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마는 소리없는 증언을 남기는 법이죠"365일 24시간 비상 대기, 현장의 모든 물체가 중요 단서

작업 준비물은 빗자루, 붓, 호미, 갈퀴, 모종삽, 드라이버, 삽, 쇠스랑, 마스크, 헬멧, 방진보호복 등등. 건설현장에 일하러 가기에는 호미와 쇠스랑 등이 이상하고, 농사지으러 가기에는 드라이버와 헬멧 등이 이상하고···. 서로 이질적인 장비들이 뒤섞여 있다. 그렇다고 하나라도 없으면 일하는 데 큰 애로를 겪는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과연 무슨 일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이들은 소방방재본부 화재조사관들이 지녀야 할 필수 장비들이다. 겉보기에는 사소한 물건 같아도 화재의 원인을 규명하고 재발을 방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도우미들이다.

이 장비들을 사용해 화재사건의 시작과 끝을 추적하는 소방방재계의 ‘CSI’, 화재조사관 황태연(34) 씨를 만났다. 직함은 그럴 듯하지만 현장에서는 잿더미 속을 누비는 특별한 '청소부'다.

“일이 재미있습니다. 현장에 숨어있는 단서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종합해 퍼즐을 맞추는 것과 비슷해요."

황 씨는 서울시 소방방재본부 방호과에 소속된 조사관이다. 화재조사관으로는 올해로 5년차. 우리 곁에서 일어나는 각종 화재 사건의 보이지 않는 주범과 경로를 뒤쫓는다.

국내에서 일어나는 화재사건 발생 건수는 1년에 약 3만 건. 1차적으로는 해당 구역별 관할 소방서 또는 파출소 대원들이 진압과 조사를 담당하지만, 소방서 단위에서 처리하기 어려운 문제나 사회적으로 이슈화된 사건 등은 소방방재본부에서 직접 맡는다. 지난해 11월 서울 송파구에서 8명의 사망자를 낸 고시원 화재참사도 소방방재본부의 조사관들이 투입된 사례이다.

업무의 중요도에 비해 조사 인력은 많은 편이 아니다. 본부의 경우 팀장까지 합쳐도 모두 3명. 2인 1조로 움직인다. 대형 참사엔 팀장이 합류하며 한두 명의 관할소방서 소속 조사관들도 지원한다.

적어도 1주일에 서너 번은 출동할 일이 생긴다. 한번 투입되면 최소한 6시간쯤 지나야 화재현장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화재가 그렇듯 이들의 업무도 주야(晝夜)가 없다. 한밤중에도 곧장 호출이 날아든다. 칠흑 같은 새벽에 나가 아침 동이 튼 뒤에야 돌아오는 날도 허다하다. 물론 공휴일과 국경일에도 비상대기해야 한다.

화재조사관들은 소방관들이 불과의 사투를 벌이는 동안에도 그 곁을 지키며 현장상황을 예의주시한다. 화재 지점을 중심으로 일대에 큰 원을 그리듯 빙 돌아다니며 탐문수사를 벌인다. 최초 신고자의 진술 내용, 인근 주민들의 목격담 등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수집한다. 그 와중에도 눈길은 내내 불길이 번지는 방향을 놓치지 않는다.

“화재에도 흐름이 있고 순서가 있습니다. 일단 불이 나면 주위의 물체와 화학반응이 일어나면서 물체의 색깔이나 모양이 변하게 됩니다. 불길이 어느 쪽으로 어떻게 번지는지, 불에 탄 물체들의 색깔 등을 보면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길 속의 모든 것들은 저마다 소리없는 증언을 남기고 재로 남는다. 목재의 경우, 불이 붙어 열을 받게 되면 검게 탄화되면서 목재 내부로부터 가스가 빠져나온다. 그리고 균열이 일어난다. 목재의 균열 정도만 봐도 화재가 일어난 시간을 대강 추측할 수 있다. 플라스틱 물체는 녹아내린 정도로 경과 시간을 추정하고, 쉽게 재로 변하는 종이류는 재의 색깔이 희면 흴수록 화재 시간이 길었다는 증거이다. 철판과 같은 금속류는 더 분명한 증언자다. 이것은 열을 받으면 맨처음 회색으로 변했다가 차차 적색으로, 어두운 청색으로 차례차례 변한다. 화재에 노출된 시간을 알려주는 지표다. 이런 노하우는 어디서 얻을까.

“일단 본인의 생생한 경험에서 터득합니다. 그와 함께 관련 서적을 읽으며 꾸준히 공부해야 됩니다."

