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대 종손 이홍배(李烘培) 씨 격조와 미덕이 몸에 밴 노신사교육자 집안서 성장, 선조 정신 헌양할 '계일정신문화원' 설립에 매진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 선생에 대해서는 필자가 대학원에 다닐 때 동창생이 석사학위 논문 테마로 잡으면서 처음으로 접했다.

그 뒤 저헌은 연안 이씨의 중흥조(中興祖)요, 포은 정몽주의 증손서요, 월사 이정구의 고조부라는 사실을 들었다. 문집을 통해 조선 초 생원, 진사, 문과에 동시 장원으로 뽑혀 여섯 임금을 섬긴 명신이며 대학연의 등 유학(儒學)을 깊이 있게 연구한 학자라는 것도 알았다.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에 자리잡고 있는 저헌의 묘소는 명당으로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선생을 추모함과 아울러 나름의 식견으로 후손들이 발복한 이유를 짐작해보기도 한다. 묘터에 얽힌 일부 일화는 사리에 맞지 않는 허황된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입에서 오르내려 이제는 기정사실로도 통한다. 풍수설을 논외로 하더라도 묘소에 올라 주위를 바라보면 정말로 편안하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바로 옆에 모셔진 처증조부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소를 구경할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저헌의 종가는 묘소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마을인 안골에 있다. 초입에 한국등잔박물관(1997년 개관)이 있어 찾기에 더욱 편리하다. 종가는 1988년에 문중 인사들이 모이는 집인 문강재(文康齋)를 창건했고 아울러 선생의 정자인 계일정(戒溢亭)을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생의 동료였던 괴애 김수온이 지은 기문을 읽고서 ‘계일’이 자기 수양의 아주 분명한 착수처(着手處)임을 알 수 있었다. ‘차고 넘침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이는 이 가문의 가훈(家訓)이기도 하다.

덧붙여 문자를 더해 사자 성구를 만들어보면 ‘지영계일(持盈戒溢)’은 ‘넘치는 잔을 들고서 그것이 넘치지 않도록 조심하고 경계하라’는 뜻이다.

저헌은 같은 해에 생원과 진사, 그리고 문과에 모두 장원을 했을 뿐 아니라 초시에서도 장원을 했다. 이는 조선 시대 최초의 사례로, 누구도 이 기록을 깨지 못했다.

종손 이홍배씨 / 문강재와 계일정 / 신도비
저헌은 조선 시대 대표적 장원 3명 중 한 명이다. 다음으로는 신종호(申從濩)인데, 그는 진사와 문과 그리고 문과 중시에 장원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호는 ‘세 번 장원을 한 집’이라는 의미인 ‘삼괴당(三魁堂)’이다. 또 한 사람은 율곡 이이(李珥)다. 그는 한 해에 생원과 문과에 장원을 했으며 생원시의 초시와 문과 복시에서도 모두 장원으로 뽑혔다.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번에 걸쳐 장원을 했다는 의미로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란 칭호가 명예롭게 따라다닌다.

저헌의 문과 급제는 당시 그렇게 빠른 편은 아니었다. 3년 선배인 단계 하위지는 24세에 생원이 된 바 있고, 그와 같은 나이인 27세 때 문과에 급제했다. 2년 후배인 취금헌 박팽년은 16세에 생원, 18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이는 ‘소년등과(少年登科)’라 할 정도다. 3년 후배인 매죽헌 성삼문은 18세에 생원, 21세에 문과에 오르며, 5년 후배인 사가 서거정도 19세에 생원과 진사, 25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그럼에도 세 번에 걸친 장원이라는 성취는 강한 중압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래서 넘침을 경계한 것으로 호를 삼아 자신을 재차 검속한 것이다.

18대 종손 이홍배(李烘培, 1938년생) 씨를 만나 명함을 전해 받고는 역시 명가의 종손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명함에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중의 하나로 ‘계일정신문화원(戒溢精神文化院)’을 표기했는데, 뜻밖에도 아직 설립되지 않았다. 종손의 필생 사업인 듯하다. 종손은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전통문화와 역사 배우기에 무관심한 우리 사회의 현실을 개탄했다.

그는 용인에서 태어나 선친이 설립한 능원고등공민학교를 나온 뒤 서울로 유학해 휘문고등학교와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진학했다. 휘문고는 선친의 모교이기도 하다. 그 뒤 한미재단에서 근무하기도 했으나 이내 직장생활을 접고 무역업 등 개인 사업에 뛰어들었다.

