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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기행 31] 潘南朴氏 嘯皐 朴承任(반남 박씨 소고 박승임)
콘크리트 집으로 재건된 古宅 조상 저술 국역에 문중 힘 모아

15대 종손 박찬우(朴贊佑) 씨, 호남형의 사업가… 선대의 유물·유품은 박물관에 위탁 보관

불천위 사당






潘南朴氏 嘯皐 朴承任(반남 박씨 소고 박승임)

15대 종손 박찬우(朴贊佑)

반남 박씨(潘南朴氏)의 관향지는 잘 알려진 곳이 아니다. 전남 나주군 반남면이 이들의 관향지다. 이 작은 고을은 사적으로 지정된 고분군으로 유명하다. 반남면 신촌리 고분에서 출토된 백제 금동관은 국보 제295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금동관을 통해 백제의 찬란했던 문화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나주 반남고분 국화축제’도 열리고 있다.

반남 박씨 출신 정승이 7명이니 박은, 박숭질, 박세채, 박종악, 박종훈, 박회수, 박규수가 그들이다. 청백리에 든 이가 17명. 그중에 세상에 잘 알려진 이는 현석 박세채다. 현석은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리고 숙종조의 서계 박세당과 그의 아들 정재 박태보 부자가 함께 청백리에 들었다. 헌종조의 정승 박규수도 있다. 역사에 널리 알려진 인물로는 이 외에도 양반전의 저자 연암 박지원이 있다.

반남 박씨 세거지의 하나가 경북 북부지역이다. 그 중심은 안동과 영주다. 이곳에는 대략 2만여 명의 반남 박씨들이 거주하며 조선 중기 이후로 세상에 이름난 이들을 많이 배출했다. 대표적 동족부락은 안동의 가구, 감호와 영주의 귀내, 무섬이다.

안동의 반남 박씨는 태종 때 대제학과 좌의정을 지낸 조은 박은의 증손인 은곡 박숙(1444-1526)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 침은 영주 무섬에, 둘째아들 진은 안동(후손들이 운곡, 감호, 미질 등에 거주)에, 셋째아들 형은 영주 귀내에 각기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이곳을 거점으로 문과 14장, 진사 30여 장의 성취를 일궜다. 이들 후예들의 성취는 영주에서 박숙의 증손 대에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면서 무게중심이 영주로 옮겨졌다. 소고의 아우인 동원공(桐原公) 박승륜(朴承倫)에게 퇴계 선생은 ‘청백전가(淸白傳家)’라는 네 글자를 써 준 일이 있다. 이는 소고 댁이 퇴계 선생이 인정한 청백 정신을 이어온 가문이라는 의미다.

퇴계가써준 ‘淸白傳家’

종손 박찬우씨
‘영유소고 풍유금계(榮有嘯皐 豊有錦溪)’라는 문자가 있다. 퇴계의 편지에서 유래한 이 문자는 문하의 이름난 제자이면서 영주와 풍기 고을을 대표한 인물로 금계 황준량과 소고 박승임을 일컫는 말이다. 두 사람은 동갑으로 금계가 4개월 선배다. 생원시는 금계가 21세로 앞선다. 그에 비해 소고는 24세에 생원 진사시에 모두 합격한다. 양과 합격은 당시에도 쉽지 않는 일이었다. 문과에는 같은 해 동방으로 합격했는데 금계가 을과, 소고는 병과에 들었다.

이때 셋째형 인암공 박승간이 함께 급제하는 영예가 있었다. 두 사람의 환로는 을사사화와 친상 등으로 인해 단절이 있었고, 또 벼슬에 급급해 하지 않는 성품도 작용해 현달하지는 못했다. 내직보다 외직을 택한 적이 많았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내·외직을 거치던 두 사람의 벼슬길은 47세 때 성주목사직을 그만둔 금계가 3월 11일 고향으로 돌아오던 도중 예천 땅에서 유명을 달리하면서 비교가 끝난다. 소고는 이후 병조참지와 진주목사, 동지부사, 승정원 도승지, 병조참의, 경주부윤, 전라도관찰사, 강화부사, 여주목사, 춘천부사, 대사간, 창원부사 등을 지냈다.

소고 선생 종택은 필자가 어릴 때부터 익히 알았으면서도 방문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런 사이 고택은 콘크리트 집으로 재건되었고, 종손은 고인이 되었다. 현재 종택에는 15대 종손 박찬우(朴贊佑, 1955년생) 씨가 모친 경주 이씨를 모시고 살고 있다. 14대 종손이었던 박관서(1927년생) 씨는 2년 전 세상을 버렸다.