이들에게 가장 속이 타는 것은 초기 ‘치명적인 5분’의 순간이다. 즉, 불이 난 지 5분쯤 지나면 어느 순간 섬광이 번쩍이듯, 폭발물이 터지듯, 갑자기 불길이 치솟아 건물 전체를 뒤덮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것을 ‘플래쉬 오버(Flash Over)'라고 부른다. 소방관들과 화재조사관들이 가장 피하고 싶은 순간이다. 일단 플래쉬 오버가 생기면 화재진압도, 조사도 훨씬 더 어려워진다. 희생자의 피해나 금전적인 손실 규모가 더 커지는 건 말할 것도 없다.

“플래쉬 오버가 진행되는 순간부터는 시간을 끌면 끌수록 중요한 단서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게 됩니다. 원인 규명이 더 어려워지는 것이죠. 이 때문에 어떻게 하든 화재 발생 후 5분 전에 불을 끄려고 소방관들도 사력을 다합니다."

불길이 완전히 잡히고 나면 그 다음엔 조사관 황 씨팀이 바톤을 이어받아 투입된다. 자연 발생 화재인지, 단순 실화인지, 아니면 고의적인 방화인지가 조사 대상 1순위다.

손전등을 한 손에 쥐고서 칠흑같이 캄캄한 잿더미 건물 내부로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하지만 행여 증거물을 훼손할세라 내내 고양이 걸음이다. 사상자가 발생한 사고의 경우, 현장 내부는 공포영화 못지 않다. 참혹함 속에서도 혹시 화재 발생 전에 외부 침입자가 없었는지 사방에 널린 모든 흔적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현장에 있는 사소한 물체 하나하나가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특히 방화 도구까지 발견될 때에는 99% 고의적인 방화사건임을 알 수 있지요."

방화에 쓰인 도구 여부를 어떻게 판별하는 걸까. 슬쩍 물어 보았다.

“예를 들자면, 상식적으로 그곳에 있어서는 안 될 물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 발견된다든지 하면···."

그리고는 말을 아낀다. 황 씨는 “모방범죄의 가능성 때문에 방화 도구나 수법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해 드릴 수 없다”며 양해를 구한다.

사고 1건당 적으면 평균 200장, 많을 땐 500장의 현장사진을 찍는다. 순례를 돌듯 집안 곳곳을 차례로 점검하며 서서히 발화 예상 지점의 범위를 좁혀 나간다. 마침내 발화 예상 지점이 한 곳으로 압축되면 그때부터 본격 발굴(?)이 시작된다. 어지럽게 널려있는 잿더미를 하나하나 조심스레 털고 들춰가며 증거자료들을 분류하고 정리한다. 앞서 말한 빗자루와 모종삽, 드라이버, 갈퀴 등이 이때 맹활약을 한다. 수북한 잿더미 앞에 쭈그려 앉아 조심스레 호미질, 붓질을 하는 조사관들의 모습은 소중한 유물을 발굴 중인 고고학자와도 별반 차이가 없다.

현장에서 판독하기 어려운 자료들은 본부로 가져와 자체 정밀 검사 장비로 분석하게 된다. 황 씨팀은 기본적으로 전압·전력 테스터, 저항기, 물체의 20만 배까지 확대해 볼 수 있는 전자현미경 등을 갖추고 있다. 이 장비들로도 답이 나오지 않으면 소방과학연구소에 별도로 감정을 의뢰한다.

관련 자료가 모두 모아지면, 이윽고 ‘퍼즐 맞추기’가 시작된다. 그간 확보한 자료들을 토대로 1차 가설을 세운 뒤, 다시 한번 검증을 한다. 그렇게 사실 여부에 확신이 설 때에야 최종 보고서가 만들어진다. 방화 혐의가 포착된 사건은 경찰에 통보해 용의자 수사를 맡긴다.

황 씨는 2001년 간부후보생 공채를 통해 소방인의 길에 들어섰다. 우이파출소 소장직으로부터 출발해 현재의 방호과 화재조사관으로 온 것이 2003년이다.

가장 맥 빠지는 경우는 끝내 화재 원인이 밝혀지지 않을 때다. 사건 10건 중 두세 건 정도가 대개 원인 불명으로 남겨진다. 기껏 고생하고도 결론없이 현장을 돌아서야 할 땐 그렇게 찜찜할 수가 없다. 정황은 확실한 데 물증이 충분치 않아 단념해야 할 때엔 기분이 더 바닥이다. 그러고도 미련을 못 버리는 황 씨. 잠을 잘 때나 지하철 안에 앉아있다 말고 어느 순간 ‘아하, 내가 그걸 놓쳤었구나!’를 깨달아 기적처럼 해결의 단서를 찾아낸 적도 있다고. 그럴 때는 10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라고 한다.

