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작품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들어가기 전에 : 고등학교 음악 교과서 어디를 뒤져도, 인용할 만한 문장을 발견하지 못했다. 대신 재밌는 사실을 한 가지 알았다. 모든 음악 교과서의 맨 앞에는 ‘애국가’가 실려 있었다. 글을 읽기 전에, 애국가를 한 번 읊조리시길. 꼭! 4절 까지.

미술작품은 30분의 1로 축소해서 감상해도 대강 그 의미를 살펴볼 수 있지만, 30분짜리 음악을 30초 안에 듣기 위해 재생 속도를 빨리 하면, 그것은 음악이 아니라 소음이다. 이처럼 시각 예술과 청각 예술은 그 존재 방식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에서 접근을 해야만 한다.

음악은 시간적이지만, 미술은 공간적이다. 음악 현상과 음악 경험은 한정된 시간 속에서만 일어나도록 제한된다. 제한된 시간 안에 끊임없이 들려오는 음의 움직임을 듣는 경험은 대상이 고정된 채 일어나는 시각 예술 감상자의 경험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음악은 그것이 연주되는 짧은 순간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언제나 ‘과거의 사건’으로 인식된다. 마치 안개 속을 거닐 때는 그나마 선명하게 보이던 주위의 사물들이 안개를 벗어나면 보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음악을 듣고 있는 순간에는 분명한 ‘음악의 존재감’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불분명하고 막연한 것으로 남게 된다. 반면, 회화는 언제나 특정한 공간을 차지하며 존재한다.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벽에 걸려 있던 그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음악의 독특한 현상적 특징인 ‘시간성’은 예술의 여러 장르 안에서 음악의 위치를 고유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재미있는 질문을 해 볼 수가 있다. 예를 들자면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은 ‘어디에’, ‘어떻게’ 있는가?”

이 질문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어디에 어떻게 있는가?’라는 질문과 확실히 다르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모나리자>는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라고 대답할 수 있지만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그런 식으로 대답할 수 없다.

이 엉뚱한 질문을 일반적인 음악작품에 대한 질문으로 바꾸어본다면 “음악 작품은 어디에 존재 하는가?”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작곡가가 의도했던 ‘음악 작품 자체(M)’와 그것을 기록해 놓은 ‘악보(S)’, 그리고 개별적인 ‘연주(P)’들 사이의 관계를 명확히 해야만 한다.

우리는 모나리자(좌)의 축소판을 보고도 ‘대충’ 감상할 수 있지만, 베토벤의 친필 악보(우)를 아무리 뚫어져라 쳐다보아도, 그의 교향곡이 어떤 음악일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악보에 기록되어 있는 기호들은 모두 특별한 기능을 수행하도록 고안되었다. 음표들은 음의 길이와 높이를 나타내 주고, 또 다른 기호들은 셈여림, 리듬, 박자 등을 나타낸다. 결국 악보는 그것이 ‘지향’하는 음악 작품의 가장 중요한 특징들을 담아놓은 하나의 흐릿한 ‘기억’에 불과하다.

그 기억은 연주자들에 의해서 회상되고 연주를 통해 재현된다. 그러므로 악보는 기나긴 수학 공식의 증명 과정처럼 한 군데라도 잘못 기록되거나 수정을 가하면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고 만다. 그러나 앞에서 예로 든 <9번 교향곡>의 악보는 베토벤이 진정으로 의도했던 <9번 교향곡>에 대한 기억이긴 하지만 <9번 교향곡> 자체는 아니다. 달리 말해서 ‘9번 교향곡의 악보(S)’는 <9번 교향곡>(M)을 ‘지향’하고 있지만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악보에 적힌 기호들을 실재하는 음들로 재현하는 연주는 어떨까? 작곡을 하거나 즉흥연주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모든 연주는 ‘악보’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9번 교향곡>의 연주는 ‘9번 교향곡의 악보’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러나 연주는 악보에 기록된 기호들을 음들의 움직임으로 드러내 보임으로써 악보가 지향하고 있는 ‘음악적 가치’에 도달하고자 하기 때문에, ‘9번 교향곡의 악보’ 보다는 연주가 <9번 교향곡>에 근접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음악 작품’에 대한 연주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필연적으로 매번 다른 연주일 수밖에 없다. 이 점이 ‘악보(S)’보다 ‘연주(P)’가 ‘음악 작품’에 근접할 수 있는 이유임과 동시에 ‘연주(P)’가 ‘음악 작품(M)’이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서울 시립 교향악단이 2007년 4월 17일에 세종문화회관에서 오후 3시와 7시 두 번에 걸쳐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연주한다고 가정하자.

