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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기행 54] 恩津 宋氏 尤菴 宋時烈 (은진 송씨 우암 송시열)
13대 종손 송영달(宋永達) 씨
선조의 中孝정신 계승 온힘… 풍모도 생활도 '조선의 선비'
문중의 많은 유물·유품 청주박물관에 기탁하기도

우암 송시열 선생 종손을 만나기 위해 필자는 아주 먼 길을 돌아온 느낌이었다. 관념 속에 우암 선생의 유적지는 쉽사리 찾아보기 어려운 곳에 있다고 여겼다.

우연하게도 행사 장소가 ‘화양 랜드’였다. ‘화양동(華陽洞)’은 우암 선생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이요 고산구곡(高山九曲)이었다. 시간을 보아 그곳을 찾았다. 유원지로 변하긴 했어도 인상적인 두 유적지를 만났다. 그 하나는 화양서원(華陽書院)과 만동묘(萬洞東)며 다른 하나는 선생의 강학지소인 암재(巖齋)였다.

선생께서 암재라고 이름하고 머물렀던 화양 제4계곡에 있는 정자는 암서재(巖棲齋)라는 현판을 달고 아름다운 화양계곡을 오늘도 굽어보고 있었다.

화양서원은 묘우라고 생각되는 건물에 서원 현판을 게판해 두었다. 이는 아직 강당을 건립하지 못해서 권도(權道)로 택한 것이리라. 그리고 가파른 언덕 위에 자리 잡은 건물이 만동묘다.

만동묘는 우암의 명으로 수제자인 수암 권상하가 건립한 묘우로, 이곳에는 명나라 신종과 의종황제의 신주를 봉안해 춘추로 향사했다. 그 아래 만동묘 묘정비가 서 있는데, 참담한 것은 이 비의 비문을 철저하게 파괴했다는 사실이다. 주체는 일본인이다.



만동묘


암서재 현판을 보는 순간 필자는 퇴계 선생의 도산서원을 떠올렸다.

도산서원에 가보면 선생이 평소 거처했던 도산서당의 마루 이름이 암서헌(岩栖軒)이다. 우암 선생의 정자 이름 암서재(巖棲齋)와 동일하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암은 율곡 이이와 구봉 송익필에서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으로 내려오는 학통을 계승한 학자다.

따라서 퇴계 선생으로 시작해 학봉과 서애를 거쳐 경당 장흥효와 갈암 이현일로 내려가는 영남학파와는 그 갈래를 달리하고 있다.

우암의 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을 펴서 보면 도처에 퇴계 선생을 언급하고 있음을 볼 수 있기는 하지만 학문에 있어서는 비판적인 인식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암은 퇴계는 물론 율곡이라 할지라도 주자의 견해에 비추어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되면 즉시 비판의 각을 드러냈다.

13대 종손 송영달


63세 때 지은 ‘화양동 바위 위의 정사에서 읊다’라는 오언절구는 정말 멋있는 시다.

시냇가 바위 벼랑 열렸으니 溪邊石崖闢

그 사이에다 집을 지었다네 作室於其間

조용히 앉아 경서 가르침 찾으며 靜坐尋經訓

시간을 아껴서 따르려 애쓰네. 分寸欲躋攀

우암은 자신의 문집만도 102책을 남긴 대단한 저술가다. 그는 맹자를 천 번 읽었을 뿐 아니라 방대한 주자대전도 완전독파 했을 정도로 치밀하면서도 폭넓은 독서가이기도 하다. 그런 성향을 가진 이가 인적이 드문 이곳에서 시간을 아껴가며 독서했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일전에 행사가 있어 대전보건대학교에 간적이 있다. 이 때 이웃한 우암사적공원을 보았다.

자료를 통해 본 우암사적공원을 우연히 관광하게 된 것이다. 그곳은 흥농촌(興農村)이라는 마을이었으며 선생께서 남간정사(南澗精舍)를 지어 머물렀던 유서 깊은 곳이었다.

