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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의 세계] 고궁문화재 해설사 김재신 씨
유쾌한 고궁나들이 길라잡이 "관람객과 함께 떠나는 즐거운 역사여행이죠"
하루 15km 이상 걷는 고된 일과지만 외국인에게 우리 역사 알리는 보람에 자부심







늦어도 오전 7시 50분에는 집을 나서야 한다. 사무실에 도착하면 대략 오전 8시 반. 여기저기 조명이나 기기의 전원을 켜고, 비어있는 곳엔 안내책자도 넉넉히 비치해 둔다. 그럭저럭 준비를 끝마치면 금세 9시 20분. 사무실 한켠에 놓여있는 마이크를 집어 든다. 짧고도 유창한 일본어 안내방송이 궁내로 울려 퍼진다.

10분 뒤면 일본인들을 위한 무료 해설이 시작되니 신청자는 사무소 앞으로 모이라는 내용이다. 경복궁의 문화재해설사 김재신(45) 씨의 일과가 막 시작될 참이다.

“오늘은 일요일인 데도 이상하게 다른 때보다 관람객이 적네요. 신청자가 일본인 모녀, 단 두 사람뿐입니다. 이렇게 적은 경우가 흔치 않은데···.”

자신만의 독특한 해설기법 개발

김재신 씨는 경복궁의 일본어 해설을 맡고 있는 전문 문화재해설사다. 현재 경복궁에 소속된 해설사는 영어, 일어, 중국어를 합쳐 모두 9명. 그중에서도 그는 청일점이다.

이들의 외국어 해설 순례는 1인당 하루에 최소 3,4회가 기본이다. 여기에다 우리말 해설도 몇 번 더 다녀야 한다. 첫 해설은 오전 9시 반에 시작되고, 오후 4시면 마지막 해설자가 순례에 나선다. 한차례 해설이 시작되면 외국어의 경우 약 1시간, 우리말로는 1시간 20분 안팎이 걸린다.

서울에 있는 고궁 중에서도 경복궁은 해설사에게 가장 고되고 힘겨운 난코스다. 안내할 건물도 많고, 걸어다녀야 할 면적도 넓다. 주요 대상 건물만 권역별로 크게 나누면 약 10군데, 세부 건물로 치면 약 30개 동을 돌아야 한다. 한 곳당 걸리는 해설 시간은 짧게는 10분, 길면 15분 정도다.

운동량이나 정신적인 부담으로는 국내 궁궐 중 으뜸. 1회당 해설 코스의 거리가 1.5~2km 다. 사무실까지 다시 돌아오는 것을 감안하면, 한 번에 3km 이상을 걷는 셈이다. 해설 세 번만 돌고 오면 완전히 녹초가 된다. 우리말 해설까지 합치면, 하루에 15km 이상을 걸어야 한다.

“1시간짜리 강연을 하는 자체만으로도 힘이 드는 일인데, 그것도 내내 걸어다니며 강연을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해설을 한 번 끝낼 때마다 꼭 1시간쯤 쉰 뒤 다음 해설을 나가는 이유도 그만큼 피로 정도가 심하기 때문이지요. ”

문화재해설사는 담당 유적지에 대해 전문적인 역사 정보를 알려주며 관람객들의 이해와 흥미를 돋우는 전문가들이다. 해당 유적에 대한 기초 자료야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지만, 문제는 관람객들이 보다 흥미롭고 관심있게 유적을 대할 수 있도록 해설사 자기만의 독특한 설명기법이나 보조 지식을 개발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고전에서부터 신간도서에 이르기까지 틈날 때마다 관련서들을 찾아 공부한다.

다른 해설사나 여행사 가이드들의 해설도 눈여겨 모니터링하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그렇게 고민하고 연구한 모든 것들이 자기만의 파일로 쌓여서 활용된다.

해설사마다 해설 방식도 다 다르다. 김 씨의 경우 ‘관람객들과 섞이는 해설’을 좋아한다. 강의형이 아니라 관람객들과 함께 여행하는 기분으로 어울리며 ‘앎을 즐기는’ 식이다.

