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대 종손 정래정(鄭來晶)씨 선친은 독립운동 헌신 '忠節'가문 전통 실천延邊에서 출생… 학문의 길 걷다 무역업으로 입신

서울 송파구는 잠실에 112층짜리 제2롯데월드를 건립해 서울의 랜드마크로 만든다는 희망으로 부풀어 있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의 종가를 찾으면서 언뜻 그것이 생각났다.

역사 인물 중 한국을 대변할 랜드마크와 같은 존재는 누구일까? 요즘 우리 역사 배우기에 대한 관심이 식어 일반인들은 아주 유명한 인물이 아니라면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러니 고려 시대 이전의 인물로 올라가면 더욱 잘 모른다.

그러나 포은 정몽주의 경우는 다르다. 그의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만고의 충신, 또는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라고 대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포은은 ‘한국사의 랜드마크’ 인물이 아닐까 여겨진다.

포은은 고려 말 기우는 나라를 바라보며 어쩔 수 없음을 알면서도 새 왕조로 갈아타지 않고 절의를 지켰다. 때문에 시대가 달라져도 포은은 ‘충절(忠節)의 표상’으로 남아 있다.

‘충절과 효도’라는 전통 가치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가에 대해서는 이론이 분분하겠지만, 포은 종가의 종손을 만나면서 그것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느꼈다. 족보상으로 대수가 10여 대가 아니라 20대 이상을 넘어가면 고려에 닿는다. 포은 종가의 경우 24대를 내려왔으니 유구하기가 이를 데 없다.

종손 정래정 씨
포은의 24대 종손 정래정(鄭來晶, 1957년생) 씨는 중국 길림성 연변에서 태어났다. 충신의 종손이 이국에서 태어난 연유가 먼저 궁금했다. 예상대로 독립운동 때문이었다. 포은이 당했던 것만큼 혹독한 시련이 가문에 닥친 것이었다.

종손의 부친인 정철수(鄭哲洙, 1921-1989) 씨는 ‘고철(高哲)’이란 이명(異名)으로 더욱 유명한 항일 독립투사다. 부친은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71번지에서 정의열과 경주 김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나라 없는 설움을 당했던 그는 1943년 12월 보성전문학교 3학년 재학 중에 학도병으로 강제징집당했다. 천행으로 중국 산둥(山東)성 지난(濟南)의 황군 부대에서 동료 2명과 함께 탈출에 성공해 팔로군에 투항, 44년 3월부터 조선독립동맹 태항분원에 들어갔다. 이름도 고철(高哲)로 고친 후 조선의용군 등에서 항일 무력투쟁을 폈다.

그 후 광복이 되었지만 타의에 의해 귀국하지 못한 채 중국의 문화혁명 와중에 숙청의 아픔을 겪었다. 65년 옌볜대학교 일본어과에서 석좌교수로 복권되었고, 83년 KBS 이산가족찾기 방송을 듣다 고국에서 노모가 애타게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85년에 아들인 현 종손을 데리고 영구 귀국했다.

실로 41년 만의 환국이었다. 꿈에 그리던 독립된 고국 땅에서 포은의 종손으로 산 것도 잠시. 4년 뒤 68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정몽주 초상
“부친께서 하루는 저를 불러 앉히더니 ‘수고천장(樹高千丈) 낙엽귀근(落葉歸根)’이라는 중국 속담을 써서 보여주셨습니다. ‘아무리 큰 나무라 하더라도 결국 낙엽이 되어 거름이 된다’는 글귀였어요. 저는 ‘아, 그래서 아버지께서 귀국을 결심하셨구나’ 생각했죠. 그리고는 중국 대표 사전인 사해(辭海)를 펴시더니, 그곳에 올라 있는 포은 선생을 보여주며 이력에 대해 말씀해주셨어요.”

사람마다 누구나 이 땅에 태어난 나름대로의 소임이 있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잘 인식하지 않을 뿐이다. 종손의 선친의 소임은 무엇이었을까?