또한 선생이 소제(蘇堤)라는 마을에 계실 때 지었던 기국정(杞菊亭)도 남간정사 바로 앞으로 이건 되어 있었다. 남간정사 경내에는 주자와 수암 권상하, 석곡 송상민 등 세 분의 위패가 모셔진 남간사(南澗祠)도 있다.

우암 선생의 대표적 유적지는 충북 괴산과 충남 대전에 있다. 그래서 선생의 종가 역시 이곳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선생의 종가는 충북 청주시 문화로 13번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충효절의 암각서


6ㆍ25한국전쟁 당시 괴산에서 이곳으로 옮겨 앉은 종가는 충북 도청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늦은 시간임에도 종손 송영달(宋永達, 1922년생) 옹은 익숙한 태도로 외인을 맞아 사랑채로 안내했다.

오랜만에 보는 선비의 거처였다. 우선 주목된 것은 주자의 시를 쓴 침병 한 틀이고, 좌우로 아담하게 정돈된 도서였다.

일본인인 제교철차랑(諸橋轍次郞, 모로하시 데쓰지)이 편찬한 대한화사전(大漢和辭典) 한 질도 눈에 들어왔다. 우암 선생께서 평생 따라 배우고자 했던 주자의 시구를 쓴 병풍을 수십 년 동안 쳐두고 생활하신 종손의 모습은 한 번에 보아도 조선의 선비 그 자체였다. 이런 예모(禮貌) 때문에 일반인들은 대하기가 불편하다고까지 생각하는 종손이다.

“우리나라는 효(孝)를 행한 나라였어요. 지방 관아에 수령이 사용할 수 있는 사당을 마련해 두었어요.

그곳에 수령이 주손이면 신주를 모시고 와 봉안했거든요.” 종손의 이런 설명은 지금까지 듣지도 생각하지도 못한 것이었다. 지방 관아를 무수하게 구경했지만 사당 존재 여부를 몰랐다.

그저 동헌의 규모나 그곳에 현판이 걸려 있으면 누가 썼는지 또 그 내용이 무엇인지 한 번 읽는 것이 전부였다. 필자는 조선의 관료들이 학자요 문인이었다는 생각은 한 적이 있다.

이는 우리의 현실과는 다른 모습이다. 조선의 관료는 생원 진사와 문과를 거치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되자면 유가 교양은 물론 학문의 세계에 눈을 떠야 했다. 그리고 시와 문장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종손은, 고을 수령이 주손인 경우를 대비해 제도적으로 사당을 마련해둔 것을 지적한 것이다

. 조선은 효에 바탕을 두고 백성들을 다스린 나라였다. 설명이 필요 없는 가르침이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필자는 화양동에서 본 충효절의(忠孝節義)라는 대형 암각서를 떠올렸다.

전하는 바로는 이 글씨는 중국 명나라 태조의 것이라 전한다. 그런데 왜 이 구절을 선생의 정자 옆 거대한 바위 절벽에 새겼을까? 이는 바로 선생이 평생 배우고 실천했던 바였기 때문이다.

문묘에 배향될 때 상징적인 업적으로 퇴계를 학문이라 할 때 우암을 절의로 보는 것과도 연관지울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사례(四禮, 冠婚喪祭) 가운데 남은 것이라고는 제례(祭禮)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망해서야 되겠습니까? 고유 호적도 없어지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그렇다고 해도 영남 선비들은 무엇을 하고 있단 말입니까? ‘금이학지(今而學之)는 장이행지(將而行之)’ 아닙니까?” 실로 준엄한 말씀이다.

‘지금 배우는 것은, 그 배운 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다’ 라는 말씀이 더욱 매웠다. 종손은 이번 17대 국회에서 가족법이 통과된 것에 대해 미풍양속을 크게 해쳤다고 인식했다.

아울러 종손은, 그래도 의리가 남아 있는 영남에서 이러한 불합리에 대해 왜 조직적으로 반대하고 저항하지 못했는가 반문했다. 종손은 이 모든 불합리가 선비가 책임을 다하지 않고 주체의식이 부족해서 야기된 ‘퇴속(頹俗)’이라고 진단했다.

