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배우기 위해 이역만리 미국에 온 지도 벌써 9개월. 처음에는 사막에 불시착한양 사방이 막막하더니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 오히려 지나온 시간이 쏜살임을 실감한다.

남들보다 늦게 어학연수를 결심했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이곳에 오기 전엔 고민도 많았다. 귀국하면 대학도 졸업해야 하고, 직장도 구해야 하는 등 또 다른 불확실성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음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어쨌던 어학연수를 시작한 것은 잘한 선택인 것 같다,

미국의 문화를 체험하고, 여행도 다니고, 여러 나라에서 온 친구들과 토론하고 사귀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상당히 넓어졌다는 느낌이다. 한국에만 있었으면 아직도 우물안 개구리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물론 적지 않은 비용이 드는 건 사실이지만 젊은 시절엔 한번쯤 투자해볼 만한 가치는 있다고 생각한다.

1년 예정으로 떠나왔으니 앞으로 남은 기간은 3개월. 지나온 날들을 되돌아보면서 나와 같은 길을 걸어올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어학연수 9개월 체험기’를 쓴다.

친구사귀는 법

어딜 가나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친구를 사귄다는 게 쉬운 일일까마는 이국 땅에선 좀 다르다. 외롭다보니 서로가 의지할 데를 찾는다. 때문에 의외로 다양한 친구를 만날 수 있다.

친구를 사귀는 별다른 비법은 없다. 말이 안 통하니 서로 마음으로 통하는 게 가장 좋다. 그저 잘 웃어주고 인사 잘하는 것이 최고다. 솔직히 찡그린 사람에게 누가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걸겠나.

그러니 열린 마음으로 접근해야 한다. 인종적, 문화적 편견을 가지고 외국인을 대한다면 절대로 친해질 수 없다. 열린 마음과 선한 웃음으로 대하면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는 곳이 외국이다. 나도 그렇게 해서 아시아인은 물론 유럽권 학생들과 친할 수 있었다.

다만 주의할 점은 같은 한국인과의 만남은 절제하라는 것이다. 어디를 가든 한국인이 많다보니, 한국인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술마시고 다음날 강의에 빠지는 유학생을 자주 봤다. 한국인과 사귀지 말라는 말은 아니지만 이곳에 온 목적을 생각해 자신을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

영어 공부

다른 나라 학생들을 많이 만나 영어로 대화하다보면 회화는 자연적으로 많이 늘게 된다. 통하는 말이 영어밖에 없으니 그럴 수밖에. 처음에는 손짓발짓 다해가면서 얘기 했었지만 차츰 나아져 이제는 대화하는데 큰 어려움을 못 느낀다. 내가 봐도 뿌듯하다. 특히 일본인 친구가 영어를 잘해서 많이 도움을 주었다. 대화할 때마다 틀리는 곳을 지적해주어 회화 실력을 빨리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다.

영어듣기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미국에 온 초기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 TV조차 멀리했다. 봐도 골치만 아팠으니까, 내가 여기 왜 왔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근데 시간이 약이라고 지금은 자막없이 봐도 어느 정도 알아 들을 수 있다. 어학원 강사도 영화볼 때 자막 없이 감상하는 것이 듣기 실력을 늘리는 데 낫다고 조언해주었다. 물론 처음에는 답답해서 자막을 보면서 영화를 보곤 했지만 잘 들리지 않아도 자막없이 꾸준히 영화를 본 덕분에 귀가 뚫린 것 같다.

여행

3개월 뒤 귀국했을 때 어학연수 동안 뭐했어 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여행!” 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것 같다. 짧은 기간이지만 여기에 와서 정말로 많이 돌아다니며 다양한 것을 보고 배우고 느꼈다.

아무래도 땅덩어리가 넓다보니 같은 미국이라 해도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게 느낌이 다가왔다. 그중에 가장 인상에 남는 도시는 씨애틀과 보스턴이다. 보스턴은 유럽풍으로 약간 이색적인 도시였는 데다 처음 도착하던 날의 날씨를 결코 잊을 수 없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던 날씨는 고국의 비온 뒤 가을 하늘을 연상케 했다. 시애틀은 방문할 3일 내내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듣고 실망했지만 신기하게도 내가 머무는 동안에는 날씨가 너무 좋았다. 더구나 랜드마크타워인 360도 전망대 ‘스페이스 니들’에서 바라본 야경은 너무도 황홀했다. 잠 못 드는 시애틀의 밤은 허명이 아니었다.

나의 편견일는지는 모르겠다. 도시를 여행하며 받는 첫인상은.도착했을 때의 날씨가 많이 좌우하는 것 같다. 날씨가 맑았다면 다시 가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시애틀과 보스턴은 매력적이었지만 반대로 캐나다의 밴쿠버는 나쁜 추억을 남겼다.

밴쿠버를 여행하던 3일 내내 비가 오고, 바람은 세차게 불고, 거기다가 춥기까지 했으니 어디 다시 가고싶으랴. 무엇보다도 주변 풍경이 한국에 왔다는 느낌을 들게 해 실망스러웠다.

여기저기 자주 들리는 한국말과 군데군데 눈에 띄는 한국어 간판 등 여기가 다른 나라라기보다는 한국의 어느 도시가 아닐까 하는 인상이 더 강했다. 내가 여행 다녔던 곳 중에 가장 많은 한국인을 본 곳이 바로 밴쿠버였다. 물론 한국의 힘을 실감해 뿌듯하기도 했지만.

미국에서 보낸 9개월이 시간적으로야 짧다고 할 수 있지만 다양한 경험을 통해 사유의 폭을 넓히게 된 점에서는 의미있는 긴 기간이었다고 자부한다. 그래도 뭔가 2%가 부족함을 느낀다. 그것은 남은 3개월의 시간으로 채우고자 한다. 귀국 후엔 한층 성숙해진 나를 기대하면서.

김은정 통신원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거주)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