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恩津宋氏同春堂宋浚吉(은진 송씨 동춘당 송준길)
[종가기행 57] 14대 종손 송성진(宋城鎭)
文廟에 배향된 선현의 영예… 탄신 400주년 행사로 받들어
서울서 근무하는 엘리트 은행원 "종가 못 지켜 늘 죄송"

문묘(文廟)에 배향된 선현의 종가일 뿐 아니라 건축학적 측면으로도 ‘정밀정묘(精密精妙)’하다는 동춘당 선생의 종가에 가보고 싶은 마음을 오랫동안 가졌다.

생각해보면, 문묘에 배향된다는 것은 전통사회에서는 최고의 영예였다. 문묘에 배향하기 위한 논의 과정을 보면 정밀하면서도 치열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모든 면이 평가 대상이었으나 가장 중요한 항목은 도학(道學)이었다. 달리 말하면 학문적 성과나 업적 뿐 아니라 그 학문의 연원이 중요했다는 것이다. 절의(節義)가 중요한 기준이라면 고려 말의 삼은(三隱) 가운데 다른 두 분이나 청음 김상헌이 빠질 까닭이 없다.

학문만 보더라도 고려말의 익재 이제현이나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추앙 받았던 최충, 퇴계와 양대 축을 이루었던 남명 조식 같은 이도 문묘에 배향될 만한 분이지만 들지 못했다.

그만큼 배향이 어렵기 때문에 가문과 지역의 명예라는 말이다. 문묘에 모셔진 인물은 공자를 위시한 오성(五聖)과 공문십철(孔門十哲, 공자 문하의 대표적 제자 열분), 송조 육현(宋朝六賢, 송나라의 여섯 분), 동국십팔현(東國十八賢)인데, 우리나라 사람은 열여덟 분이다.

우리나라라고 하지만 신라 2, 고려 2인을 제외하고는 14분이 조선시대 인물이다.



종택 사랑채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문의 위상을 이야기할 때 정승과 판서, 대제학을 역임한 이가 몇 분인가를 앞세운다. 그리고 문과에 뽑힌 분이나 문집을 낸 어른이 얼마나 되는가도 평가의 중요한 잣대가 된다.

여기까지는 대체로 서로 승복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지만 문묘에 든 어른이 있느냐에 이르면 그 위상이 저절로 판가름 날수밖에 없다. 얼른 생각해보아도 18가문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문에서 두 분이 든 경우가 2케이스이기 때문에, 16가문이다. 좀 길긴 하지만 16집을 들어보면, 순창 설씨, 경주 최씨, 순흥 안씨, 영일 정씨, 서흥 김씨, 하동 정씨, 한양 조씨, 여강 이씨, 진성 이씨, 울산 김씨, 덕수 이씨, 창녕 성씨, 광산 김씨, 배천 조씨, 은진 송씨, 반남 박씨다.

직계이든 방계이든 당장 우리 할아버지는 여기에 들어 계신가를 생각해보면 된다. 아마 대부분 없을 것이다. 조선 왕조의 왕족인 전주 이씨조차도 배향된 이가 없다.

송성진


삼대 정승집인 대구 서씨, 시대마다 인물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안동 권씨, 안동 김씨, 최고의 국반으로 자긍하는 연안 이씨도 문묘에 배향된 인물이 없다.

이렇게 어려운 문묘 배향에 은진 송씨가 두 분이 들어 있는데, 동춘당 송준길과 우암 송시열이 그 분이다. 광산 김씨 집안에서 두 분이 들어 있으니,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이다.

이 두 분은 문묘에 배향된 유일한 부자간이기도 하다. 동춘당과 우암은 모두 사계와 신독재와 학문적으로 사제간의 연을 맺고 있다. 동시대에 한 학파(學派)에서 그렇게 어렵다는 문묘에 4분이나 배향된 것이다.

이는 매우 놀라운 성취요 이례적인 것이긴 하나, 배향의 중요한 기준이 도학(道學)이라는 것임을 안다면 설명이 가능하다.

다만, 퇴계 이황의 경우는 도학 적전으로 이어진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은 물론 그 이후의 여헌 장현광과 같은 학자들 모두가 문묘 배향 논의까지 있었지만 한 분도 여기에 들지 못했다. 이는 달리 설명되어야 할 부분이기는 하다.