만동묘 묘정비를 일제가 파괴한 것에 대해 종손은 참담한 옛일을 회상하며 사실을 전했다.

“제가 본래 괴산 청천에 살았는데, 왜놈들이 만동묘를 없애려고 온갖 공작을 다했어요.

저들은 민심을 걱정해 모양을 갖추려고 했어요. 우리나라 선배들의 만동묘 혁파 결의를 유도한 것이지요. 저는 ‘너희가 남의 집을 마음대로 헐려고 하느냐?’며 끝까지 이를 반대했어요.

그러나 저들은 이곳을 불온사상의 온상지로 몰아 총독부 경무국장의 지시로 단하(丹下)라는 경찰부장이 주도해 화양서원, 만동묘를 무너뜨리고 선생이 효종의 죽음을 슬퍼해 활처럼 엎드려 울었다는 ‘읍궁암(泣弓岩)’이란 바위까지 깨부수었어요. 묘정비 비문도 정(釘)으로 철저하게 쪼아버렸고요”

종손은 괴산의 재궁을 지으면서 상량문에 단기(檀紀)를 사용했다. 일제는 이를 문제 삼아 그 부분을 대패로 밀었을 정도다. 젊은 시절 이창근(고등고시 출신, 42세에 지사) 충북 지사가 부임 인사차 종가를 방문해, 종손이라고 해서 집안에만 있어서는 안 된다며 도청의 촉탁 직원으로 특채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몇 해 동안 도청 직원으로 근무했다. 그런데 임기가 차 도지사가 교체되었고, 신임 지사가 취임해 인사차 들어갔다가 조선말로 인사를 하자, ‘일본의 고급 관리 앞에서 조선말을 쓰면 됩니까. 고치세요’ 라는 말 한 마디에 그 직을 그만두었다. 종손의 이 결단은 우암 선생의 가르침을 골수에 익힌 이로서 절의니 주체니 하는 단어의 의미를 알고 실천했던 분이기 때문에 내릴 수 있었다.

종손은 2005년 은진 송씨 세적록과 우암 선생 맏파 세계 자손록을 합본으로 편집 간행한 바 있다. 1200면이 넘는 방대한 이 책에서 종가 세계를 보았다.

우암 선생의 8대손인 종수(宗洙, 공조판서)로부터 현 종손까지 연 6세(世)가 계자(系子)였다. 이는 그 유래가 드문 경우로 종가의 계통을 잇기 위해 참으로 어려운 일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거개의 경우 양자가 잦으면 집에 남은 유물 유품들이 산실되고 만다. 그렇지만 우암 종가의 경우는 문중이 굳건해 상당한 유물 유품들이 지금까지 남을 수 있다. 종손은 2005년 9월과 2007년 2월에 각각 유물 유품을 청주박물관에 기탁했다.

종손은 ‘우암 선생의 학자적 업적과 사상, 철학 등을 많은 사람들과 고루 나누려는 의도로 박물관에 맡겼다’고 밝혔다. 이들에 대해 박물관 측은 체계적으로 정리해 조만간 일반에 공개할 계획에 있다 한다.

다만 우암공원이 있는 대전시의 경우 공원 내에 유물전시관이 마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탁이나 사진, 복제품이라는 한계가 있어 이들 진품 입수가 절실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현재의 전시관으로서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종손은 우암 선생이 ‘조선 중화사상(中華思想)’을 창시한 분이라고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중화사상이라고 하면 중국 중심 사고방식으로 우리에게는 달갑지 않게 인식된 사상이다. 그래서 우암의 사상이 일부 학자들에 의해 소중화(小中華) 사상, 사대주의(事大主義), 모화주의(慕華主義) 등으로 폄하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종손은, 우암 선생이 이미 명나라가 망한 뒤 중원 천지가 청나라의 세계로 변해 그 중화의 법통성을 조선이 이었다고 인식했기에, ‘조선이 중화’라고 설명했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것이 ‘주체(主體)’일 수 있다.