때로는 관람객들을 즉석에서 편으로 나누어 깜짝 퀴즈대결을 벌이기도 한다. 관람객들이 금세 빨려드는 것이 그의 눈에 확연히 보인다. 각 해설사의 성향에 따라 관람객들의 유적 순례는 진지할 수도 있고, 유쾌한 놀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해설사가 되기 전, 김 씨는 일본 항공사에서 9년간 근무한 이력이 있다. 학원의 일본어 강사로 일한 경력도 5년쯤 된다. 무역업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해 한참 좌절하던 2005년 초, 문화재청의 공채 공고를 보고 응시해 경복궁 해설사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현재 일에 필요한 모든 기초 훈련을 밖에서 거치고 온 셈이었다. 새내기로 첫 해설에 나섰을 때에도 그는 전혀 떨지 않았다. 처음부터 너무나도 재미있는 일이었다.

“제 생각엔 문화재 해설사가 거치는 4가지 단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엔 오로지 자신이 준비한 원고대로 마치 대사를 외듯이 읊는 초보단계, 그러다 3개월쯤 지나면 조금은 여유가 생겨서 주위 사물과 관람객들이 하나둘씩 눈에 보이기 시작하지요. 이때쯤 되면 관람객들을 배려할 줄 알게 되고, 질문도 받을 정도가 됩니다. ”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 다음에는 주객이 전도되는 단계로 넘어간다. 오히려 관람객들에게 페이스를 뺏기는 역전 현상이 벌어진다. 관람객들에게 휘둘려 예정된 해설 일정이 지연되거나 주어진 시간을 초과하기 일쑤다. 그러다 1년쯤 지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페이스를 찾게 된다.

어떤 돌발상황에도 당황하지 않고 관람객들의 질문 세례도 자를 것은 자르고 분위기를 주도해, 자유롭게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단계다.

스스로의 권태감이 가장 큰 숙제

해설사라는 이름이 주는 안온함과는 달리, 이 일은 끊임없는 자기변화와 체력을 요구하는 고된 일이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또는 명절이든 공휴일이든, 단 한 사람이라도 신청자가 있으면 무조건 ‘Go'다.

하루 몇 차례씩 반복되는 행군에 다리는 통통 붓고 온몸이 묵지근하다. 관람객이 많을 땐 목청껏 큰소리로 이야기를 전하느라 목이 쉬는 일도 많다. 휴대용 확성기인 기가폰을 사용하긴 하지만, 인파가 많을 땐 그마저 무용지물이다. 통제불가에다 주의가 산만하고 줄곧 떠들어대는 초등학교 저학년 어린이들이나 연로하여 귀가 어두운 어르신들을 안내하기가 가장 어렵다.

하지만 무엇보다 극복하기 힘든 상대는 해설사 스스로의 권태감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것도 일년 내내 같은 일을 반복해야하는 지겨움은 상상 이상으로 크고 심각하다.

일단 해설사가 되고 나면 이 ‘다람쥐 쳇바퀴 돌기‘의 압박은 예상보다 아주 일찍 나타난다. 김 씨 자신만 해도 6개월이 지나면서부터 지겨워지기 시작해 1년쯤 지나자 자신이 앵무새나 녹음기가 된 듯한 기분에 적잖은 회의를 느꼈다. 사실상 문화재해설사들이 짊어져야 할 숙제다.

“이 일이 지겹다고 생각될 때는, 그것은 그만큼 자신이 나태해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같은 해설이 지겨우면 더 열심히 공부해서 해설 방식이나 관점을 바꾸거나 보강하면 또 새로워지거든요. 스스로 극복하는 길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경복궁을 찾는 관람객 수는 연 평균 200만 명, 특히 방학기간엔 방문객 수가 폭증한다. 주말에만 하루 평균 2만여 명, 한창 인파가 몰릴 때는 하루 4,5만 명이 찾아들기도 한다.

관람객 5만 명이면 지방의 일개 시(市)를 구성할 만한 인구다. 그럴 때는 인파에 치이다 못해 ‘사람이 싫다. 잠시라도 사람없는 곳에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대부분 아담하고 건물 수가 적은 여타 고궁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경복궁 해설사들만이 겪는 남다른 ‘비명’이다.

방문객 중 절반은 외국인들이고, 해설을 듣는 관람객 수는 전체의 약 10%선이다. 이리저리 계산을 해보면 해설사 1인당 하루 200명을 담당하는 셈이다.

계절적으로도 한겨울, 한여름은 특히 이들에게 고생스럽다. 빌딩들이 빽빽한 담장 바깥 세상과는 달리 넓디 넓은 경복궁 안은 이렇다할 바람막이가 없어 겨울 바람이 유난히 맵고 시리다. 여름엔 여름대로 온종일 서 있다보면 작열하는 땡볕이 여간 고역이 아니다. 해설 한 번만 돌고 나면 추위로, 더위로 온몸이 축 늘어진다.

