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대 종손 이윤용(李允鏞)군, 양자로 들어온 4세 종손… 문중 하나로 묶는 '상징'종가 수호 위해 30대 생부 대외교류 등 '동분서주'

종손은2004년 10월 21일생이다. 강보를 갓 면해 올해로 네 살. 참으로 기막힌 현실이다. 우리 민족 최고의 영웅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 종가의 현재 모습이다. 과연 어떤 일이 있었을까?

충무공 종가를 찾기 위해 대종회에 연락을 취했고 소개를 받아 아산으로 향했다.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100번지. 충무공 종택은 아산 현충사 경내에 고가 형태로 자리잡고 있다.

덕수 이씨 일문이 터를 잡은 지 400년 이상된 유서 깊은 곳이다. 여기에는 충무공이 생시에 떠서 마신 우물물도 남아 있다. 물론 충무공은 맏아들이 아니어서 엄밀히 따지면 이곳은 아버지 집이며 형님 집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종가가 되었다.

사전에 짐작은 했지만, 안내판에 종가라고 소개되어 있는 현충사 경내의 충무공 종가는 비어 있었다. 종가는 현충사 주차장을 끼고 돌아 뒷마을 사원 사택 안에 양옥 형태로 지어져 있다.

사택에서도 종손을 만나지 못했다. 일이 있어 훗날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재차 아산 현충사를 방문하여 종손의 작은아버지 이재엽(李載燁, 1970년생) 씨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종손의 생부였다. 자신의 아들을 15대 종손이었던 형님 이재국(李載國, 1937-2002) 씨의 뒤를 이어 종가에 입후시켰기 때문이다.

종손 이윤용
종손으로서의 최대 소임은 봉제사 접빈객. 제사 때는 초헌관이 되며 첫 잔을 올릴 뿐 아니라 제사를 주관하는 역할을 맡는다. 또한 오는 손님을 송영하는 역할도 담당해야 한다. 그런데 종손은 이제 겨우 네 살이기 때문에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지는 못하고 있다.

종가 이야기는 종손의 생부요 15대 종손의 아우인 이재엽 씨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이재엽 씨는 14대 종손의 만득자(晩得子)로 태어나 천안고, 순천향대(89학번)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현재는 아산 현충사에서 ‘노느매기’라는 휴게소를 운영하고 있다.

‘이웃과 이웃이 더러 힘들 때 돕고 사랑하여, 여럿이 모여 음식을 먹으면서 나눔, 즉 노누며 나누고 노나 먹었다는 뜻입니다’. 휴게소 테이블마다 노느매기의 이름을 풀어 두었다.

15대 종손은 이재국 씨다. 그는 경기고 52회 졸업생으로 고건 전 총리,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이종찬 전 의원과 동기다. 연세대 법대 3학년 재학 중 병환으로 집에서 요양하던 중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버렸다. 더욱 애석하게도 슬하에 한 점 혈육도 남기지 못했다.

14대 종손 이응렬(李應烈, 1914-1993) 씨는 보성전문학교 출신의 엘리트였다. 충무공 종손이라는 자긍심도 남달랐던 그는 “종손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야 한다”는 선친의 말씀 한마디로 모든 꿈을 접고 아산으로 낙향해 평생 충무공의 얼을 현양하고 지손을 돌보며 문중 진작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생부 이재엽
민족의식이 남달랐던 종손은 일제 때 두 차례의 옥고도 치렀다. 당시 금기시되던 우리나라의 역사를 가르쳤다는 죄목이다.

충무공의 종손이므로 민족의식이 남달랐을 것이고 망국이라는 조국의 현실에 참을 수 없는 피가 들끓어 뛰어든 게 역사 교육이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그가 택할 수 있는 최고의 항일투쟁을 한 셈이다.

“선친께서는 붓글씨를 아주 잘 쓰셨어요. 문중 족보 표지 글씨도 직접 쓰셨죠. 비문 글씨를 부탁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어요. 그럴 때마다 조건없이 열심히 써주시더군요.” 대개 비문 글씨는 서예가를 통해서 받을 것 같지만 예전에는 선비나 명망가 또는 종손에게 청하는 것이 관례였다.