최고의 명예인 문묘에 배향된 인물들의 관향지, 종가가 어디에 있는지, 종손이 누구인지, 가본 적이 있는지? 손꼽아보았다. 망연자실한 경우도 있다.

도청소재지인 대전시 대덕구 송촌동에 자리한 동춘당 종가는 ‘동춘당공원’ 중심부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길손을 맞았다. 나무 백일홍이 금상첨화(錦上添花)였다.

예전에는 명미한 산으로 감싸였을 종가는 이제는 현대적인 고층아파트로 둘러싸여 있었다. 아파트 단지 이름이 ‘선비마을’이라는 것은 얼마간의 위안이었다.

동춘당 종가를 보면서 그동안 사진으로만 보았던 ‘정밀정묘(精密精妙)’한 모습을 감상하고 싶었다. 그러나 종손이 외처에 살고 있고 마침 종손의 계씨도 출타중이라 집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50m 떨어진 동춘당의 둘째 손자(宋炳夏, 1646-1697) 집으로 들어섰다.

그 집과 인척의 연(晩翠畵室, 광산 김씨)이 있는 한국화 작가 선생이 사랑채를 작업공간으로 쓰고 있었다.

초면이지만 정답게 맞아준 김 선생과 선현의 이력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포저(浦渚) 조익(趙翼:1579-1655, 풍양 조씨, 좌의정, 국립중앙박물관에 청죽도가 있음)이 쓴 동춘당기(同春堂記)를 꺼내 함께 읽었다. 거기에는 ‘동춘당’이라는 집 이름이 ‘사물과 함께 봄을 맞는다(與物同春)’는 것에서 유래했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동춘당의 이미지는 더욱 따스하고 부드러운데, 선생의 실제 삶 역시 그러했다. 포저는 기문에서, 회덕(懷德)의 송씨는 동방 명족이며 그 씨족은 숫자도 많고 어진 이도 많이 났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동춘당은 선배인 포저에 대해 그의 사후(1668, 동춘당 63세)에 상소를 통해 배향한 서원에 ‘명고(明皐, 경기도 광주)’라는 현판을 내리게 했다.

명문가의 종손이며 명문가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종손은 어떤 분일까? 궁금했다.

동춘당의 14대 종손 송성진(宋城鎭, 1959년생) 씨는 집에서 어릴 적에 조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조부인 송용시(宋容時) 씨는 취산(翠山)으로 호를 쓰는 한학자요 선비였다.

글씨에도 조예가 있어 지금까지 남은 작품이 적지 않다 한다. 종손은 지난 1991년에 조부를, 그리고 그 이듬해에 부친을 여의었다.

종손은 대전에서 고등학교와 대학(법학 전공)을 다닌 뒤 서울로 유학해 대학원을 마쳤다. 그 뒤 금융계로 진출해 현재 서울 강남의 한 시중은행에 근무하고 있었다. 은행 사무실에서 처음 만난 종손은 동춘당에서 느꼈던 따스한 모습이었다.

종손은 누차 자신의 성취에 대해서는 손사래를 치며 적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예학의 본가 주인다운 겸양이었다.

“제가 종손으로서 집을 지키지 못하고 이렇게 객지에 있으니 늘 죄스러운 마음입니다.” 종가와 종손의 포부와 고민을 듣고 공감했다. 종손은 엘리트 지식인이요 직장인이다.

종손은 법학 석사인데, 필자가 사회에서 만난 유일한 석사장교 출신이다. 석사장교는 대학원을 졸업한 석사 가운데 별도의 선발 시험을 통해 육군 중위로 6개월간 복무한 뒤 사회로 나가 기여하게 한 지금은 없는 제도에 있었다.

“지난 2006년에 선조 탄신 400주년 행사를 3일간에 걸쳐 다채롭게 가졌습니다.

시청 대강당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서는 500여명의 청중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대 정옥자 교수의 기조강연과 여러 학자들의 논문 발표를 통해 선조를 재조명했습니다. 400주년 행사 때 우암 종손과 우복 종손도 참석했습니다.”

선대에 형님 아우님 하는 관계며, 두 선생님이라는 의미로 ‘양송(兩宋)’이라 불렀던 우암의 종손(송영달 씨)이 참석한 것은 당연한 일로 생각된다. 그리고 또 한사람, 우복 정경세의 종손이다.