화재로 변을 당한 희생자를 마주하기란 언제나 마음이 편치 않다. 맨처음 이곳 화재조사팀으로 발령받은 지 채 1주일이나 됐을까, 한창 새벽잠을 자고 있던 황 씨에게 갑자기 출동명령이 떨어졌다. 부랴부랴 현장으로 달려갔더니 이미 소방관들이 화재 진압을 끝낸 뒤였다. 황 씨도 내부 조사를 위해 집안으로 들어섰는데, 현관 앞에 뭔가가 담요로 덮여 있었다. 처음엔 뭔지도 모른 채 지나갔는데 직원들의 입을 통해 그것이 시신임을 뒤늦게 알았다. 그때부터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계단을 오르는 중엔 점점 뭔가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희생자들의 피비린내였다.

“어쨌든 얼마 뒤 희생자 파악은 모두 끝난 줄 알았는데, 직원 중 누군가가 '사망자가 또 있다'고 소리치는 겁니다. 알고보니 제가 그 직전에 작은 방을 둘러보면서 의자에 큰 인형 같은 것이 하나 기대어 있는 걸 얼핏 봤는데, 그게 사망자 시신이었던 것이었죠. 어찌나 끔찍하고 놀랐는지, 그날 내내 헛구역질을 했어요. "

지난해 말 경에 일어났던 모 유명 원로학자의 화재 사망사건 규명은 과학적인 지식으로 풀어낸 성과였다. 당시 유관기관들까지 대대적으로 합류해 공동조사를 벌였지만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고 결국 결정적으로 이 수수께끼를 푼 것은 황 씨팀이었다. 황 씨는 현장의 잔해가 보이는 양상이나 정황상 일단 발화물질 대상에서 고체와 액체를 제외시켰다. 그리고 남은 건 한 가지, 기체의 연소 방식과 특성에 집중했다. 실제로 현장에 펼쳐진 대부분의 정황들이 기체 발화 시의 현상과 거의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기체에 불이 붙으면 폭발하듯 한번에 확 타버리는 특성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실내의 가스밸브가 열려 있는 것이 확인되었고, 비로소 사건이 풀리기 시작했다. 이것을 ‘섬광 화재(Flash Fire)’라고 부른다는 것을 황 씨는 나중에 전문서적을 읽다가 알게 되었다.

“난제 사고나 사건들을 내 힘으로 마침내 해결했을 때, 일하는 보람과 성취감을 느껴요. 그 때문에 일이 힘들어도, 하면 할수록 이 분야에 흥미를 갖게 됩니다. "

화재의 현장을 누비다보니 그들은 항상 돌발적인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안전화를 신지 않으면 못에 찔리기 십상이다. 사방에 날리는 심한 재 먼지 때문에 호흡기질환이나 비염을 앓는 조사관들도 적지 않다. 불길이 완전히 잡혔더라도 혹시 모를 건물 붕괴의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다. 화재 중에 발생한 잔류 유독가스 흡입도 적잖이 위협적이다. 조사를 갔다온 날은 온종일 머리가 띵할 때가 많다. 완전히 연소되지 않은 식품이나 생물이 부패하면서 생겨난 곰팡이 등 미생물 때문에 온몸이 가렵거나 피부염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아픔은 바깥에 있다. 자신들의 전문성과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세상 속에서 절감할 때다.

“제일 안타까운 건 가난한 서민들이 피해를 입었을 때입니다. 발화 원인이라도 정확히 밝혀지면 그나마 원인제공자로부터 피해 보상이라도 받을 수 있지만 증거가 부족하거나, 특히 대기업 등의 원인제공자가 발뺌하면 속수무책이죠. 그때 피해자들이 겪을 물질적, 정신적 고통을 생각하면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아파요. ”

<화재조사관이 되려면>

전공에 상관없이 누구나 소방공무원 공채에 응시할 수 있다. 거의 매년 공채하며 경쟁률은 약 50대 1이다. 소방간부 후보생의 경우엔 2년에 한 번씩 공채한다. 물리, 화학 등 어느 정도의 과학적 지식과 추리·분석력을 지닌 이공계 출신에게 특히 어울리는 직업이다. 성격이 활달하면서도 꼼꼼하고 관찰력이 뛰어난 여성들도 개척해볼 만한 새로운 분야다.




정영주 객원기자 pinplus@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