더구나 그 대상이 충무공의 종손이면서 글씨까지 잘 썼다면 최고의 인기를 누렸을 터. 중국에서는 공자의 종손 글씨를 받아 걸어두면 아무리 초라한 식당이라도 이내 문전성시를 이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는 종손이 받들고 있는 인물에 대한 존경의 표시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만득자였던 자신이 또 만득자로 얻은 유일한 아들을 종손으로 입후한 사연이 궁금했다.

“이야기가 깁니다만, 제겐 숙명과 같은 것이었기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어요. 형님은 숙환으로 불천위 제사조차 모실 수 없었어요. 더구나 부친 역시 70세가 넘으면서 천식이 극심해 바깥출입이 힘드셨죠.

이순신 영정
그래서 제가 외람되게도 초헌을 대신했습니다. 선친이 93년에 돌아가시고 형님도 2002년에 세상을 버리자 문중에서 양자 들이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습니다.”

“선친께서 88년에 유언을 하셨어요. 네 형이 자손이 없으니 네가 빨리 아들을 낳아 양자를 주어야 한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살았어요.”

이재엽 씨는 딸만 둘이다. 그래서 종손 사후에 문중 어른들에 의해 7촌 질을 양자로 들이게 되었다. 그러자 이재엽 씨는 선친의 유명을 받들어 종통을 잇겠다는 사명감이 되살아났다고 한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16대 (李允鏞) 군이다. 이재엽 씨는 즉시 아들을 형님의 호적으로 입적했고 사후에 문중에 알렸다.

이재엽 씨의 선친은 꼼꼼했다. 혹시 있을지 모를 종통 계승의 불협화음을 우려해 자신의 유언을 유서로 만들어 문중 인사의 확인서까지 첨부해 변호사 공증을 해두었다.

선친의 뜻대로 조카 양자를 통해 충무공 종가의 종통이 극적으로 이어진 것이다. ‘유지자(有志者) 사경성(事竟成)’이라는 성어가 생각났다.

현재 이재엽 씨는 충무공 종가의 ‘보장(保障)이요 울타리’라는 느낌을 받았다. 천안에 살다 형님이 세상을 떠난 뒤 형수 삭녕 최씨를 모시고 사는 이재엽 씨는 경제학과 출신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유가의 제반 범절과 문중 내력, 충무공의 일생에 대해 꿰뚫고 있었다. 속내 또한 깊다.

예전에 반가에서는 아들의 경우 성동(成童)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사랑방 거처를 시작한다. 사랑방에서는 응석이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법도가 서게 되고 문자 및 인성 교육이 이루어지며, 수시로 찾아드는 외객들을 통해 외연을 넓힌다. 학식이 있는 어른을 통해서는 일종의 특강도 듣게 된다. 시쳇말로 ‘인적 네트워크’를 넓히는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그의 대외 교류는 활발했다. 98년 임진왜란 400주년을 기해 한·일 양국 간의 후손들의 만남이 이루어진 적이 있다. 이 행사에 충무공의 후손으로 참여했고, 또 약포 정탁 선생의 후손가와도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아울러 올해 5월 서애 유성룡 선생 서세 400주년 기념행사에도 적극 협조하고 있다.

현충사를 떠나며 16대 종손이 반듯하게 자라 초헌관으로 제청에 당당하게 섰다는 소식을 듣게 될 날은 언제쯤일지 기다려졌다..


▲ 충무공 이순신 1545년(인종1)-1598년(선조31)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 군호는 풍덕부원군(豊德府院君).
불멸의 장군… 난중일기엔 구국의 얼 절절

시호교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덕수(德水) 이씨(李氏)로 1545년 3월 8일 서울 건천동(乾川洞)에서 태어났다. 덕수는 경기도 개풍군(開豊郡)에 있던 지명이다.

젊어서 무예를 배웠고 1576년(선조9) 32세에 무과에 급제했다. 젊은 시절 함께 자랐던 서애 류성룡은 진작 그를 ‘대장감’으로 점찍었다. 이 후 여러 관직을 거쳐 45세에 정읍현감, 47세에 진도군수와 전라좌도(全羅左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되어 이듬해 4월 임진왜란을 맞았다.