이미 현실에서는 명나라라는 실체는 없다. 남은 것은 정신적인 명나라이지만, 현실에서는 조선이 그 법통을 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중효절의요 인륜이며 도덕이다. 누가 이것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이를 지키고 실천한다면 중화(中華)요 문명(文明)이고, 그렇지 않다면 오랑캐요 야만(野蠻)이다.

“우리 선조께서 정해 실행했던 회덕 향약과 같은 것이 풍속을 교화하는 데 아주 좋습니다.” 종손은 우리 사회 현실에 대해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노종손의 우환(憂患)의식에 나온 것이다.

차종손은 홍근(泓根, 1955년생)이며 맏손자는 경한(景翰)이다.

● 송시열 1607년(선조40)-1689년(숙종15) 본관은 은진. 아명은 성뢰(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는 문정(文正)
올해 탄생 400주년… 곧음을 실천한 조선 최고 朱子연구자



2007년은 우암 선생 탄신 400주년이 되는 해다, 올해는 공교롭게도 서애 류성룡 선생이 세상을 떠난 4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서애 선생의 기념행사는 지난 봄에 끝난바 있고 우암 선생의 기념행사는 오는 가을로 예정되어 있다.

우암의 이력을 살피다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태몽이다.



우암은 부친(宋甲祚, 睡翁)이 태몽을 꾸었다. 꿈에 공자(孔子)가 손수 여러 제자들을 거느리고 그의 처가인 구룡촌(九龍村)으로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명(兒名)을 ‘성인이 주었다’는 의미로 ‘성뢰(聖賚)’라고 지었다. 퇴계 선생의 태몽은 어머니인 춘천 박씨가 꾸었는데, 공자가 집에 왕림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퇴계 태실에 가면 솟을대문 위로 성림문(聖臨門)이라는 현판과 아울러 기문이 게판되어 있다. 조선 시대의 태몽 가운데 단연 최고는 ‘공자 꿈’이었을 것이다. 이들 두 분 선현이 공자의 꿈으로 태어난 것이다. 후일 두 분은 모두 많은 제자를 거느렸으며 학문적 성취와 아울러 문묘에까지 배향되었다.

생전과 사후에 차이는 있었지만 최고의 존경을 받았다. 두 분은 시호를 청하는 글(諡狀)이 없이 시호를 받았다. 이는 중국의 주자(朱子)가 그러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유례가 드문 경우다.

우암은 어릴 적에 부친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주자(朱子)가 있은 후에 공자가 있고 율곡이 있은 뒤에 주자가 있으니 공자를 배우려면 의당 율곡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말을 평생 새겨 조선 최고의 주자 연구자가 되었다.

또한 그는 조광조 김시습과 같은 인물에 대해 어린 시절부터 따라 배워야 할 전범(典範)으로 삼았다.

우암은 24세 때 부친상을 마친 뒤 사계 김장생을 찾아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을 익혔고 이듬해에 선생의 상을 당하자 그의 아들인 신독재(金集)를 따라 배웠다.

우암이 영남의 퇴계학과 접하게 되는 계기는 27세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뒤인, 28세에 동춘당 송준길과 함께 그의 처가인 경북 상주를 유람하면서가 아닌가 한다.

당시 동춘당의 장인인 우복 정경세는 그 전 해에 세상을 떴다. 이 때 이들은 경북 구미에 있는 대학자 여헌 장현광을 찾기도 했다.

우암이 퇴계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우암의 저술 도처에 관련 내용이 남아 있다. 우암은 기본적으로 퇴계의 학문에 대해 ‘가장 폐단이 없었다.’고 인식했다. 그러나 그는 주자와 같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강한 의문을 표시했다.

그는 또 퇴계가 서화담을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이는 화담이 수학(數學) 등의 잡학(雜學)을 했다고 해서인가? 라고 의문을 표했고, 사암 박순이 화담의 제자임에도 서로 친한 것까지 지적했다.

우암은 예설에 있어서도 ‘퇴계의 학문이 정밀함을 주장해, 듣건대 영남 사람들은 주자가례를 따르지 않고 퇴계를 따른다고 하니, 그래서는 안 될 것이다.’ 라고 못 박았다.