박관서 씨는 종손으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초등학교 교사로 평생을 교단에 바쳤다. 소고 선생의 묘소는 이산면 내림리에 있다. 이곳은 유택이 있는 곳이면서 선대 조상들이 살던 유서 깊은 장소다. 이곳에 종손의 조부(朴承烈)가 살았고 이산초등학교에 발령을 받은 부친 역시 그러했다. 부친이 영주초등학교로 전근 오면서 63년에 영주시 고현동 226번지인 현 종택으로 이사 왔다.

종택에서 처음 만난 종손은 국역된 성리유선(性理類選)과 소고박승임선생실기를 건네주었다. 성리유선은 퇴계 선생의 이름난 제자일 뿐만 아니라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던 당시의 대표학자로 알려진 소고의 진면목을 일반에 전할 수 있는 자료다. 그간 난해한 한자로 인해 가려졌던 선생의 삶이 국역을 통해 드러난 셈이다. 여기에는 막대한 재원과 열정, 세월, 문중인의 단결이 모두 필요했다. 그 중심에 종손과 문중 원로들이 있다.

성리유선이란 도대체 어떤 책일까. 성리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리대전(性理大全)이라는 책을 읽어야 한다. 그러나 그 책은 70권 227편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이다. 그래서 가난한 선비들은 책조차 구경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소고는 그 책을 3분의 2로 대폭 축소하여 6권 10책으로 간결하게 정리했다.

이는 자신의 필요 때문에 만들어졌지만 후학들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이 책은 명나라 성조(成祖, 영락대제)가 호광 등 대표학자 42명에게 송·원대의 성리학을 집대성하게 해 만든 책이다. 오경대전(五經大全), 사서대전(四書大全) 등과 함께 영락삼대전(永樂三大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초고 형태로 남아 300여 년 이상을 유전해오다 1910년에 이르러 13대 후손인 박승진(朴勝振) 등의 주도로 뒤늦게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이 책은 다시 100여 년을 지나 지난 2005년 3월 국역 발간되었다.

퇴계 선생이 정리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라는 책이 10책으로 간행된 바 있는데, 1561년 이래 우리나라에서 8차례, 일본에서 4차례 나왔다. 소고 선생의 역작이 진작 빛을 보지 못하고 상자더미 속에 갇혀 지낸 세월이 아쉽기만 하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다.

‘性理類選’등 한글화 마쳐

성리유선은 국역본조차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반면 실기는 연보와 일기, 실록 자료 국역 등으로 구성돼 있어 소고의 삶을 요령 있게 살필 수 있게 해준다. 원접사 일기는 30세 때인 명종 원년(1546)에 원접사 홍섬(洪暹)의 종사관으로 의주에 가 중국 사신을 접대한 일련의 기록이다. 이어진 소고일기는 인종 원년(1545, 29세) 7월 7일부터 명종21년(1566, 60세)까지의 약 20년간의 기록이다. 작은 글씨로 적은 평은 사관(史官)의 엄정한 필법이 들어 있어 퇴계 문하의 대표적 학자였던 소고의 곧은 면모를 읽을 수 있다.

호남형의 종손은 영주중학, 영주종고를 졸업한 뒤 서울에 있는 대광전기기술학교에서 수학했다. 종손은 원래 교육자였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영주종고를 졸업한 뒤 성균관대학교 철학과에 진학했으나 1학기를 마친 뒤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강제 징집으로 입대했고, 부친의 뒤를 이어 교사가 되려는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전기 기술을 배운 뒤 대구의 전력회사에서 13년간 일한 뒤 독립해 현재는 전기공사업을 주로 하는 신화산업주식회사 대표이사로 있다. 경주 최씨와 결혼해 슬하에 박성일(1981년생, 삼성SEC 근무), 박건일(1982년생, 동양대학교 실내디자인과 재학 중) 형제를 두었다.

문중에는 종가의 일을 잘 돌보아 주는 이들이 필요하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보면 봉사자의 역할이다. 종손은 문중의 원로로서 박돈서, 박찬서 씨와 박찬극 현 영주문화원장을, 그리고 자신을 가장 잘 이끌어주는 이로 문중 총무를 들었다.

종손의 선친은 현 종손에게 유림 사회를 알려주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선친이 살아 계실 때 안동의 퇴계 종택에 가자고 해서 동행한 적이 있는데, 그때 마침 퇴계 선생 탄신 500주년이 되는 해였어요. 어른들에게 인사를 하라고 해서 절을 한 기억이 있습니다.” 영남에서는 종손 교육을 이런 형태로 했다.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을 대동하고 유림 행사가 있을 때 참여해 예절과 안목을 길러주며, 대방가로 두루 다니며 집안 내력을 알게 하는 현장 교육을 중시했다.

