게 보이도록 한다. 검은 속옷을 입었을 때 더 섹시하게 보이는 것은 흰 피부와 극대비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은색의 잠재의식 속에는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신비스러움과 두려움, 금지의 이미지도 풍긴다. 검은 의상은 인상을 가려 엄격한 느낌이 들지만 검은 옷을 입은 여성은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 감추어진 무언가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검은색은 에로틱한 매력을 더한다. 검은색 레이스 스타킹이나 슬립드레스 같은 속옷가지가 섹시?여성의 속옷으로 분류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화려하고 세련된 이미지로 변신

한동안 패션가에서 검은색은 금기된 색이었다. 스포츠룩의 생동감 넘치는 원색과 장식성이 강한 로맨틱, 에스닉 패션 바람이 절정기를 구가한 최근 2~3년간 패션가는 꽃밭이었고 정글이었다. 팔리는 옷은 디자인이 좋아?茶羞릿?‘색’을 잘 선택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그렇다고 블랙의 재등장에 이제 패션은 재미없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말자. 이번 계절 블랙은 무겁고 진지하고 경직된 블랙이 아니다.

답답하고 지루한 이미지에서 탈피해 화려하고 세련된 모습이다. 검은색이라고 다 같은 색이 아니니까. 똑같은 블랙이라도 소재와 질감, 디자인, 색의 농도에 따라 차이가 난다. 90년대식의 건조하고 단조로운 ‘젠’스타일이 아닌 새로운 블랙의 매력을 들여다보자.

블랙은 가장 단순한 색이면서 소재와 빛에 따라 다양한 변화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색이다. 이번 계절 역시 많은 디자이너들의 사랑을 받은 블랙은 특정한 스타일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얼굴로 ‘조명발’을 받았다.

맨스타, 앤듀,티비제이(왼쪽부터)

똑같은 블랙이라도 광택이나 요철감에 따라 블랙의 깊이가 달라지기 때문에 그 어떤 컬러보다 다채롭다. 시폰이나 레이스 같은 가벼운 소재와 매끄러운 표면감이 돋보이는 새틴,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는 벨벳, 모피소재까지 다양하다.

여기에 크리스털, 리본 장식을 더한 빅토리안 스타일로 꾸민 ‘로맨틱 블랙’. 속이 비치는 소재들과 광택소재가 화려함을 강조하며 가벼운 소재들 간의 겹침으로 외관은 더욱 풍성해졌다.

고급품을 ‘블랙라벨’로 구분한 것처럼 이번 계절 검정은 보다 고급스럽고 세련된 느낌으로 전개 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블랙은 다른 색과의 조화로운 사용보다는 전체가 검은 ‘올-블랙(all-black)’이 강한 카리스마를 뿜는다. ‘올-블랙’을 추구한 디자이너들은 제한적인 색을 다양한 소재를 사용하고 섞어 씀으로 극복했다.

레이스와 투명한 시폰 소재로 여성스럽게 표현하거나(안나 몰리나리) 털 소재로 고급스러움과 풍성함을 주고(루이비통), 벨벳처럼 보이는 특수모 원단으로 표면의 요철감(프라다)을 줬다. 블랙&화이트의 조화(이브 생 로랑, 샤넬)도 빅토리안 시대의 고급스러운 품격을 재현하는 훌륭한 매칭이었다.

블랙은 회색과 어울리면 더욱 현대적이며 세련되게, 어두운 갈색과는 풍부한 가을의 깊이감을 연출할 수 있다. 신선한 녹색과는 생동감 넘치는 이미지로, 꽃분홍과는 발랄함까지 꾸밀 수 있다. 모두 검은색이 갖는 배경 덕분에 색의 깊이가 더해진다. 블랙은 빛에 따라 회색, 푸른색, 갈색, 자주색 등으로 보이기도 해 풍부한 색의 느낌을 낼 수 있다.

볼륨·외관으로 풍성한 여성성 강조

전통적이며 우아함 여성을 나타내는 블랙의 어둡고 무거운 느낌을 덜기 위해서는 자수와 수공예의 장식, 풍성한 볼륨에 주목해야 한다.

속이 비치는 시스루 소재들과 목둘레와 스커트 아랫단, 마감부분에 장식되는 레이스, 스커트와 재킷, 코트에 넓게 수놓인 자수 장식, 커다란 리본과 부드러운 털 장식이 부드러운 여성을 표현한다.

종 모양으로 풍성하게 부풀린 소매와 꽃봉오리처럼 부풀인 스커트, 벨트로 허리를 묶어 X자 형태가 나오게 만든 재킷과 코트, 원피스처럼 이번 블랙은 볼륨과 외관을 통해 더욱 풍성해진 여성성을 강조한다.

남성복에서도 검은 돌풍이 예고된다. 한동안 남성복을 풍미한 밝은 회색, 은회색 등의 인기가 시들해지고 ‘블랙’이 가을맞이에 나섰기 때문이다. ‘로가디스’, ‘갤럭시’, ‘마에스트로’, ‘아르페지오’ 등 남성복 브랜드들은 올 가을 신상품에서 유행색인 ‘블랙’ 컬러 제품의 비중을 크게 늘렸다.

구호

‘메트로 섹슈얼(패션과 외모에 관심을 가지는 남성)’ 열풍으로 최근 몇 년간 유행을 이끌던 선명하고 밝은 색상이 올 가을에는 셔츠와 타이 등의 ‘포인트 컬러’로 한 걸음 물러나고 대신 고급스러운 검정색이 전면에 나선다.

날씬한 외관을 추구하는 섹시코드의 부상에 따라 젊은층을 중심으로 블랙이 새롭게 부각되어 중요한 색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

블랙은 분홍, 보라 등의 악센트 컬러와 더불어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연출하는데 중요한 색상으로 손꼽히고 있다. 특히 블랙 수트를 화이트셔츠와 코디하는 ‘Black Code’를 강조한다. 대신 셔츠나 타이 등 소품은 더 화려해져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올 블랙 스타일’의 포인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검은색은 모든 색을 받아들이는 색’이라고 예찬했던 코코 샤넬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더라도 블랙 의상을 구입하는 것은 언제나 훌륭한 투자다. 블랙 수트, 블랙 미니 드레스는 지금 사도 먼 미래까지 입을 수 있는 기본중의 기본 의상이니까.


박세은 패션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5-08-29 17:36


박세은 패션칼럼니스트 suzanpark@dreamw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