묘소 / 문집 / 친필
종손의 선친은 존경할 만한 교육자요 농촌운동가였던 이정희(李政熙, 1906-1983) 교장이다. 마을 주민은 물론 문중에서도 선친에 대한 미담가화를 아직도 입에 올린다.

“그분에게 저도 배웠는데, 대단하셨어요. 새마을사업을 박정희 전 대통령보다 30년 앞서 시작하셨으니까요. 휘문고보와 대구사범학교를 나와 능원고등공민학교를 세웠고, 애향심이 남달라 서울대학교로 유달영 선생을 찾아가서 ‘용인애향가’를 짓게 하셨죠. 애향정신 함양, 도덕교육, 생활교육에 전념했으며, 환경보호운동에도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지난 2005년에 우리가 힘을 모아 송덕비를 세웠어요.”

제자이면서 연안 이씨 저헌공파 대종회 총무 일을 보고 있는 이경희(李慶熙, 1937년생) 씨의 증언이다.

능원학교에는 그래서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귀한 나무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다 캐가고 남은 것이 별로 없다고 한다. 선친은 일본에 갈 때면 희귀 단풍나무를 가져와 심었을 정도로 조경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지역의 존경받는 교육자 집안에서 성장했으면서도 종손이 교육자의 길을 가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다.

“선친께서 가신 길이 가장 바른 길이긴 했지만 가족들은 생활고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문중 일과 학교밖에 모르신 어른이셨어요. 그래서 저는 다른 길을 생각했던 것이죠. 60줄에 드니 세상의 이치가 보이고 그래서 철이 좀 들었다고나 할까요. 저희 가훈에 ‘계일’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정신이 문중의 중심 사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문화원을 설립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대개 종손은 어려서부터 심적 부담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상을 받들고 지손을 생각해야 하는 소임을 타고난 사람이 종손입니다. 저는 학창 시절 잠시 그러한 사명감을 잠시 잊었고, 또 사업에만 골몰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헌 할아버지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킬 구심점을 찾아야겠다는 사명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과묵한 성품의 그는 종손의 책무와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한 분명한 목표를 갖고 있다.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오면 정면으로 선조의 시호에서 딴 재사를, 왼쪽으로는 선조의 정사를 복원한 계일정을 만나게 된다. 종손에게 계일은 이미 눈에 익숙하고 마음에 새겨진 숙명으로 다가오는 셈이다. 멀지 않은 장래에 ‘계일정신문화원’을 세우고자 하는 종손의 소망은 그래서 반드시 이루어야 할 숙원처럼 보인다.

포은 정몽주와 저헌 이석형은 모두 선현으로 증손서와 처증조부 관계로 당시에는 더할 나위 없이 밀접한 관계였다. 그렇지만 후대로 내려오면 이해관계가 달라질 수 있다.

또한 조선 시대에 산소를 둘러싼 시비는 가문의 명운을 건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산소를 둘러싼 두 문중의 갈등은 일제 강점기 때 극에 이르렀다. 저헌의 후손이 일제 때 산소 대장 복사본을 보았는데, 두 문중 산소마다 평수까지 상세히 표시되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저헌의 산소와 신도비, 비각, 행적비 등 여러 기의 비가 모셔진 비각공원 터를 제외하고는 영일 정씨 문중이 땅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도 연안 이씨 측에서는 시사 때 영일 정씨 문중 어른들이 “우리가 저헌 선생이 아니었으면 오늘이 없었네”라고 한 말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문중 내에서도 이해관계가 걸리면 갈등을 겪는데, 하물며 선대로부터 세의(世誼)가 남달랐다고 해도 이해가 걸린 다른 문중과 평화롭게 지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대개 씨족 간에는 서로 네 탓이라며 얼굴을 붉히기도 한다.

그러나 저헌의 종손은 달랐다. 시종일관 선대의 남다른 관계를 강조하며 자신보다 훨씬 어린 포은 종손을 자주 만나 문중 간의 발전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고 한다. 합리적이고 어른다운 모습이다.

저헌이 포은을 진심으로 기린 시 작품이 남아 있다. 제목은 길다. ‘상(세조)이 정몽주는 고려에는 어떤 사람이고 조선에는 어떤 사람인가? 하고 하문함에 이석형이 시로써 읊어 올리다’라는 작품이다.