“부친께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셔서 문중 총무님이나 어른들께 모르는 부분은 묻고 또 책을 보며 배우고 있습니다.” 종손의 고민과 다짐이 읽혀지는 대목이다.

“집에 내려오던 유물과 유품들은 소수서원 박물관에 위탁을 했고요, 관복 띠는 훼손이 심해서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떨어진 것을 수리해야 하는데, 알아보고 있습니다.” 소고 선생의 유물과 유품은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1569년 동지부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 목종 황제로부터 받은 중형과, 소형 매죽(梅竹) 벼루 두 점은 지방문화재를 능가하는 조형적, 사료적 가치가 있어 보인다. 교지와 친필 간찰, 소고선생 문집 목판, 성리유선 목판도 소중한 사료다.

박승임 1517년(중종12)-1586년(선조19)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중보(重甫), 호는 소고(嘯皐)
퇴계와 함께 사가독서26인에 뽑혀… 문장과 덕업 '당대 으뜸' 평가

20세에 선기옥형을 만든 학자, 덕업과 문장이 당대 으뜸, 퇴계와 함께 사가독서에 뽑혀

소고 선생은 대제학 모재 김안국과 양곡 소세양, 수재 성세창의 추천으로 뽑혀 28세 때 사가독서를 하는 영예를 안았다. 함께 독서당에 든 이는 퇴계 이황을 비롯해 인재 홍섬, 임당 정유길, 미암 유희춘, 하서 김인후, 소재 노수신 등 26인이었다. 기라성 같은 이들의 면면을 보면 소고의 당시 명망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소고 친필편
퇴계와 하서는 설명이 필요없거니와, 인재 홍섬은 정암 조광조의 제자로 영의정을 세 차례나 역임한 이다. 두 살 연장인 임당 정유길은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좌의정을 지냈고, 소고와는 퇴계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다. 경북 상주 출신인 소재 역시 문과에 장원 급제해 영의정에 이르렀다. 미암은 망설임 없이 소고를 당대 대표 문장가로 손꼽은 지기(知己)다. 소고는 퇴계 학단의 맏형이면서 자신의 문하에 제자를 두었다. 대표적 제자로 백암 김륵, 만취당 김개국, 물암 김륭, 용담 임흘, 구전 김중청 등 일가를 이룬 이들이 있다. 만약 퇴계 선생이 안동에서 나지 않았다면 수많은 안동 학자들이 소고 문하로 모여들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선생은 현인(賢人)을 존모하는 삶을 살았다. 그 출발과 정점에는 은사인 퇴계 선생이 있었다. 소고의 일생은 '퇴계 선생 배우기'였고 선비정신이 그 귀결처였다. ‘가난은 선비로서 항상 있는 일로 개의할 것이 없다’는 생각, 권간들에게 조금도 굴하지 않는 삶을 산 점, 평생 주역에 심취한 점 등에서 그러했다. 공교롭게도 소고의 일생 역시 퇴계 선생과 같은 70세였다.

소고의 일기를 보면, 1566년(50세, 우부승지)에 “길 가던 사람들조차 모두 ‘의당 이황이 재상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고 사림도 또한 그래야 한다고 여겼다”라고 적고 있다. 당시 이준경이 영의정, 이명이 좌의정, 권철이 우의정이었다. 소고는 현인인 퇴계가 정승의 반열에 서서 수십 년 동안 뿌리 깊었던 간흉들을 씻어내고 현인을 등용해 조정을 일신해야 한다고 염원했다. 소고는 21세부터 퇴계에게 주역과 성리학을 배웠고 퇴계는 제자이기보다는 함께 공부하는 사람으로 예로써 대했다. 그는 평생 어진 이가 있다면 적극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그 대상에 농암 이현보, 회재 이언적, 충재 권벌 등이 있었다. 또한 선현들을 배향하거나 기념하는 일에도 앞장 섰다.

황해도 관찰사로 재직 중에는 해동공자로 숭앙된 최충(984-1068)을 모신 서원을 옮겼고, 조광조에 대한 신원(伸寃)을 적극 추진했으며 42세 때 풍기군수로 부임해서는 훼손된 회헌 안향 선생의 영정을 다시 그리게 했다. 57세 때는 경북 영주의 이산서원(伊山書院, 훼철된 이후 강당만 중건)에 퇴계 선생의 위패를 봉안했고, 58세 때는 도산에 가서 퇴계 선생 사당 건립에 관한 논의를 했다. 그해 2월에 경주부윤으로 가서는 회재 선생을 배향한 옥산서원(玉山書院)을 중수했다. 63세에는 경기도 여주에 기천서원(沂川書院,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을 창건하고 모재 김안국을 배향했다. 뒤에 이곳에 회재 이언적, 수몽 정엽, 치재 홍인우, 오리 이원익, 택당 이식, 감사 홍명구 등 현인들을 추향했고 인조 3년에는 사액까지 되었다.

