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정장수트에 어깨 강조한 재킷, 남성예복풍 매니시 스타일 인기

하루 세 번 갈아입어야 했던 서양 의복, 특히 전통 옷차림은 상류층 남성의 자존심이었다. 오늘날 예복이라 하면 흔히 특별한 날에 특별한 의식을 위해 입는 옷으로 생각하지만, 과거에는 옷을 입는다는 것 자체가 예의였다. 올 가을, 자존심 높은 남성 예복이 유행의 중심에 섰다. 그 예복을 여성들이 입는다면….

남성의 예복은 턱시도(Tuxedo)다. 최고의 예식인 결혼식 복장으로 턱시도를 선택한다. 낮에 입는 남성 예복이 모닝코트라면, 검은색 타이를 매 ‘블랙타이(Black Tie)’로 불리는 턱시도는 저녁 모임 예복이다.

올 가을 검은 정장 수트가 새롭게 등장하고, 날카롭게 솟은 픽트라펠 재킷이 유행하는 것은 모두 예의를 갖춘 차림과 예절을 중시한 과거에 대한 향수 때문. 나폴레옹 시대를 재현한 ‘돌체 앤 가바나’ 쇼, 영국 왕실과 귀족들이 즐기는 여우사냥을 주제로 한 ‘디스퀘어드2’, 스코틀랜드 킬트를 입은 청년들을 무대 배경으로 내세운 ‘모스키노’ 쇼 등에서 패션계는 귀족과 상류층의 정제된 멋의 추구를 드러냈다.

로맨틱 열풍 가지고 새 흐름

이처럼 남성 예복이 최근 여성복에도 중요한 코드로 활용되고 있다. 몇 년간 계속되던 로맨틱 열풍이 지난해 가을부터 조금씩 수그러들면서 블랙이 주요색으로 등장했고, 뒤따라 미니멀리즘이 가세했다. 특히 올 가을/겨울 여성복으로 차분하고 절제된 남성복을 응용한 ‘매니시(Mannish) 스타일’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재킷의 어깨 부분이 강조되고, 남성복에서 영향을 받은 정교한 손맛이 느껴진다. 한동안 낭만주의에 빠져 풍성한 볼륨과 스커트, 원피스 정장을 즐겨 입었던 여성들이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수트에 눈을 돌렸다. 잘록한 허리선, 러플 블라우스 등은 여성적인 느낌을 주지만 마치 아빠 정장을 빌려 입은 듯 어깨를 강조한 재킷은 매니시 룩을 대표하는 스타일이다.

그중 특별히 클래식 수트, 턱시도를 빌려온 듯한 수트, 남자 바지처럼 허리 부분에 턱을 잡은 와이드 팬츠가 눈에 띈다. 남성복의 블랙&화이트에 걸맞는 검은색 정장에 흰색 블라우스를 맞춰 입는 것도 매니시 룩의 영향이다.

지난해에도 턱시도의 모양을 본뜬 모직재킷과 남성 예복의 조끼를 활용한 베스트로 믹스 앤 매치 등 남성 예복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온 몇몇 아이템이 유행하긴 했다. 하지만 올 가을엔 본격적으로 턱시도를 입은 ‘가슴 달린 남자’들을 만날 수 있을 듯하다.

전후 패션, 80년대 대중 코드로

여성복에서 남성복의 성향이 나타난 것은 전쟁의 영향이었다.

전쟁터에 나간 남성들을 대신해 직업 전선에 뛰어든 여성들은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벗고 작업복을 입어야 했다. 1915년 디자이너들은 군복에 영향 받아 주머니를 단 재킷 형태의 여성 겉옷을 내놨다. 전후의 패션을 대표하는 경향 중 하나인 ‘가르손(소년)’ 룩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중성을 표현했다.

이후 여성들은 텍타이를 매고 스모킹수트를 입고 신사용 코트를 입었다. 딱딱한 펠트모자도 곁들였다. 당시 할리우드 스타일이 패션을 선도했다. 1933년 마들렌 디트리히는 어깨에 패드를 댄 바지 수트를 입었고, 그레타 가르보는 더블브레스티드 테일러드 수트에 챙이 있는 모자를 애용했다.

66년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은 턱시도를 수트화한 ‘스모킹수트’를 발표해 여성들 사이에 바지수트를 대중화시켰다. 미국에서는 중간색의 미묘한 조화와 절제된 라인으로 현대적인 미니멀리즘 라인을 선보인 캘빈클라인이 명성을 쌓아갔다.

80년대에는 훨씬 많은 여성들이 사회에 진출했고 이런 분위기는 ‘파워수트’의 외관으로 표현됐다. 특히 여성복에 나타난 클래식하며 깔끔한 수트는 야망에 넘치는 여성 중역의 능력과 자신감을 표현했다. 잘록한 허리선과 스커트 정장은 여성스러웠지만, 패드를 넣어 어깨선이 강조된 재킷만큼은 남성들과의 경쟁에서도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나타냈다.

부드럽고 유연 여성미 간직

예전엔 남성적 옷을 입으면 페미니스트나 괄괄한 여성으로 보았다. 그러나 요즘 여성복에서 발견되는 ‘매니시’한 기운은 훨씬 부드럽고 유연하다.

가장 주목받는 매니시 룩은 테일러드 재킷과 슬림한 팬츠로 이루어진 스트라이프 수트에 셔츠를 입는 것이다. 이 팬츠 수트 안에 화이트 셔츠를 매치시키는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또한 컬러풀한 시폰 블라우스를 매치시켜 매니시한 스타일과 페미닌 스타일의 믹스 앤 매치를 시도하기도 한다.

보다 응용력을 높인 코디법으로는 여성적인 장식의 러플 블라우스를 남성적인 느낌의 클래식 군복 스타일의 재킷과 정장바지에 어울려 입는다든지, 여성스러운 원피스에 턱시도 재킷을 매치하는 식의 옷입기가 추천된다.

결국 매니시 룩을 대표하는 팬츠 수트 착장은 남성적이지만 프릴 블라우스, 원피스, 니트 톱과 함께 코디하면 지극히 여성미가 부각되는 스타일로 변신할 수 있다.

68년 이브 생 로랑이 그랬듯, 러플 장식이 화려한 화이트 드레스 셔츠에 턱시도 재킷을 걸치고 경쾌한 버뮤다 쇼츠를 매치시키거나, 올 시즌 ‘디스퀘어드2’가 보여준 남성 셔츠 위에 부드러운 니트 조끼나 V넥 스웨터를 입고 벨트를 매서 날씬한 허리를 강조하는 식으로 꾸밀 수도 있다. 또 나폴레옹 스타일의 군복 재킷에 시스루 블라우스, 펜슬스커트나 와이드 팬츠를 함께 입어 섹시한 매력에 도전해보는 것도 좋겠다.

남성 정장용 구두와 같이 발등을 끈으로 묶는 ‘레이스업 슈즈’도 유행이다. 물론 남성화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단화부터 8cm가 넘는 하이힐에도 활용됐다.

턱시도나 클래식 군복을 여성복에서 차용한다는 것 자체가 우먼파워를 나타낸다. 그렇다고 자신의 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남성처럼 되고 싶어 하거나 동경하지도 않는다.

여성미를 잃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성의 차별화된 장점을 수용하고 새롭게 해석한다는 의미이기에 이전과는 다른 여성성을 표현한다. 이면엔 패션계의 상업성과 변덕스러운 여성소비자의 까다로운 요구가 포함되어 있지만.


박세은 패션칼럼니스트 suzanpark@dreamw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