49세에 삼도수군통제가가 되어 수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53세 때 모함을 받고 백의종군했다. 이어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혁혁한 군공을 세웠다.

선조31년(1598) 54세 11월 19일 왜적과 교전 중 유탄에 맞아 진중에서 전사해 선영이 있는 아산에 묻혔다. 향년 54세. 사후에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책훈되고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받았고 광해군5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이것이 대략적인 장군의 이력이다.

조선 시대의 최고의 업적을 남긴 군주 가운데 정조가 있다. 정조가 더할 나위 없이 존경한 인물이 있었으니, 비명횡사한 자신의 부친 사도세자와 재조(再造)의 공을 세운 충무공 이순신이었다. 정조는 친히 신도비명을 지어 기렸는데 이 글이 문집인 홍재전서 권15에 올라 있다.

그런데, 같은 책 일득록(日得錄) 훈어(訓語)에 보면, “친히 충무공 이순신의 비명을 짓고 전수(篆首)를 ‘상충정무지비(尙忠旌武之碑)’라고 하였다.

하교하기를, ‘충신의 비문은 마땅히 충신의 글자를 써야 하니, 안진경(顔眞卿)의 가묘비(家廟碑)를 집자(集子)하여 새기도록 하라’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정말 사려깊고 감동적인 장면이다. 이를 통해 정조가 충무공의 신도비를 짓고 또 세우려 했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바로 ‘충(忠)’을 진작하기 위함이다.

‘안진경’이라고 하면 붓을 한 번이라도 들어본 사람들이라면 익숙한 인물로, 그는 중국 당나라 때의 인물이다.

그가 역사에 이름이 남은 것은 글씨 때문이지만, 그와 함께 안녹산과 사사명이라는 당시의 큰 반역자들을 다스리는데 큰 공을 세우고 난중에 순국한 인물로 공훈과 예술적 성취로 함께 이름을 날렸다. 그는 집안이 가난해 종이와 붓이 없어 담벽에다 황토로 글씨를 익혀 해서로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의 글씨는 중국에서 당나라부터 명나라까지 1,000여 년 이상을 과거시험장의 중심 서체로 사랑을 받았으며 우리나라 역시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정조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인지해 특별히 그가 남긴 글자에서 뽑아 비석을 세우라고 명했다. 지금 우리는 이 비명(碑銘) 목판본을 이충무공전서 첫 권에서 만날 수 있다.

임진왜란의 1등공신으로 세 사람이 있다. 이순신, 권율, 원균이 그들이다. 그러나 당대뿐 아니라 후대에 임진왜란의 공적 평가는 엇갈린 면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원균이다. 임진왜란 후에 공신은 3종류로 나누어졌다. 서울에서 의주까지 시종 어가를 모신 사람을 호성공신, 왜적을 토벌한 제장과, 군량을 주청하러 간 사신들을 모두 선무공신, 이몽학의 난을 토벌한 이들을 청난공신으로 삼은 것이다. 그중 선무공신 1등에 위의 세 사람이 들어 있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때 세운 공이 최고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겠다 생각하겠지만 전쟁 중이나 사후에 모두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선조30년(1597년)에 모함을 받아 감옥에 들어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사면을 받아 백의종군한 사실이다. 같은 해 6월 원균 장군이 싸움에서 패해 전사한 뒤 풀려나 8월 삼도수군통제사가 됨으로 명예가 회복되었다.

충무공 사후엔 성호 이익조차도 임진왜란의 공을 논하면서 중국 장군이었던 석성(石星)을 1등으로, 그리고 이순신을 2등으로, 심유경(沈惟敬)을 3등으로 평가했다. 그외 나머지 조그마한 승패는 계교할 것이 못 된다고 적고 있다. 심유경은 명나라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와 3국 간의 휴전회담을 주도했다. 그는 농간을 부려 정유재란의 빌미를 제공한 장본인이다. 그런 인물을 3등 공신으로 넣고 있는 것이다. 헷갈린 평가다.