우선 포은 선생의 종손으로서의 소임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친은 종손으로서의 ‘작은’ 소임보다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큰’ 사명감을 더 우선시했다. 가학(家學)과 보성전문학교 학생으로 배웠을 올곧은 길을 걸으며 평생에 걸쳐 충(忠)을 실천했다.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기꺼이 고행의 길을 갔던 것이다.

그러다 고국의 고향 땅에 돌아온 후에야 비로소 아들을 불러 앉히고 포은 선생의 종손으로서의 소임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고철’에서 ‘정철수’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부친의 이야기는 <나의 청춘>이라는 제목으로 93년 중국 동북출판사에서 출간된 바 있다.

종손을 만나면서 굴곡 많았던 우리 근·현대사를 생생하게 읽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슴이 뭉클했다. 종손은 부친의 영향을 받아 학문의 길을 걸었다. 옌볜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일문학을 전공해(옌볜대학교 일본어학부 1기생)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중국 대학입시에서 일본어 출제위원으로까지 참여했을 정도니 그의 위치를 짐작할 만하다.

귀국 후 종손은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참여해 당시 추진했던 중국어 대사전의 집필과 교열에 참여했다. 사전을 펴보니 종손의 이름자가 들어 있었다. 출판계에서는 사전을 만드는 일을 미련한 일로 친다. 그중에 더욱 미련한 것은 중국어 사전을 만드는 일이라는 농이 생각났다. 남이 하지 않은 의미 있는 일을 종손이 해낸 것이다.

지금 종손은 18년째 중국을 오가며 제조업과 무역업을 하는 기업인이다. 그럼에도 그의 고향 용인사무실에는 사해(辭海), 전당시(全唐詩), 사서삼경(四書三經) 등 동양 경전이나 고전들이 즐비하다.

뿐만 아니라 휘호와 그림 족자나 병풍, 집기들이 주인의 품격을 대변해주고 있다. 종손이 가장 아낀다는 글씨는 관즉득중(寬則得重)으로 ‘너그러우면 여러 사람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다. 필자는 그 휘호를 보면서 종손으로서 지녀야할 품성 역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부친의 중국에서의 이력을 말할 때 종손의 눈은 빛났고 말투는 웅변조로 바뀌었다.

“작년 9월에 제가 황산에 다녀오면서 상해 임시정부에 들렀습니다. 선친께서 항일 독립운동을 한 형적이 남아 있더군요. 정말로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모금함에 인민폐로 300원 넣고 왔죠.”

“선친께서 연안에 들어가니 무정 장군, 주덕 총사령관, 모택동 주석 등 12명의 원수급 지도자가 있었다고 해요. 무정 장군은 조선의용군을 이끈 분이셨지요. 선친께서는 빼앗긴 조국에 계실 때는 태극기라고는 보지 못했는데, 중국 연안 동굴에서 처음으로 태극기를 보았다고 해요.

일본군에서 탈출해서 찾아온 조선의 젊은 엘리트를 환영하기 위해 그들이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연주해주었으니, 당시에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선친은 그 감격을 잊지 못하고 독립운동에 매진했고 길림성 동부지역군구의 사단장을 지냈을 정도로 뚜렷한 업적을 남기셨어요.”

이야기는 흥미를 더해갔다. 마치 예전에 읽었던 님 웨일즈의 <아리랑>의 감동 그 이상이었다.

“광복된 조국 땅을 밟아보지도 못한 채 한 많은 만주 생활을 하시다 6·25 동족상잔이 일어났어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만약 무정 장군이 북한으로 들어가지 않고 중국에서 지도자로 승승장구했더라면 남북 간에 완충 역할을 해서 그 참혹한 전쟁을 막는데 크게 기여하지 않았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가 포은 선생의 종손이라는 사실을 언제쯤 알았는지 물어보았다.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비로소 포은 선생의 후손임을 알았어요. 위로는 누님이 두 분 계셨는데, 제가 태어난 것을 좋아했어요. 나중에 귀국해서 처음 뵌 할머니께서는 저를 더욱 귀하게 여겨서 ‘중공 손자’라고 하면서 아꼈죠. 아마 종가를 지킬 종손이 될 사람이라서 더욱 그랬을 겁니다.”

