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권자의 지적재산권 지킴이 "특허의 생명은 '선점'… 2등은 존재하지 않죠"법과 논리, 문서의 전문가들 "지구상의 모든 것이 특허 대상"날짜·시간에 대한 압박감은 변리사 공통의 스트레스

‘한 글자에 1,000만원씩, 두 글자에 총 2,000만원 배상.’

1990년대 후반, 모 영화사가 영화 타이틀 에 모 교수의 창작 글꼴 두 글자를 무심결에 베껴 썼다가 법정 소송에서 선고받은 배상금이다. 사실 도용의 주범은 영화사가 아니라 타이틀 디자인 제작사에 있었다. 디자인회사는 타이틀에 쓸 서체를 고민하던 중 미술대전의 도록에서 이 글꼴을 발견하고는 도용해 납품했다가 영화사를 ‘글자 도둑’으로 내몬 꼴이었다.

“하늘 아래 모든 게 특허 대상입니다. 변리사는 그러한 특허권자의 지적재산권을 등록하고 지켜주는, 발명의 완성자이자 관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바른 국제특허법률사무소’ 남호현(54) 대표는 20여 년간 특허 분야에 종사해 온 베테랑 변리사이다. 영국의 저널지 ‘Euromoney Publications PLC'로부터 ‘1996년 세계의 지도적 상표법 전문가’로 선정되었던 그는 현재 아시아변리사회본부 상표위원회 위원장으로도 활약 중이다.

변리사는 의술(醫術)과 같은 특정 분야를 제외하고는, 상표나 상품에서부터 기술 노하우, 심지어 고객 명단에 이르기까지 유·무형의 대상물에 대해 발명자들의 권리 및 도용 분쟁의 대리 업무를 맡는 이들이다. 수임받는 사건의 성격만 다를 뿐 ‘특허계의 변호사’나 다름없다. 남 대표는 지적재산권 중에서도 특히 상표와 디자인 분야를 전문적으로 맡고 있다.

새벽 5시 반에 어김없이 일어나, 오전 8시가 되면 이미 그는 사무실에 앉아 있다. 팩스와 이메일에는 간밤에 밀려든 의뢰 신청서나 답변서 등이 잔뜩 쌓여있다. 당장 처리해야 할 이메일만 매일 아침 평균 50건. 사무소에 직접 찾아온 고객들을 직접 상담도 한다. 전화 상담까지 몰리면 더더욱 쉴 틈이 없다.

특허출원 1건당 평균 9.8개월 소요

남 대표의 사무소에는 각 전문분야별로 총 10명의 변리사가 있다. 누군가 특허 출원을 위해 찾아오면 고객의 생각과 발명품을 철저하게 파악한 뒤, 정해진 양식에 맞춰 문서화 작업부터 시작한다. 의뢰인은 기업인, 거리의 열쇠공, 가정주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특허청에 제출할 서류를 준비하면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기술명세서를 작성할 때다. 기술명세서는 발명자의 권리에 뼈대와 살을 만들고 울타리를 치는 지적재산권의 기초공사에 해당한다.

행여 나중에 무단 도용 등 권리 침해를 당할 경우를 대비해 최대한 견고하게 울타리를 세워야 한다. 발명품의 용도와 구성, 작용, 효과 등에 대한 모든 것을 세세히 기록하는 기술명세서는 1건당 대개 30페이지 안팎이다. 많을 때는 600페이지까지 이르기도 한다.

제출 시한을 단 하루 앞두고 다급한 의뢰가 들어올 때도 있다. 이럴 땐 변리사들은 초비상이다. 분량이 너무 많은 데다 특히 영문 서류로 작성해야 하는 경우엔 전공을 막론하고 사무소 내 모든 변리사들이 달려들어 꼬박 밤을 새기도 한다. 내용 정리하랴, 영문으로 바꾸랴, 서류로 다듬으랴, 촉박한 시간에 따른 압박감과 스트레스가 이들의 머리를 짓누른다.

특허의 생명은 시간싸움. 아무리 위대한 발명품이라도 누군가 단 1초만 앞질러 등록해버리면 이쪽의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된다. 특허에 관한 한 2등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른 스트레스는 상상을 넘어선다.

출원 신청 후 약 6개월이 지나면 특허청에서 회답을 보내온다. 발명자의 희비는 이때부터 갈린다. 내용이나 서류상 별 문제가 없을 경우에는 바로 ‘등록 결정’ 통보가 오지만, 반대로 어떤 문제가 있을 경우 심사관으로부터 ‘의견서’를 제출하라는 통보가 온다. 의견제출 통지서를 받게 되는 비율은 전체 신청 건수의 약 30%에 이른다. 이때는 이전 서류보다 더 치밀하게 의견서를 만들어 제출해야 한다.

얼마 뒤 ‘등록 결정’ 최종 답변을 받으면 그제서야 발명자도, 변리사도 마음을 놓는다. 별도의 계약이 없는 한, 변리사의 특허출원 대리 업무는 여기에서 끝난다. 소요되는 시간은 출원 1건당 평균 9.8개월. 그나마 최근 행정절차 간소화로 대폭 단축된 시간이 그 정도다.

한 달에 2, 3건은 특허권을 둘러싼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뛰어다닌다. 특허 분쟁 현장은 여느 형사·민사 재판 못지않게 제소자와 피소자 간에 불꽃 튀는 공방이 벌어진다.

남 대표는 며칠 전에도 특허법원에 다녀왔다. 유명 신발회사 측의 의뢰를 받아 신발 디자인과 구조를 도용한 혐의로 모 업체를 제소한 상태다.