종손은 정춘목 씨로 경북 상주 우산(愚山)이라는 곳에 종가가 있다. 우복은 퇴계의 수제자인 서애 류성룡 선생의 수제자다. 동춘당은 우복의 둘째 사위다. 영남학파의 우복은 기호학파의 종장(宗匠)인 사계 김장생 문도 가운데서 사윗감을 골랐다.

당시 사계 문하에는 동춘당을 위시해 우암과 초려 이유태 등 쟁쟁한 학자들이 있었고, 그 중에 동춘당을 선택한 과정의 일화는 사랑방 야화(夜話)로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이 혼인은 향후에 영남과 기호학파간의 화합과 소통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종손은 성균관 석전(釋奠)에 아헌관(亞獻官, 제관으로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사람)으로 참여한 적이 있다. “성균관에 가보니 선조의 글씨가 아주 많이 걸려 있어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현재 성균관 명륜당에는 동춘당 선생의 글씨가 많다.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경재잠(敬齋箴) 등은 성균관이나 지방 향교에 필수적으로 게판된 매우 중요한 유교 이념을 담고 있는 글이다. 이곳에 국왕의 글과 함께 동춘당의 대작들이 수백 년간 게시되어 오늘에까지 이르렀고, 14대 종손과 만난 것이다.

필자는 동춘당의 글씨 현판 가운데 경재잠을 더욱 감명 깊게 보았다. 동춘당은 예학자로 이름 높은데, 그의 학문을 한 단어로 설명하자면 공경할 경(敬)자에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지난 20여 년간 동춘당 연구에 바친 대전대 송인창 교수는 동춘당을 ‘주경(主敬)의 철학자’로 규정했다. 경재잠은 주자(朱子)가 지은 잠언(箴言)인데, 동춘당 역시 평생을 주자를 공부하여 닮고자 했던 분이었고, 마침내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

경재잠 160글자에는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마음가짐이나 행동 규범이 응축되어 있다. 종손은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맏아들은 원태(源泰, 1991년생)다.

● 송준길 1606년(선조39)-1672년(현종13)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춘옹(春翁), 시호는 문정(文正)
우암 송시열과 함께 '양송'으로 추앙… 도학 계승에 온 힘



동춘당을 함께 지칭하는 용어 가운데 양송(兩宋), 삼송(三宋), 충청오현(忠淸五賢) 등이 있다. 양송은 동춘당과 우암 송시열을, 삼송은 여기에서 더해 제월당(霽月堂) 송규렴(宋奎濂, 1630-1709)을, 그리고 충청오현은 양송에다 윤선거와 이유태를 더해 부르는 용어다.

충청오현은 조선 중기에 문묘에 종사할 때 불렀던 오현(五賢,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에 견주어 부른 것으로 이해된다.

이들 용어는 모두가 선현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에서 나온 것이다.

동춘당 친필 상소문 초고


그러나 이 보다도 동춘당을 기리는 표현 가운데, ‘일대종유(一代宗儒)이요 삼조빈우(三朝賓友)’라는 문자가 보다 여실히 선생의 면모를 설명한다고 본다.

동춘당이 한 시대를 대표한 학자요 선생님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유종(儒宗), 또는 종유(宗儒)라고 하는 것이다.

이에 더해서 임금과 세자를 올바르게 보도하는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에 참여한 신하의 역할을 했는데, 동춘당은 인조와 효종 현종 3대를 걸친 사부(師傅)의 역할이 있었다. 이를 기려서 ‘삼조의 빈우’라고 하는 것이다.

동춘당은 충청도 회덕의 송촌에 세거하는 은진 송씨 가문 출신으로, 서울 정릉에서 청좌와(淸坐窩) 송이창(宋爾昌)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릉은 사계와 신독재가 난 곳으로 동춘당과 함께 문묘에 배향된 세분이 태어난 유서 깊은 곳이다.

이곳에는 이를 기려 ‘삼현대(三賢臺)’라는 곳이 있다 한다. 어머니는 광산 김씨로 김은휘(金殷輝)의 따님인데, 그는 황강 김계휘의 아우다. 황강의 아들이 사계 김장생인 점을 고려하면 동춘당은 외손으로 그 학통을 이었다.

동춘당이 손자에게 준 시작품 서각



동춘당의 사승관계는 사계와 신독재 외에도 청음 김상헌이 있다. 동춘당이 청음에게 올린 편지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1646년(인조24, 41세)에 청음에게 편지 한 통을 올린다.