이 때, 3시의 ‘9번 교향곡 연주(P1)’와 7시의 ‘9번 교향곡 연주(P2)’는 비슷할지는 몰라도 서로 다른 두 개의 연주이다. 설령, 둘 다 같은 악보를 바탕으로 <9번 교향곡>을 재현했을지라도 실제로 그 두 번의 공연은 전혀 다른 ‘음악적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상식적인 경우라면 두 번의 공연을 모두 <9번 교향곡>을 연주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두 번의 연주 모두 같은 악보를 바탕으로 오랜 시간 연습한 숙련된 연주자들에 의해 연주되었기 때문일 뿐이다. 만약, 3시에는 아마추어 교향악단이 연주하고, 7시에는 서울 시립교향악단이 연주했다면 비평가가 아니더라도 “3시의 연주는 <9번 교향곡>이 아니었어!”라고 혹평할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우리가 같은 악보를 연주하더라도, 각각의 공연이 실제로는 매번 다른 ‘음악적 가치’를 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음악 작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음악 작품은 ‘순수하게 지향적 대상’으로 존재하지만 경험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도식을 그려볼 수 있다.

작곡가는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음악 작품을 음악 기호들을 이용해서 옮기려고 최대한 노력한다. 연주가는 연주를 통해서 처음 작곡가가 의도했던 작품을 재현하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작곡가가 아무리 이상적인 음악을 마음에 품고 있다고 해도, 음악 기호는 음들의 움직임을 기록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음악을 악보화하는 순간 이미 일차적인 왜곡이 일어난다.

또한 연주자가 악보를 실제의 음들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차적인 왜곡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음악 작품이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이 되어 버린다. 이런 이유에서 음악 작품은 일종의 이데아로 남아있게 된다.

그러나 위와 같은 생각은 ‘음악 작품(M)’이라는 것이 정말로 어딘가에는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에 의해 지지될 뿐이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가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헛소리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 허무맹랑하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음악 작품’에 부여된 특권적 지위를 박탈해 버리고, 각각의 연주들 모두가 독립된 ‘음악 작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지금까지의 논의는 모두 공허한 지적 유희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오른쪽 도식 참조). 이런 관점에서는, 개별적 연주들 사이의 차이만 있을 뿐, 지향해야 할 원본 따위는 없다.

또한 위의 도식에는 음악 경험의 주체인 감상자가 빠져 있다. 감상자의 입장에서는 작곡가가 염두에 둔 지향 대상으로서의 ‘음악 작품’은 큰 의미가 없다. 감상자는 음악 작품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바를 충족하면 그만이다. ‘음악 작품’에 대해서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지금 졸음을 쫓기 위해서 음악을 들을 뿐이다.

이 밖에도, 복제된 연주를 감상하는 것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위의 도식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기술 복제 시대에는 똑같은 연주를 무한 반복해서 듣는 음악 경험이 지배적이다. 즉, 연주는 하나이고 감상 행위만 무한하다. 하나의 답안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무한 연주를 통해 지향해야 할 ‘음악 작품’이라는 개념은 별 쓸모가 없다.

마지막으로 위 도식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이것이다. 시험에는 절대로 안 나온다!


심원 TOPIA 논술 아카데미 선임 연구원 i2u4u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