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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의 세계] 패션쇼 연출가 '더 모델즈' 정소미 실장

"화려한 의상에 메시지를 입히는 무대 예술가죠"
디자이너-관격-소비자 연결하는 미적 감각 필요… 수백 명 스태프와 호흡 맞춰야






본의 아니게, 우리의 대화는 수시로 토막이 났다. 끊임없이 그를 찾는 ‘긴급’ 전화들 때문이었다.

곧 있을 패션쇼 행사와 관련해 외부 스태프와 조율하는 문제였다. 이미 이날 아침부터 두어 군데의 바깥 일을 본 뒤 곧바로 사무실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지만 그에게는 진득이 쉴 틈조차 없다.

문득 책상 위에 놓인 그의 월간 스케줄표에 눈길이 닿는 순간, 보는 사람이 되레 숨이 턱 막힌다. 1, 2시간 간격으로 하루종일 회의와 행사 일정으로 빼곡하다.

토, 일요일도 예외가 아니다. 5월의 계획도 이미 포화 상태. 6월 초까지 스케줄이 잡혀 있다. ‘대체 언제 쉬냐’고 묻자 그는 ‘틈틈이 알아서 쉬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패션계에 몸 담아온 지난 27년 내내 아마도 그는 그렇게 살아왔을 것이다. 사생활과 여가를 공식적으로 포기한, 워크 홀릭(일 중독자)의 시간표였다.

“항상 제 머릿속으로는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내 생각을 어떻게 전개해나가야 할까…. 내내 패션쇼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있죠. ”

패션 전문 프로덕션 ‘더 모델즈’의 대표인 정소미 씨. 영원한 현역이고 싶어서일까. 대외적으로는 대표보다는 실장으로 불리기를 원한다. 그는 패션 연출가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정상급 패션쇼 연출가 중 한 사람이다. 1980년 모델 활동을 시작으로 80년대 후반부터는 국제복장학원 차밍과 전임강사 직을 병행, 90년대 후반까지도 직접 모델 겸 강사로 활약했다.

97년부터 모델 활동을 접고 패션쇼 전문 연출가로 전념해 오늘까지 이르렀다. 최근 경력만 하더라도 2003, 2004년 한국슈퍼모델선발대회의 워킹 강사를 맡은 데 이어 2000년부터 지난해까지 매년 서울패션아티스트협의회(SFAA) & 서울컬렉션의 총연출을 전담했다.

패션쇼 연출가는 패션쇼의 구상 단계에서부터 현장 설치와 진행, 마무리에 이르기까지, 각 디자이너가 만든 옷의 개성을 무대 스토리로 엮어 호소력 있게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맡는 사람이다. 디자이너와 관객 또는 소비자들 사이에서 의상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간자와 같다.

세트·조명 음악 등 총괄 지휘

의상의 주제에 맞는 모델들을 캐스팅하고, 이들이 설 무대 세트를 꾸미고, 의상을 가장 아름답고 효과적으로 표현해낼 조명과 음악을 선택하기까지, 패션쇼와 관련된 모든 영역을 기획하고 지휘하는 종합예술가나 다름없다.

“꼭 말하고 싶은 건, 패션쇼는 볼거리가 아니라 의상이 가진 메시지를 전달하는 하나의 작품, 하나의 공연으로 봐야 한다는 거예요. 대단히 광범위하고 복잡한, 그리고 뛰어난 미적 감각이 요구되는 예술작업이죠.”

정 실장이 치러내는 패션쇼는 한 달 평균 5, 6건. 수십 명의 패션 디자이너들이 대거 참가하는 대형 컬렉션 경우에는 한 달 30~40건의 패션쇼를 소화해내야 할 때도 있다.

패션쇼 1건당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3~6개월 정도. 영감만 떠오르면 단 몇 시간 만에 일사천리로 뚝딱 쇼 구성안이 완성되기도 하지만, 그렇게 운 좋은 경우는 흔치 않다. 내내 머릿속에 새로운 발상을 위한 고민이 떠나지 않는다.