귀국 후 종손은 종사를 챙기면서 6년 동안 종토를 찾아봤다. 그때 호적등본을 떼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한다.

“창씨개명인데요, 다른 집도 아니고 충절의 상징인 우리 집에서 남도 아닌 종손이 창씨개명을 해야 하는 사정이었어요. 그런데 선친의 성함이 ‘오천철수(烏川哲洙)’라고 되어 있었어요.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할아버지는 ‘나라가 망해 창씨개명을 하더라도 충신 집안에서 순순히 따를 수 없다’고 생각해서 편법을 쓴 것이죠. 오천은 얼핏 보면 일본식 이름인 것 같지만 실은 예전의 관례로 관향을 앞에 쓰고 뒤에는 그대로 본 이름을 표기했을 뿐이었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대처라고 생각합니다. 저들을 속인 것이지요.”

“가슴 아픈 일은 서울대 법대에 다니던 숙부께서 한국전쟁 때 빨갱이들에게 총살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살아계셨더라면 나라의 큰 지도자가 되셨을 분입니다. 가운(家運)이지요.”

종손은 항일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부친으로 인해 동양 삼국의 문화와 역사, 언어에 모두 정통하다. “저는 레미제라블을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로 모두 읽었어요.”

사업의 성취는 어땠느냐는 질문에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다. “저는 돈도 벌어보았고 또 거액을 날리기도 했어요.” 이어 그간의 역정을 담담하게 소개했다. 현재 중국에 유망한 제조업체를 가지고 있으며, 강원도의 소나무가 너무 아름다워 국립공원 경내에 몇 만평의 땅을 사두었고, 종택을 재건하기 위해 고향 땅에 2천 평의 대지를 마련했으며, 목재도 장만했다고 한다.

“나무가 4년째 마르고 있어요.” 자신이 그토록 꿈꿔온 종택 재건에 착수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읽힌다.

끝으로 종손은 극적인 얘기기 하나를 보탰다. “제가 딸만 두었었는데, 작년 9월 아들 하나를 얻었습니다. 이름은 정조훈(鄭朝薰)이라고 지었어요.” 포은 종가의 종통이 이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종택 가묘의 포은 선생 영당에는 위패와 함께 영정이 봉안되어 향화(香火)를 잇고 있다. 종택에는 선생의 친필 서첩과 국왕의 어제어필 추모 시첩도 함께 보관 중이다.

신도비는 우암 송시열이 찬했고 글씨는 현종 때의 명신 김수증이, 전액은 김수항이 써서 1696년에 건립했다. 묘소 아래의 모현당(慕賢堂)은 재실로 사용하고 있다. 묘소 앞에는 선생의 단심가(丹心歌)와 모친의 시조인 백로가(白鷺歌) 시비가 각각 세워져 있다.

정몽주 1337년(고려 충숙왕 복위6)-1392년(공양왕4)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달가(達可), 초명은 몽란(夢蘭). 시호는 문충(文忠)

고려 말 최고의 정치가이자 문장가… 충절의 표상

문충공(文忠公)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은 경북 영천군 임고면 우항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관례를 치른 뒤 몽주로 개명했다. 19세에 부친상, 10년 뒤 모친상을 당했다.

일반에 알려진 포은의 상징은 ‘충절(忠節)’이다. 포은은 타고난 효자였고 그 행적이 알려져 시묘살이 했던 마을에 ‘효자리(孝子里)’라는 칭호가 남아 있다. 고향 영천에 당시의 비를 볼 수 있다.