이러한 분쟁 사건을 맡을 때면 늘 느끼는 것이 있다. “의뢰인이 처음 특허출원 등록 절차를 밟을 때 특허 청구 범위를 왜 이렇게 허술하게 기재했을까 생각하면 안타까워요. 이런 특허권 침해 분쟁을 대비해서라도 출원 때 기술명세서를 반드시 신중하고 치밀하게 작성해야 합니다.”

변리사 대 변리사의 대리전쟁

사실상 특허 분쟁은 제품 자체가 아닌 서류 대 서류, 변리사 대 변리사 간의 대리 전쟁이나 다름없다. 법정에 선 양측 변리사들의 공방이 워낙 치열하다보니 1시간으로 정해진 변론시간이 걸핏하면 2시간을 넘기기 일쑤다. 승소율은 변리사의 명예와 생존과도 직결된다.

침해당한 쪽이든, 침해한 쪽이든 변리사 입장에서는 자신이 수임한 사건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부담감이 크다. 궁극적으로 특허 분쟁의 승패는 어느 쪽이 특허 침해 여부를 밝혀줄 증빙 자료를 더 많이 확보하고 있고 더 철저하게 준비했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2년 전 대기업으로부터 의뢰받았던 도메인 분쟁 사건의 기억도 그에게 아직 또렷하다. 당시 자동차 회사 회장의 영문 이름을 그대로 표기한 '00.com'과 ‘00.net'을 개설한 사람이 있었다.

이를 본 회사 측은 이 2개의 도메인을 모두 자사 소유로 넘겨받기를 원했다. 원칙적으로 사실상 해결 불가능한 주문이었다. ‘.com’, ‘.net’으로 끝나는 사이트는 먼저 도메인을 등록한 사람이 독점권을 인정받을 수 있어서다. 이를 회수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유엔 산하기구인 세계 지적재산권기구(WIPO)를 통해 소송이 진행됐습니다. 관계법상 도메인을 찾아오기 위한 가장 필수적인 요건은 ‘(해당 도메인이) 신청인의 상표나 상호라야 된다’는 조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엔 상표나 상호가 아닌 개인의 이름이다보니, 참으로 애매한 상황이었죠. ”

남 대표는 회장의 이름이 사실상 회사를 상징하는 상표나 다름없는 효력을 갖고 있음을 증명하기로 전략을 세웠다. 이를 위한 증빙자료 확보가 관건이었다.

과거 언론 보도 자료들에서부터 회장의 수상 경력, 심지어 회사의 매출 실적까지 회장의 이름이 들어간 자료를 최대한 수집했다. 이 후 자료들을 종합해 다시 문서화했다. 소송 장소가 외국이다보니 변론도, 대화도 모두 영어로 진행했다. 2005년 9월에 의뢰받은 이 사건은 약 3개월 뒤인 12월에 결국 회사 측의 승소로 막을 내렸다.

“판결 후 받은 영문 결정문 분량만도 아주 작은 글씨로 A4용지 11장이나 되었어요. 변리사로서 큰 보람을 느끼게 해 준 사건이었죠.”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의 전 수석디자이너의 이름을 딴 유명 패션브랜드 분쟁 사건도 있었다. 원래 영국에서 제기된 이 라이센스 분쟁은 당시 이 일을 의뢰받은 특허사무소에서 패소 확률 90%선까지 곤두박질친 뒤, 최악의 상황에서 남 대표에게 조언을 구했다.

남 대표가 문득 이와 유사했던 분쟁의 판례를 상기하며 해결법을 알려줬지만, 얼마 뒤 다시 전화를 걸어온 영국 측 특허사무소에서는 “도저히 그런 자료를 찾아낼 수가 없다”며 사실상 포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분명 뭔가가 있긴 있을 거란 생각에, 어느 날 전 직원을 동원해 대형 서점에서부터 청계천 헌책방까지 샅샅이 뒤지게 했어요. 그래서 우연히 그 브랜드가 소개된 ‘세계의 일류품 대도감’이란 책을 대형서점에서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승부수였다. 이 도감을 법원에 제출하면서 사태가 역전돼 영국 특허사무소 측의 승소로 극적인 반전을 맞았다.

“마치 말기 암환자를 살린 기분이었습니다. 모두가 다 포기한 상황에서, 더구나 의뢰인이 시킨 것도 아닌데 제 스스로의 판단을 믿고 진행한 것이 결국 좋은 결과를 가져왔기에 무척 기뻤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한 순간이었습니다. ”

전문직 중 최고 소득직종

<21세기에는 지적재산권으로 승부하라>는 책을 쓴 남 대표는 현재 전경련 국제경영연수원에 특허 관련 내용으로 8년째 강의 중이다.

매년 발표되는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변리사는 국내 전문직 중 연간 평균 소득 랭킹이 1위이다. 수요에 비해 변리사 수가 아직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변리사 자격을 얻는 것은 아직까지는 쉽지 않다. 필기시험에 통과하더라도 합격자는 먼저 1년간의 수습기간을 거친 후에야 정식으로 변리사 자격증을 받는다. 수습기간의 연봉은 3,000만~4,000만원선으로 고액. 정식 변리사가 되면 연봉은 4,000만~5,000만원에서 시작한다.

< 변리사가 되려면 >

매년 한 차례씩 자격시험이 실시된다. 학력에 상관없이 누구나 응시할 수 있다. 3월의 1차 객관식 시험에서는 산업재산권법, 자연과학개론, 민법개론 등을 치르고, 8월의 2차 주관식 논술형 시험에서는 선택 1과목과 특허법, 상표법, 민사소송법 필수 3과목을 치른다. 영어 실력은 필수다.

이밖에 특허청 공무원으로 7급 이상 10년 경력자는 1차 시험이 면제되고, 5급 이상 5년 경력자는 1 차 시험과 2차 시험 일부가 면제된다.


글, 사진 정영주 pinplus@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