“항상 문하에 나아가 조석으로 모시고 청소의 일을 하면서 높고 크신 도덕을 우러러보고자 하였으나, 불행하게도....생각건대 청의(淸議)가 비록 한 때는 민멸(泯滅)될 수 있으나 공론(公論)은 길이 없어지지 않는 것이나, 건강을 더욱 돌보시어 사림(士林)의 기대에 부응하시기 바라옵니다.” 선생님으로 모시며 선생님을 진정으로 걱정하는 제자의 마음이 여실히 담겨있는 편지다.

동춘당은 이 편지에서 선친의 비문을 부탁했고, 이후 4번의 편지를 더 보내 3대의 비문을 모두 청음에게 받게 된다.

동춘당은 우암과 평생을 함께 공부하고 행동한 사이다.

그가 9살 때 우암이 송촌으로 와서 기거하며 함께 글을 읽었고 25세 때도 함께 공부했다. 우암이 송촌으로 와 공부한 것은 우암의 부친 수옹 송갑조가 아들을 데리고 와 동춘당의 부친인 청좌와 송이창에게 배우게 한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을 고려한다면 두 사람은 일찍부터 ‘도학지교(道學之交)’를 맺어 평생을 함께 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분은 어린 시절 서로 옷을 나누어 입은 사이였다. 택당 이식의 아들 외재 이단하(德水人, 좌의정, 1625-1689)는 동춘당을 기리는 만사에서, ‘양송’을 중국의 ‘이정자(二程子, 정명도와 정이천 형제)’에 견주고 있다.

지금 남아 있는 주요한 비문이 두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경우가 많다. 대부분이 우암 글, 동춘당 글씨의 구도다. 그 대표적인 예가 화순에 있는 정암 조광조 유허비와 남해에 있는 이순신의 사당인 충렬사 비이다. ‘양송’이란 찬사가 공연히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사례다.

동춘당이 15세 때 관례(冠禮, 성년식)를 할 때 사계가 빈을 맡아 행사를 주재했고, 아들인 신독재가 찬(贊, 執事)을 담당했다. 동춘당은 18세 때 역시 예학에 조예가 깊었던 우복 정경세의 사위가 된다.

사계와 신독재, 그리고 우복은 동춘당을 ‘예학(禮學)의 대가(大家)’가 될 것으로 예견했고, 이는 현실이 되었다.

예학자로서의 면모는 간단히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으나, 사계의 대표적인 예설서인 의례문해(疑禮問解) 내용 중에 44%가 동춘당의 질문이라는 데서도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동춘당은 생원과 진사시에 합격한 뒤 문과 별시 초시에까지 합격하였으나 문과로 출신하지는 않았다.

그의 주된 관심은 오직 도학(道學) 계통(系統)의 계승과 후진 양성에 있었다. 동춘당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청음의 영향을 받아 존주대의(尊周大義)에 입각해 민족자존(民族自尊)을 일깨우는 것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가 청음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록 일시적으로는 꺾이었지만 청의(淸議)와 공론(公論)이 영원할 것임을 강조한 것도 이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동춘당은 추천을 통해 조정에 나아가 이조판서라는 고위직에 이르기도 했으나 관직이 내려오면 끊임없이 사퇴하여 조정에 선 날이 겨우 1년여에 불과했다. 조정에서는 유림의 종장이었던 동춘당의 경륜을 필요로 했지만 그는 벼슬을 좋아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무게 있는 정책을 수시로 올렸고 국왕은 이를 경청하려 했다.

왕명으로 간행된 방대한 동춘당의 문집(총 34권 18책 분량)을 보면 1-9권이 상소(上疏)와 차자(箚子), 계사(啓辭), 서계(書啓), 헌의(獻議)다. 이는 40세부터 67세로 졸할 때까지의 27년간 국가 발전을 위해 올린 글이다.

그 대부분이 벼슬을 사양하는 것이지만, 나라와 도(道)를 걱정하고 임금을 바르게 보도하기 위한 내용이 아닌 것이 없었다.

그가 나라에 올린 글 가운데 문집 16권에 올라 있는 ‘사진춘궁선현격언병폭발(寫進春宮先賢格言屛幅跋)이 주목된다. 동춘당은 학문 뿐 아니라 서법에도 당대 일류였다. 성균관 명륜당에 걸린 현판 글씨를 통해서도 그 위상을 알 수 있다.