“얼핏 보기에는 패션쇼가 다 비슷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 어느 한 가지도 똑같은 패션쇼란 없습니다. 새 의상의 메시지에 맞는, 항상 새로운 생각이 필요해요. 그래서 아이디어 한계에 대한 두려움과 압박감이 가장 큽니다. 혼자 있는 시간에 영화를 볼 때에도 장면이나 그림을 집중적으로 봅니다. 스토리 기억이나 영화 제목은 제게 별 의미가 없어요. ”

수차례 디자이너와의 회의 끝에 마침내 쇼의 구성안이 확정된다. 패션쇼의 오프닝에서부터 각 모델들의 등장 순서, 포즈 방식, 피날레에 이르기까지 분 단위, 더 짧게는 초 단위의 치밀한 프로그램이 정해진다.

큐시트(진행계획표)가 만들어지면 그때부터 더 바빠진다. 이때부터는 혼자가 아닌 수백 명과의 호흡 맞추기가 동반된다. 필요한 무대 세트도 직접 자신의 구상에 맞추어 스케치한 뒤 그 그림을 설계 전문가에게 넘겨 정밀한 도면으로 받는다. 이를 토대로 본격적인 무대 제작이 시작된다.

출연할 모델들도 직접 정한다. 패션쇼 1건당 투입되는 모델은 평균 20명선이다. 패션쇼 한 번에 드는 비용이 적게는 5,000만원부터 많게는 2억원. 쇼가 어긋날 경우 경제적 손실도 손실이지만 해당 디자이너의 명예나 연출가의 신뢰도가 적지않은 타격을 받는다. 이 때문에 직접 의상을 입고 무대에 오르는 모델들의 책임이 더없이 막중하다.

“서울패션아티스트협의회(SFAA)의 경우에는 오디션도 따로 봅니다. 오디션 때 남녀 지원자를 합쳐서 700명 넘게 몰려든 적도 있어요.”

정 실장은 자신이 원하는 음악 CD를 구하기 위해 직접 외국에 다녀온 적도 있다. 음악 선곡은 물론, 담당 스태프가 이를 쇼 구성안에 맞춰 편집하는 날에도 함께 밤을 새며 작업을 지켜본다.

패션쇼는 짧게는 20분부터 길게는 1시간 남짓 진행된다. 단 20분간의 패션쇼라도 이를 위한 행사 당일의 준비 시간만 최소 12시간이 보통이다. 새벽부터 나와서 무대 세트를 점검하고 모델의 분장과 음향, 조명 상태의 점검 등 모든 스태프가 부산하게 움직인다. 규모가 큰 패션쇼의 경우에는 현장의 무대 설치에만 꼬박 이틀이 걸리기도 한다.

“무대나 조명, 음악 등 사실상 그 방면에서 각자 최고 전문가들과 일을 하는 상황에서 제 뜻대로 주문하고 요구하자면 기본적으로 저 역시 그들 못지않은, 아니 그 이상의 지식을 갖고 있어야만 가능하죠.

이 때문에 패션쇼 연출가는 연출 그 자체만이 아니라 쇼에 관련된 모든 분야에 대해서 아주 많은 공부와 상식, 그리고 기본적인 재능과 감각을 갖춰야 합니다.”

패션쇼 예정일이 다가올수록 알게 모르게 성격까지 점점 더 예민해진다. 패션쇼는 한번 막을 올리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생방송과도 같다. 기회는 단 한 번 뿐.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다.

최종 리허설을 마친 얼마 뒤, 이윽고 연출가의 큐 사인이 떨어지면서 비로소 대단원의 막이 오른다. 취재진과 바이어들이 객석을 가득 메운 채 앉아 있다. 디자이너에 따라서는 연예인 등 VIP고객을 초청하기도 한다. 눈이 높고 예리한 관객들의 시선 앞에서 수백 명의 스태프와 연출가가 한 호흡으로 빚어내는 화려한 쇼가 시작된다.

무대에서 의상과 모델들이 관객들의 시선을 받는 동안, 연출가는 무대 뒤편에 설치된 콘솔 부스에 앉아 두 개의 헤드셋을 동시에 머리에 낀 채 스태프들과의 무전을 통해 현장을 지휘한다. 옆에는 무대, 조명, 음향 담당자들이 각자 자신들의 장비 앞에 앉아 연출가의 지시에 맞추어 팽팽한 긴장 속에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렇게 패션쇼 이면에서 움직이는 스태프 인원이 거의 수백 명이다. 무대 뒤쪽에 약 80명, 앞쪽에 약 60명. 콘솔 부스의 인원도 약 40명이다. 모델들의 당일 분장을 맡고 대기하는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평균 40명, 모델들이 옷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는 스타일리스트까지 합쳐, 무대 뒤는 사실상 인산인해의 전장을 방불케 한다.