선생의 삶에서 충과 효는 표리(表裏) 관계로 별도의 어떤 특별한 갈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이 나라에도 충성하고 주위 사람들과의 약속도 잘 지키며 자식 잘 키우고 부인에게도 잘한다.’ 대략 이런 추론이 가능하다.

선생은 24세(공민왕24, 1360년) 때 장원으로 급제하여 고향을 떠나 개성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대외적으로는 원명(元明) 교체기며 대내적으로는 신진사대부들이 친원파인 권문세족들의 적폐를 척결하면서 성리학을 기반으로 중앙 정치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때였다. 그 중심에 포은이 있었고 다른 축에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와 그 추종 세력들이 위치해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영남의 작은 고을 출신인 포은이 중앙 정치무대와 성리학계에 크게 두각을 나타낸 계기는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과의 만남이었다. 일반인들은 목은 역시 고려 삼은의 한 사람으로 두 사람이 비슷할 거라 생각하겠지만, 포은은 20대에 목은으로부터 학문적인 영향을 받았다.

학문은 물론 정치적으로도 같은 길을 걸었던 두 사람 관계를 엿볼 수 있는 글이 있다. 목은이 지어 포은에게 준 ‘포은재기(圃隱齋記)’라는 것이다. 목은은 서론을 길게 뽑은 뒤 속내를 이내 드러냈다.

“오천 정달가(鄭達可, 포은의 자)가 녹명(鹿鳴, 시경의 노래 이름)을 노래하니 향리의 예악과 문물이 크게 바로잡혔고, 장원(壯元)에 뽑히니 문단의 거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유학의 진리를 주렴계(周濂溪)나 정명도(鄭明道) 정이천(鄭伊川)으로부터 계승하였고, 모든 유생들을 시서(詩書)의 광장으로 이끌어냈으며, 더욱 시를 잘한다는 것으로 당세의 칭송을 받았다. 나라의 폐백을 받들어 중국에 사신으로 간 바 있고, 배를 띄워 일본에도 사절로 다녀온 바 있으니, 그러한 외교적인 임무를 잘 수행한 능력은 평소의 말한 바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다.”

포은은 당대 최고의 정치가요 학자며 문장가로부터 이처럼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이 중에 ‘모든 유생들을 시서의 광장으로 끌어냈다’는 구절이 가슴에 와 닿았다.

퇴계 선생은 모든 사람을 ‘선인(善人)’으로 끌어내기 위해 부단히 애쓰셨다. 전인교육이요 빈부귀천이나 현우(賢愚)를 구분하지 않고 전심전력을 다했다. 퇴계의 학통은 포은에게서 유래하므로 포은은 동방 성리학계의 비조(鼻祖)인 셈이다.

당시 고려 말기에는 이념적으로는 불교가,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권귀(權貴)들이 득세해 유학은 일반인들에게 낯설었다. 척박한 토양에서 선생을 찾아 독실하게 배웠고, 그것을 바탕으로 많은 인재들을 성리학의 장으로 나아가게 한 포은의 공은 실로 위대하다. 다만 그가 키운 인재들 중 상당수가 조선 개국의 주역으로 떠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만든 나라 조선이 성리학에 기반해 문물과 제도를 정비해 찬란한 문화를 창조한 것은 포은의 영향 때문이다. 포은이 목숨까지 바치며 지키려고 했던 고려는 망했지만, 그가 희구하던 진리는 면면히 계승된 것이다.

이것이 포은이 우리 역사에 끼친 ‘불후의 얼’이다. 목은은 글에서 ‘포은이 시골에 은거하며 유도의 융흥과 학자의 사표가 되었다’고 맺었다.

포은은 36세에 서장관으로 중국에 사행했고, 38세에 경상도 안렴사가 되었다. 39세에 성균관 대사성, 41세에 일본으로 사행했다. 이때 포로로 잡혀 있던 수백 명의 백성들을 협상으로 풀어 귀국시켰다.