우암 역시 필법에 조예가 있어 서단에서는 ’양송체(兩宋體)‘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다.

나라에서 동춘당에게 세자가 보고 배울 수 있도록 선현들의 격언을 정리하고, 또 그것을 병풍서로 써서 올리라는 명이 떨어진 것은 올바른 선택이었다.

동춘당은 선현들의 말씀 가운데서도 ‘명백하고 쉬운(明白簡易)‘ 것을 위주로 뽑았는데, 중국의 정자와 주자로부터 출발해 우리나라의 퇴계와 율곡의 말씀으로 맺었다. 때는 효종9년(1658, 53세)의 일로 당시 세자는 후일의 현종(顯宗)이었다.

동춘당 문집을 보면 그가 남긴 시가 거의 없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67제(題)에 불과한 작품조차 그 대부분이 사람이 죽었을 때 추모한 시다. 작품 중에 꿈을 노래한 작품이 눈에 띄었다.

“평생 퇴계 선생을 내 그리워했거니/세상 버렸어도 아직도 느꺼운바 있네/오늘 밤 꿈속에서 날 가르쳐주셨는데/깨고 보니 산에 걸린 달 창 밝게 비추이는 걸”

그는 ‘평생흠앙퇴도옹(平生欽仰退陶翁)’이라고 고백한 뒤 ‘차야몽중승회어(此夜夢中承誨語)’라 했다.

기몽(記夢)이란 제목의 시 작품은 놀랍게도 돌아가시던 해 정월 11일에 지었다. 공부를 막 시작할 때가 아니라 생을 마감할 때 이 작품을 지은 것이다. 이는 그가 평생을 주자와 함께 퇴계를 스승으로 따라 배우고자 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제대로 된 사숙(私淑)의 과정이다. 우암이 기록한 일화 속에도 “공은 동방 선현들 가운데 臍?선생을 가장 존경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동춘당은 온화한 성품으로 예학을 체계화했고 또 험난한 붕당의 시대를 비교적 평탄하게 산 사람이다. 그에게는 많은 일화가 있다. 청장관 이덕무의 저술인 청장관전서에 나오는 이야기다.

청장관은 일반적으로 선비들의 집에 가서 서책을 보면 첫 권은 손때가 묻었지만 그 나머지는 한 장도 넘기지 않은 상태라고 하면서, 동춘당의 사례를 든다. 동춘당은 남이 빌려간 책을 돌려 받을 때 손때가 묻어 있지 않으면 꾸짖고 다시 주어 읽게 했다.

이에 어떤 사람은 꾸지람을 들을까 두려워서 그 책을 일부러 깔고 앉고 발로 밟기 까지 해 돌려주었다. 청장관은 이를, 선현의 깊은 뜻을 모르는 한심한 일이라고 개탄했다.

동춘당은 특이하게도 시경(詩經)을 읽어 문리(文理)를 얻었다고 했다. 둘째 손자의 증언이다. 그런데 정작 시 작품은 거의 남기고 있지 않다. 주자(朱子)의 가르침대로 시의 효용(效用)을 수양에 두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동춘당의 어록 가운데, ‘공께서는 항상 인간 만사 가운데 좋은 자손을 두는 것 만한 것이 없다(公嘗曰 人間萬事 莫如有好子孫也)’라는 기록이 있다. ‘호자손(好子孫)’이란 부귀한 자손도, 세상에서 출세한 이도 아닐 것이다.

집을 잘 다스리고 수양을 통해 반듯한 행검을 하며, 가문의 전통을 계승하고 이를 후대에 이어주는 ‘봄바람’ 같이 따뜻한 사람일 것이다.

사후에 동춘당은 대전의 숭현서원(崇賢書院), 충남 논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 충현서원(忠賢書院), 충북 옥천의 창주서원(滄州書院), 충남 연기의 봉암서원(鳳巖書院), 충남 금산의 용강서원(龍江書院), 경북 상주의 흥암서원(興巖書院), 경남 거창의 성천서원(星川書院), 충북 청원의 검담서원(黔潭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이처럼 여러 서원에 배향된 것을 통해 우리는 동춘당 선생이 유림 사회에 끼친 크나큰 업적과, 풍속 교화에 널리 기여한 바를 알 수 있다.

다음은 성산 이씨(星山 李氏)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종가를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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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7/08/13 14:42




서수용 박약회 감사 saenae61@hanmail.net
사진= 남정강 한얼보학 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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