왕조실록에 ‘華國之手’표현

소고는 당대를 대표하는 문장가였다. 선조7년(1574, 58) 경주부윤으로 임명되었을 때 미암 유희춘이 “애석하다. 국가를 빛낼 솜씨를 가진 사람이 주부(州府)의 소임을 맡았다”라 한 것이 왕조실록에 있다. ‘화국지수(華國之手)’는 ‘국가를 빛낼 솜씨’를 뜻하는 표현. 소고는 이미 53세(선조 2년)에 동지부사로 중국 연경에 갔을 때 이러한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한 바 있다. 당시 조선 국왕의 하례 표문(表文)을 받들고 중국에 사신으로 가면 황제의 궐문으로 들어서지도 못하고 문 밖에서 예를 행하는 굴욕을 당했다. 이는 중국측 해당 관청 하급관료의 농간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누구도 이를 바로잡지 못했다.

소고는 즉시 이를 예부상서(禮部尙書)에게 품의하여 그 정당한 진하(陳賀) 반열(班列)의 위치를 되찾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이때 그의 빛나는 문장과 논리가 주효했다. 소퇴계(小退溪)로 추앙받았던 대산 이상정은 소고 선생 문집 속집 서문에서 선조 때를 대표하는 덕행과 문장가로 소재 노수신, 고봉 기대승, 백담 구봉령과 함께 소고를 들고 있다. 영남에서는 미암의 평보다는 대산의 평이 더 인정되고 중앙에서는 그 반대다. 그렇다면 중앙과 영남에서 모두 소고의 문장가로서의 위상은 검증된 셈이다.

소고는 을사사화의 화망(火網)을 아슬아슬하게 벗어났다. 그는 충재 권벌 선생의 당류로 낙인찍혀 있었다. 이언적과 권벌이 각각 유배지로 떠날 때 전별시를 지었다. “물여우가 쏘고 파리는 날아다녀/ 하루아침에 화의 그물이 위태롭네/ 태연하게 유배의 길 떠나시니/ 세상의 대장부라 하겠네.” 이날 두 선생이 북도의 유배지로 떠나면서 죄인의 신분으로 서로 만났다. 이때 충재 권벌이 “이 이상과 권 이상이 어찌 이리도 혁혁한가?”라고 자조한 장면이 있다. 충재는 회재에 비해 강개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태연히 두 찬성(贊成) 벼슬로 오늘날의 계엄사령관격인 원상(院相) 직에 있던 이가 하루아침에 윤원형, 이기, 진복창 일파에게 죄인으로 몰려 유배 길에 올라 만난 것이다.

시대를 풍자한 이 발언은 대범한 충재를 설명하는 자료로 인구에 회자되었다. 이러한 정황에서 두 사람을 존모했던 소고 역시 당당히 저들을 물여우와 파리떼로 풍자해 그 억울한 심경을 드러냈던 것이다. 소고는 당시 사헌부 지평 직에 있어 도리어 양심적인 관료들을 구속시키는 일을 맡아야 했다. 소고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사직서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진복창은 이기를 사주하여 그에게 중한 죄를 가하려 했다. 이때 권력 실세인 이기의 조카 이원록이 “박 아무개는 덕업과 문장으로 세상의 존중을 받고 있다”는 논리로 구명운동을 펴 파직되는 데 그쳤다. 이 소식을 접한 충재는 “박 아무개의 근신함으로도 면할 수 없었단 말인가?”라 했다고 한다.

소고는42세 때 풍기군수로 보임하여 회언 안향의 영정을 봉심한 뒤 그 훼손 정도가 심함을 보고 다시 그리는 일을 추진했고 이듬해에 조선 최고의 화원인 이불해(李不害)를 초빙해 그 일을 완성했다. 이러한 사실은 직접 지은 회헌선생화상개수지(晦軒先生畵像改修識 문집 권3)라는 글로 남아 있다.