44세 때는 판도판서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전라도 지역에 출몰한 왜구를 격파했고, 46세에 다시 중국 사신으로 뽑혔으나 요동에 이르러 입경이 불허되어 돌아왔다. 52세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지서연사(知書筵事)가 되었다. 그리고 56세 4월 4일에 절의를 지키다 개성 선죽교에서 피살된다.

포은의 이력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54세 때 받은 최고의 공신호이다. 때는 고려 공양왕2년(1390)이었다. 8월에는 문하찬성사에 익양군(益陽郡) 충의군(忠義君)에 제수되었고 11월에 다시 벽상삼한삼중대광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으로 시작하는 최고의 작위를 부여받게 된다. 이듬해에 다시 안사공신(安社功臣)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작위는 포은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고려의 조정에서 받은 것이기는 했어도 이미 조선 개국 세력의 정치적인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용인에 있는 선생의 묘소 묘전비에 적힌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상식적으로는 자랑스러운 공신호를 적어 길이 종사와 청사에 남겼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공신은 시대에 따라 그 평가가 엇갈리지만 충절은 만고에 불변이다. 그래서 지금도 지방의 유림계에서 ‘우리는 공신(功臣)의 자손이 아니라 충신(忠臣)의 후예다’라고 하며 조상의 벼슬이 못해도 절대 위축되지 않고 당당함을 유지하는 문중을 보게 되는데, 바로 포은이 남긴 교화의 자취다. 돈과 벼슬에 주눅 들지 않고 도를 숭상하며 절의를 지키려는 풍조는 포은의 공 덕분이다.

만고 충신 포은 선생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시 한 수가 있다. 교과서에 실린 작품이다. 제목은 ‘춘(春)’. 서정시의 진수다.

춘우세부적(春雨細不滴)
야중미유성(夜中微有聲)
설진남계창(雪盡南溪漲)
초아다소생(草芽多少生)

봄비 가늘어 빗방울 소리조차 없더니
밤중에 어렴풋이 그 소리 들렸었지
눈 녹아 남계엔 물이 불어 흐를 테니
새싹이 이제야 얼마쯤 돋아났겠지?

천의무봉(天衣無縫)한 시다. 번역이 되레 군더더기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포은 선생의 동상을 본 적이 있다. 1970년 당시 정주영 현대건설 사장의 헌납으로 이루어졌고, 유명 조각가였던 김경승(1915-1992, 개성출신으로 세종대왕상 등 제작 씨가 만든 작품이다. 양화대교 북단 램프 쪽에 위치해 쉽게 볼 수 없는 게 아쉽다. 일본에서도 포은을 추앙해 일본 사이카시(日高市) 성천원에 좌상이 세웠다.

영천 임고서원에 전해오던 선생의 초상화(모두 3점)는 보물 제1110호로 지정되어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제향한 주요 서원

임고서원(臨皐書院)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숭양서원(崧諒朶? 개성시 선죽동(선생이 살던 곳)

충렬서원(忠烈書院)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구강서원(鷗江書院) 울산시 중구 반구2동

옥산서원(玉山書院) 경남 하동군 옥중면 정수리

반계서원(磻溪書院) 경남 울주군 언양면 대곡리

● 용인시 대표적 지역 축제 '포은 문화제'

용인시는 포은 선생의 유덕을 선양하기 위해 2003년부터 포은문화제를 매년 열고 있다. 용인문화원과 포은문화제 추진위원회가 주최하고 영일 정씨 포은공파 종약원에서 물심양면으로 후원한다.

행사에는 매년 후손 2,000여 명 등 연 3,000명 이상이 참여해 성황을 이룬다. 포은문화제는 묘역이 있는 능원리 일대에서 추모제향을 위시해 학술대회와 사진촬영대회, 포은선생천장례(圃隱先生遷葬禮), 학생글짓기대회, 선생 추모 전국한시백일장 등 다채로운 행사를 펼친다. 올해는 선생 순절 615주기가 되는 해다.

다음호엔 덕수 이씨(德水李氏)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종가를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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