그리고 광복 후 충무공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 성웅(聖雄)으로 거듭난다. 서울 도심 세종로에는 충무공의 동상이 당당하게 서 있다. 어떤 이들은 세종로에는 응당 세종대왕 동상이 서 있어야 하기에 충무공 동상을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성급한 듯하다.

충무공 동상은 서울대 미대 김세중(1928-1986) 교수에 의해 제작되어 68년 4월 27일 현 위치에 건립되었다. 애국선열 조상건립위원회와 서울신문사가 공동으로 주관했다. 세종로에 충무공 동상을 세운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 때문. “세종로 거리에 일본이 가장 무서워 하는 인물을 동상으로 세우라”는 것이 요지였다.

충무공의 유품 중에는 난중일기(亂中日記)와 장검이 현충사 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충무공의 구국의 얼을 충분히 엿볼 수 있는 유품이다.

1594년 장군 막하의 군관과 대장장이에 의해 제작되었던 이 칼에는 흥분될 만한 구절이 특유의 초서체로 새겨져 있다. 칼이 겉으로 드러난 현재의 상(像)이라면 거기에 적힌 명문(銘文)은 충무공이 꿈꿨을 ‘불멸의 정신’일 것이다.

삼척서천(三尺誓天) 산하동색(山河動色)
일휘소탕(一揮掃蕩) 혈염산하(血染山河)’

(석자 되는 칼 들고 맹세하니, 산하가 두려움에 떨고
한 번 휘둘러 저들을 소탕하니, 산하를 피로써 물들였네)

참으로 당당하고 섬뜩하기까지 한 내용이다. 명문(銘文) 형태의 이 글은 자신에 대한 암시요 맹세였다. 충무공은 문무를 겸비했고 또 선비로서의 확고한 지조를 지녔다.

율곡 이이 선생은 충무공과 일가일 뿐 아니라 촌수도 그리 멀리 않은 지친이다. 당시 율곡이 이조판서에 있을 때 서애 류성룡을 통해 장군을 면담하고자 했다. 그러나 “문중 사람이니 만나도 괜찮겠지만, 인사권을 가진 자리에 있으니 만나서는 안 된다”며 거절한 일화는 유명하다.

난중일기는 충무공이 임진왜란 중에 약 7년간 쓴 진중(陣中) 기록이다. 초서체의 유려한 필적으로 쓰여진 이 일기는 모두 7책 205장 분량이다.

임진(1592), 계사(1593), 갑오(1594), 병신(1696), 정유(1597), 무술(1598)년 일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일기가 난중일기로 명명된 것은 정조19년(1795) 왕명으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편집 간행하면서부터다. 난중일기는 서애 류성룡이 쓴 징비록(懲毖錄)과 함께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데 최고의 사료다. 그리고 또 이들 책은 일본인들에게 보여서는 안 될 최고의 금서(禁書)이기도 했다.

그런 가치를 지닌 일기가 지금까지 정본(正本)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또 번역상의 문제까지 제기되고 있다는 점은 유감이다. 다만 근자에 충무공전서에 대한 고증과 번역 작업이 함께 진행되어 이미 책으로 출판된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충무공전서는 정조의 왕명을 받아 규장각 각신 윤행임(尹行恁) 등이 참여해 편찬했고 이를 다시 운각(芸閣)에서 검서관 유득공(柳得恭)의 감인 하에 금속활자본으로 간행했다.

“경을 알고자 한다면 이 전서를 볼지니 혁혁하고 빛나는 글들이 열 네 편이나 된다네. 전쟁의 공적을 이루었고 합변의 형세를 알았으며 거북선을 만들었으니 기러기 우는 바닷가였네.” 통영 충렬사의 국왕인 정조 치제문 끝부분의 명문(銘文) 일부다. 충렬사는 충무공전서를 반포하고 그중 한 본을 이곳에 보관하게 한 뒤 제사를 드린 장소다.

다음 호엔 순천 김씨(順天金氏) 북저(北渚) 김류 종가를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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