聖周容得伯夷淸 주나라에서는 백이의 청절 포용해
餓死首陽不死兵 해치지 않고 수양산에서 굶어 죽게 했지
善竹橋頭當日夕 그러나 그날 우리 선죽교에서는
無人扶去鄭先生 정 선생님을 모신 이 아무도 없었네

이 시를 읽으면 저헌은 대범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세조의 분노를 살 만한 위험수위의 생각을 거침없이 시로 형상화했다. 세조는 저헌을 총애했다.

그렇지만 세조의 질문은 손에 땀을 나게 하는 이른바 ‘핫이슈’였다. 조선의 관인은 건국 자체를 부정한 고려의 충신 포은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할까? 저헌의 답은 명쾌했다. ‘유감이며, 이제라도 충신으로 현양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이를 말로 하면 너무 노골적이어서 대안으로 택한 것이 시 형식이다.

저헌은 대뜸 유가(儒家)의 이상국가인 중국 주나라의 고사를 인용했다.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왕을 죽이는 일에 반대해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서 먹다가 죽은 백이숙제. 만고의 충신으로 역대 왕조마다 따라 배우는 대상이었다.

무왕은 자신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떠난 백이숙제를 인위적으로 해치지는 않았다. 반면에 그에 비길 고려의 충신 포은을 조선의 태종 이방원과 그의 지지자들이 포용하지 못하고 살해한 것이다.

‘아무도 정 선생님을 살려두자고 하지 않았네’라는 시구에는 표현의 묘미와 더불어 대학자의 지혜가 읽혀진다. 후일 역사는 포은을 충신으로 받들어 문묘에 배향해 기렸다. 이렇게 된 데는 저헌도 한몫했을 것이다. 두 문중에서 이 시 한 편만 읊조리면 그날의 정신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이석형 1415년(태종15)-1477년(성종8)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백옥(伯玉), 호는 저헌(樗軒), 시호는 문강(文康), 봉호는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학자·관료·목민관으로 명성… '삼장원' 명예도

저헌은 호와 이름자가 모두 특이하다. 호의 경우 저(樗)라는 글자는 ‘가죽나무’, 즉 쓸모없는 것을 지칭한다. ‘저’와 함께 쓰이는 글자가 ‘력’인데 상수리나무를 뜻한다.

고려 말의 대학자 경주 이씨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저술인 역옹패설에 나오는 글자다. 익재 역시 ‘아주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역옹’을 즐겨 썼다. ‘저’라는 글자를 호로 삼은 이는 저헌의 선배로 문화 유씨 유백유(柳伯濡)가 있다. 유백유는 목은 이색의 문생(門生)으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는데, 도은 이숭인, 양촌 권근 등과 동방이다. 그는 자신이 거처하고 있는 정자 이름을 저정(樗亭)이라 했다.

저헌이 이 글자로 호를 삼은 것은 역시 정자 이름인 계일(戒溢)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는 자신을 낮추고 넘침을 경계하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저재갱득첨유림(樗材更得忝儒林)’. 즉 ‘보잘것없는 자질로 다시 유림의 모임에 참여했네’라는 식으로 저라는 글자를 써서 겸양한 시가 여러 편 있다.

‘석형(石亨)’이란 이름자도 독특하다. 부친인 의정공(議政公) 이회림(李懷林)은 늦게까지 아들이 없자 삼각산에서 기도를 하여 아들을 얻었다. 태어나기 전날 밤 궁중에서 숙직을 하다가 꿈을 꾸었는데, 백룡이 큰 돌을 깨고 나와 승천하는 것을 보고 잠에서 깨니 아들이 태어났다는 전갈이 왔다. 그래서 석형으로 이름을 지었다 한다.

연안 이씨는 광산 김씨, 대구 서씨와 함께 우리나라의 3대 명가로 꼽히는 씨족이다. 문중 자료에 의하면, 연안 이씨는 대제학이 8명에다 3대에 걸쳐 대제학이 난 집이요, 청백리가 7명, 정승이 9명, 판서가 54명, 공신이 10명, 시호가 59명, 9대 봉군집, 9대 재상집, 불천위 17명, 문과 급제자 250명 정도로 현달하다.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러한 성취의 물꼬를 저헌이 터서 중흥조(中興祖)가 되었다. 저헌의 현손이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다.

저헌은 현재의 서울대학교 병원 구내인 연건동에 있는 집에서 1415년(태종15) 10월 10일에 태어났다. 10세 때 모친상을 당했고, 14세에 승보시(陞補試)에서 장원으로 뽑혀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했으며, 27세 봄에 생원, 진사, 문과에 모두 장원으로 뽑혀 이때부터 ‘삼장원(三壯元)’은 그를 부르는 별칭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졸기에 보면 ‘세조가 늘 이석형을 내전으로 불러들여 궁녀들에게 명해 삼장원사를 부르게 하고 술을 내렸다(每引內殿 命宮女唱 三壯元詞 以侑酒)’라는 내용이 보인다.