현재 안향(1243-1306)의 영정은 두 본으로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어 소수서원에 소장되어 있는 것과 영주시 안정면 용상리에 있는 순흥 안씨의 종손가에 있는 후사본(後寫本) 영정이 있다. 문화재관리국에서 소개한 안향 영정 내용을 보면, 선생 사후 12년인 고려 충숙왕 5년(1318)에 공자의 사당에 그의 초상화를 모실 때 1본을 더 옮겨 그려 향교에 모셨다가 조선 중기 백운동 서원이 건립되면서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나아가 선생의 초상화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고려시대 초상화 화풍을 알 수 있다. 고려 시대 초상화로 익재 이제현(1287-1367)의 영정(국보 제110호)은 1319년 원나라 화가가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향 영정보다 1년 뒤의 작품이다. 여기서 국보 제111호의 제작 연도에 의문점이 있다.

주서(注書) 직에 있던 안향의 종손 안정(安挺)의 편지에 보면 1543년(계묘년, 중종38, 백운동서원 건립 이듬해) 2월 종손 자신이 서울에서 봉안하고 있던 영정을 받들고 단양에 도착해 당시 풍기군수로 있던 주세붕에게 연락을 했더니 공무로 멀리 출타 중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안정 자신은 이는 성주가 너무 성의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불만을 제기한다. 이때가 2월 그믐. 이 영정은 그 뒤 8월 11일에 비로소 봉안되었는데 주세붕은 결례를 의식해서인지 비교적 자세하게 의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음을 편지로 종손에게 알렸다.

이 영정은 당초 순흥향교에 봉안되어 있었다. 그런 영정이 서울 종손가로 이안(移安)하게 된 것은 1457년(정축년, 세조3)에 금성대군이 순흥에서 일으킨 정변으로 부가 혁파되었기 때문이다. 안향 선생 사후 237년이요, 서울로 간 지 87년 만에 고향 땅으로 돌아온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이다. 명종13년(1558, 42세) 소고는 풍기군수에 제수되어 훼손 정도가 심한 영정 개수를 좌의정 안현(安玹, 1501-1560)에게 알리고 예조판서 홍섬의 지지를 받아 이듬해(1559년) 10월에 그 일을 완결지었다. 안현은 이보다 앞선 명종6년에 대사헌으로서 소고에 대해 권벌과 교분이 두터워 물의를 일으켰으니 파직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장본인이었다. 새로 영정을 그린 주인공은 당대 최고의 화가인 이불해(李不害)였고, 묘우에 영정이 봉안 된 16년 뒤의 일이었다. 주세붕이 처음으로 문성공 사당에 영정을 봉안할 당시로부터 이미 225년이 경과한 시점이며, 소고가 풍기군수 자격으로 묘우에 들어가 영정을 보았을 때는 241년이 넘은 때였다.

소고는 이를 “사당에 유상을 걸어 두었는데 우러러 경의를 표했다. 다만 그 그림 족자는 세월이 오래되어 뜯어지고 헐어 아주 없어질 지경이었다”라고 설명했다. 이는 자신만의 판단이 아니라 전임 군수인 장문보(張文輔) 역시 문제라고 느껴 다시 그리는 일을 추진했다고 밝혔다. 이 일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이는 좌의정 안현과 그의 아우로 영주군수 직에 있던 안상, 찬성 심통원(沈通源)이었다. 이때 당초 그렸던 1본은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그렸고, 원본과 처음 그린 본은 함께 궤에 넣어 사당 안에 보관했다. 소고 당시에 영정은 모두 3본으로 1본은 고려 시대 작품, 1본은 처음 그려 잘못된 작품, 1본은 새로 그려 묘우에 정식으로 게시한 작품으로 정리할 수 있다.

미수 허목의 문집인 미수기언에 보면 안문성공 유상을 다시 그린 기문이 들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안씨의 후손으로 당시 오위장 직에 있는 안응창(安應昌)이 많은 재물을 들여 화공을 청해 다시 2본을 모사하고 나서 자신에게 기문을 청해 그 사실을 기록한다고 적고 있다. 따라서 당시에 전해지던 3본 이외에 이때에 이르러 다시 2본이 그려져 모두 5본의 영정이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현재 서원과 안씨 종손가에 각각 소장되어 있는 2본만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헌 자료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필요한 때다. 국보로 지정된 영정에 대한 제작 연도, 기법까지도 이처럼 의문이 남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왕조실록에 당대를 대표하던 문장가로, 그리고 퇴계 문하를 대표했던 학자로 이름을 떨친 소고는 현재 지역 인물로 실추돼 일반에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지난해 12월 12일 선생을 재조명하는 학술모임이 영주에서 열렸다. 영주의 선비정신을 확립하고자 마련된 행사였다.

이산면 내림리 산27번지에 있는 소고의 묘소에는 1629년 10월에 건립한 묘비와 2001년 3월에 개갈한 묘비가 함께 서 있다.





입력시간 : 2007/01/09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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