그는 27세 대 참봉 직을 시작으로 평생 별제, 지평, 진선, 장령, 집의, 이조참의, 찬선, 예조참판, 이조판서(52세), 우찬성(54세), 병조판서, 우의정(62세), 좌의정(66세) 등 여러 벼슬이 내렸지만 나아가 세 번의 정승 직에 있은 날자가 49일에 불과했다. 조정의 부름을 받은 회수가 무려 56년간 167회, 이에 응한 것이 37회였다. 벼슬에 나아가기는 어렵고 물러나기는 쉬웠던 처사다.

우암은 절의(節義)를 강조했고 평생을 곧을 직(直) 한 글자에 매달렸다. 우암은 병자년과 정축년을 겪으면서 관료들이 의(義)를 잃고 부끄러움을 잊었다고 상황을 인식했다. 그래서 그는 북벌의 복수를 꿈꾸었고 절의의 상징이었던 청음 김상헌과 동계 정온, 그리고 윤집 오달제 홍익한 등 삼학사(三學士)를 기리는 일에 발 벗고 나섰다. 그것은 대의(大義)를 밝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근자에 선생이 59세 때(효종10, 1659) 희정당(熙政堂)에서 독대한 내용을 적은 선생의 글을 읽고 선생의 진면모를 아는데 도움을 받았다. “경(卿)과 조용히 대화를 하고 싶어 여러 달을 기다렸지만 끝내 기회가 없었소.

오늘은 마음먹고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이오”로 시작되는 이 글을 단숨에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시공을 넘어 국왕과 절의의 상징인 신하의 꾸밈없는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입에 올리기 두려웠던 현안인 강빈(姜嬪, 소현세자의 비)의 억울함을 역설해 임금의 뜻을 꺾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경의 말을 듣고 다시 생각해보니 과연 그렇구려.” 효종은 누차에 걸쳐 이렇게 우암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과연 ‘산림(山林)의 시대’라 할 만하다.

우암의 학자적 면모는 그가 72세에 완성한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와 정이천과 정명도의 이정전서(二程全書)를 효과적으로 볼 수 있게 편찬한 정서분류(程書分類)에서 잘 드러난다.

이들 저술을 통해 학자들에게 정자와 주자의 학문으로 의문 없이 나아갈 수 있게 만들었다. 주자대전차의는 숙종12년(1686, 80세)에 이르러 왕명으로 간행을 허락 받았다.

이는 학자로서의 최고의 영예인 동시에 후진들로서도 크게 다행한 일이었다. 이 책은 121권 17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김置戮?자문으로 이루어졌으며, 이후 권상하와 김수항의 아들인 김창협 등 학자들에 의해 보완 과정도 거쳤다.

우암은 생전보다 사후에 더욱 빛난 이다. 사후에 수원의 매곡서원, 정읍의 고암서원, 도봉서원, 덕원의 용진서원, 괴산의 화양서원, 여주의 대로사(大老祠) 등 전국 수십 곳의 서원과 사당에 각각 제향되었다.

2000년에 발간되어 현재 22쇄에 이른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라는 책을 읽었다. 많은 역사적 사실이 담겨 도움 받은 바도 크지만 결론에 이르러 ‘편벽한 소인에게 주어진 공허한 찬사’라고 한 데서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더구나 마지막에 “군자는 두루 통하고 편벽되지 않지만 소인은 편벽되고 두루 통하지 못한다”는 논어의 구절까지 인용한 것은 선현을 대하는 온당한 태도가 아니라고 본다. 그의 삶을 통해 충효절의와 곧을 직자 한 글자만 배운다고 해도 우리시대의 큰 스승임에 분명하다.

우암 선생은 남아 있는 화상으로 인해 우리와 더욱 친밀하다. 조선 중기에 대로(大老, 큰 선생님)로 기려졌던 선생은 많은 화상이 제작되었다. 그 중에 1778년 정조 대왕의 찬문이 적힌 좌안칠분상 한 점은 국보 제237호로 지정되어 전한다.

다음은 전주 류씨(全州 柳氏) 삼산 류정원(柳正源) 종가를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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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7/07/24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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