쇼에서 의상을 갖춰입은 모델이 무대에 등장했다가 퇴장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봄·여름 의상일 경우 길어야 30초. 가을·겨울옷은 길어야 3분 정도다. 모델 1인당 약 3벌의 의상을 갈아입고 등장한다.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했다 하더라도 ‘완벽 무사고’을 보장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일. 예기치 못한 실수나 사고가 때로 터지기도 한다. 모델이 콘티를 까먹거나, 멀쩡했던 음향 시설이 갑자기 말썽을 부릴 때, 모델이 막 등장해야 할 순간에 열려야 할 문이 제시간에 열리지 않을 때 등이다. 이 같은 돌발상황에 최대한 신속하게 대처해야 하는 연출가의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모델이 무대로 걸어나온 뒤 관객들 앞에서 몇 초간 잠시 정지한 채 포즈를 취했다가 되돌아 나가야 되는데 그걸 까먹고 그냥 휙 돌아서 들어가버릴 때, 제 심정은 ‘화가 폭발’하는 정도 그 이상이지요.

행사 규모가 크든 작든, 정말 죽을 힘을 다해서 열심히 준비했는데 모델이 실수로 그걸 망쳐놓으면 당연히 화가 나고 속상할 수밖에요. 실제로 그럴 땐 쇼가 끝난 뒤 그 모델을 불러서 아주 혼을 내놓기는 하지만, 그래봐야 이미 때는 늦었잖아요.”

쇼가 무사히 끝나고 나면 그제서야 극도의 피로가 몰려온다. 그러잖아도 허스키한 그의 목소리가 더 거칠게 갈라져 있기 일쑤다. 입문 시절에는 한껏 들떴을 법한 성취감의 희열조차 지금은 거의 무덤덤해져 있다.

워낙 오랜 세월, 수많은 패션쇼 연출을 맡다보니 실수 없이 성공리에 쇼를 마치고, 그래서 찬사와 감사를 받고 하는 그런 것들이 너무나 평범한 일상처럼 느껴진다. 백전노장 베테랑의 여유일까.

“초창기에는 안 그랬겠지만, 이제는 ‘휴~, 이제 하나 또 마쳤구나’ 그런 기분이예요. 한편으론 그렇게 감상에 빠져있을 시간도 없이 바로 다음에 있을 행사 준비에 신경을 써야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죠.”

패션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패션쇼 연출가에 대한 일반인들의 환상은 다른 직종에 비해 높은 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만나본 패션쇼 연출가의 길은 무척이나 험난하고 고단해 보인다.

정 실장은 “연출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워낙 힘들기 때문에 자신의 꿈이 단단하지 않으면 결코 끝까지 가기 어려운 분야”이라며 실제로 신입사원 상당수가 수습기간 3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는 일이 허다하다고 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게다가 주5일제도 무색한 연중무휴의 생활을 감수해야 하는 것도 고달프단다. 잠자는 시간, 쉬는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출근시간은 정해져 있지만 퇴근 시간이 들쭉날쭉이다. 정 실장의 경우 평소에도 보통 밤 9~10시쯤에 귀가한다. 행사가 임박하거나 일이 많을 때에는 야근과 밤샘이 잦다. 신입의 경우, 연봉 수준은 대기업 대졸 초임과 비슷하다.

“자신만의 꿈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예요. 의상이나 미술쪽의 아무런 지식도 없이 무턱대고 이 일을 하고 싶다며 찾아오는 젊은이들이 요즘 많은데, 진정으로 패션 연출가가 되고 싶다면 반드시 관련 계통의 공부와 지식부터 갖춘 뒤 도전하라고 권하고 싶어요.”

▲ 패션쇼 연출가가 되려면

패션 연출 관련 프로덕션에 취업하는 방법이 있다. 전공 제한을 두지는 않지만, 의상학 전공자 또는 미술대 출신들이 우대되며 실제 채용률도 높다. 채용시험은 1차 서류전형, 2차 면접으로 진행된다. 면접시험에서는 의상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 연출과 마케팅 분야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상식, 그리고 원만한 대인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성격 여부를 집중 평가한다.



입력시간 : 2007/05/01 15:52




글 정영주 pinplus@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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