각기 다른 역사관 이해와 설득

담당 언어권 나라와의 관계에 따라 또 다른 마음고생이 추가될 때도 있다. 김 씨는 한·일 간의 편치않은 역사분쟁을 경복궁 현장을 통해 피부로 체험하곤 한다. 언젠가 한 일본인 관람객의 오만하고 뒤틀린 역사관 때문에 몹시 언짢았던 기억이 있다. 물론 해설사라는 본분 때문에 김 씨는 부드럽게 상황을 수습할 수 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갑자기 20, 30대쯤 돼 보이는 젊은 일본인 여성 하나가 ‘우리가 침략한 게 아니라 너희가 무능해서 돌봐준 것’이라며 ‘경의선까지 만들어주며 발전시켜 줬으니 오히려 우리에게 감사해야 되는 것 아니냐’며 큰소리를 치는 거예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억지로 참고 겨우 설전을 마무리했어요. ”

반면에 2005년 가을에 만난 전 일본 원자력연구소 원장 부부는 정반대의 기억을 남겨주었다. 당시 80세가 넘은 고령의 학자로 경복궁을 찾은 이들은 너무나 진지하게 경청해주었고, 명성황후의 시해 현장으로 안내했을 때엔 ‘정말 미안하다’며 고개 숙여 사죄의 인사까지 남겼다. 심지어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도 김 씨에게 감사해 하며 일본으로 초청하는 편지를 보내 그를 감동케 했다.

사실상 그가 경복궁에서 만나는 상당수의 일본인들은 자국의 만행을 아예 모르고 있거나 한·일 관계 자체에 무관심하다. 그래서 독도나 종군위안부 문제 등에 대해 한국인들이 보이는 울분에 대해 거의 어리둥절해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하긴, 가해자와 피해자의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이 직업에 대해 어떤 사명의식 같은 것을 느낄 때가 바로 그럴 때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국인 일본이 저지른 일에 대해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릴 때도 있어요. 왜곡된 역사를 이렇게 일본인 관람객들에게라도 제대로 가르쳐주고 바로잡아 주고 그들의 진심어린 반응을 볼 때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

아직 제도상 비정규직 공무원의 신분이긴 하지만, 문화재해설사는 정시 출퇴근이 가능하고 주 5일제 근무도 확실히 보장되는 직업이다. 다만 주말에 쉬는 것이 아니라 매주 화요일마다 돌아오는 휴궁일과 자신이 원하는 평일 중 하루, 그렇게 이틀을 쉰다.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는 화요일의 휴궁 원칙과도 상관없이 근무한다.

현재 고궁의 문화재 해설사 중 남자 해설사는 창덕궁의 중국어 해설사를 포함해 단 2명뿐이다. 김 씨의 바람 중 하나도 남자 해설사들이 좀 더 늘었으면 하는 것이다.

‘방금 여름 바캉스에서 돌아온’ 사람처럼 얼굴이 까맣게 탄 그를 만난 날, 그의 단출한 해설 행렬을 뒤좇아다니다 흥미로운 상식 하나를 건졌다. 경복궁 안에는 재미있게 생긴 12가지 동물 조각상이 곳곳을 지키며 앉아있다. 우리가 시각을 알릴 때 쓰는 ‘자정’이란 말에는 쥐가 한 마리 들어가 있다.

그럼 낮 12시를 뜻하는 ‘정오’ 속에는 어떤 동물이 숨어있을까? 정답 확인은 가능하면 직접 경복궁을 찾아가 해결하시기 바란다. 문화재해설사들을 만나 그들로부터 조선 시대의 궁궐 역사를 배워보면 또 다른 재미를 느낄 것이다.




< 궁궐 문화재 해설사가 되려면 >

영어, 일어, 중국어에 한해 막힘없이 외국인과 대화할 수 있는 정도의 유창한 외국어 실력이 필요하다. 고궁별로 다르지만, 대개 19세에서 45세까지면 누구나 응시 가능하다. 최근에는 각 고궁별로 결원이 생길 경우 공채가 실시된다. 시험은 1차 서류전형에 이어 한국인 면접, 원어민 어학 면접 등으로 진행된다.



입력시간 : 2007/02/26 12:29




글, 사진 정영주 pinplus@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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