다른 기록에 보면 ‘국왕(왕후로 적은 곳도 있음)은 어의(御衣)를 손수 내려주고 궁녀에게 노래를 부르게 했으며, 이후에도 두 사람이 만날 때마다 삼장사의 노래를 부르게 했다’고 적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세조가 그를 파격적으로 예우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삼장원의 노래’는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필자는 최근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의 문집인 성호선생전집 권8에 삼장원사(三壯元詞)가 실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삼장원사는 7자 20구로 이루어져 있다. 이 노래는 해동악부(海東樂府)라는 책에 실려 있는데, 성호는 당시까지의 우리나라의 악부체 노래 119수를 집성하고 그 유래를 밝혔다. 그 속에 삼장원사가 들어 있는 것이다. 성호집에 실린 이 노래는 악보 없이 가사만 남아 있어 원형에 얼마나 가까운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제목만 남고 내용이 전해지지 않은 것에 비하면 다행스럽다.

저헌의 일생 중에 세종 당시의 명류들과의 사가독서가 주목된다. 진관사는 삼각산에 있는 사찰로 서울 근교 4대 사찰 중의 하나다. 그러나 이곳이 세종 때 집현전 학사들이 모여 독서하던 유서 깊은 장소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세종24년(1442)에 저헌은 하위지(1412-1456), 이개(1417-1456), 박팽년(1417-1456), 신숙주(1417-1475), 성삼문(1418-1456) 등과 함께 진관사에서 사가독서를 하는 영예를 누린다.

저헌과 문과 동방으로 양성지, 김수온, 강희안, 권항 등 혁혁한 인사들이 들어 있다. 세종29년(1447) 문과 중시의 방을 보면, 저헌은 물론 성삼문, 김담, 이개, 신숙주, 최항, 박팽년, 송처관, 유성원, 이극감, 정종소, 이예, 조섭륭, 이승소, 김증, 이극효, 김예몽, 김통, 정창손 등 청사에 길이 이름난 이들로 가득했음을 알 수 있다.

저헌은 세종 당시 집현전 학사로 키워져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을 국왕으로 모시고 조선 초에서 중기로 이어지는 시기에 나라에 봉사하고 백성들에게 덕화를 폈다.

그의 문집을 보면 애민의식에서 나온 작품들이 여러 편 보인다. 그 대표적인 시가 호야가(呼耶歌)다. 이 시는 서거정이 편한 동문선(東文選)에도 올라 있을 정도로 유명한데, 국가에서 대규모로 토목공사를 시행해 백성들이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는 현실을 풍자했다.

“남에서도 어기여차, 북에서도 어기여차, 어느 때나 이 소리 멎을지”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하늘이 훌륭한 인재를 내려 이 나라의 지도자로 만들고 그가 만백성의 수고를 덜고 피해를 줄여 산골짜기에서 어기여차 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해달라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저헌은 부역꾼들이 이미 여러 때를 굶어 어기여차 소리조차 안 나오는 지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산골짜기에 나뒹구는 백성들 가련하네
아침은 건너뛰고 저녁조차 굶었는데
불쌍해라 허리에는 빈 쌀자루
그러고도 수차 입에 침이 말라서
목은 쉬어 소리조차 나오지 않네
그래서 기진맥진해 넘어지니
황토에 뿌려진 피 여러 사람의 발자국

이러한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유가의 애민의식을 충실히 배워 실천했기 때문이다. 실록에서도 그를 ‘온화하고 순후하다(石亨 性和厚)’고 평하고 있다.

저헌은 집현현 출신 학자로도 유명하지만 누구보다도 전국을 두루 순시하며 백성들의 병고를 살핀 관료로 칭송을 받았다. 그의 문집에는 풍속을 교화하기 위해 전국의 동헌에 남긴 시들이 담겨 있다. 그가 오늘날의 서울시장직에 7년이나 장수한 것도 남다른 현장행정 능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정승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학자와 관료, 목민관, 그리고 탁월한 문장과 시, 글씨로 두루 이름을 날렸다. 성종2년에는 공으로 공신에 올랐고 연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저헌집은 사후 수습이 잘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6차례 간행되었고 2권 2책으로 남아 있다.

다음 회엔 영일 정씨(迎日鄭氏)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종가를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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