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대 종손 정해천(丁海天) 씨… "선대가 기뻐하는 일 하고 싶다"후손들에 꿈 주는 일 하고파 문중 땅 학교 부지로 희사정약용 등 배출한 명가의 종손… 26년간 교편 잡고 '스승의 길' 실천

‘정(丁)’이라는 글자는 쉬우면서도 어려운 글자다. 우선 쓰기 쉽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대개 이 글자를 ‘곰배 정’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남의 성을 말할 때 그렇게 부르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이를 테면 ‘나라 정(鄭)’ 시를 부를 때 ‘당나귀 정’이라고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적당한 뜻이 생각나지 않으면, 그저 ‘성 정(丁)’이라고 하면 된다. ‘나라 정(鄭)’씨와 구분이 필요하다면 넷째 천간(天干) 즉 갑을병정(甲乙丙丁)할 때의 정이라고 하면 된다.

그 외에 이 글자는 장정, 사물을 새는 단위, 당하다(부모상을 당했을 때 丁憂라 한다), 친절하다(丁寧, 재삼 간절히 당부함), 소리의 형용(丁丁, 도끼로 나무를 찍는 소리) 등으로 다양하게 쓰인다. 나라 정자와는 달리 나주 정씨의 정자는 짧게 발음한다는 것도 알 필요가 있다.

정(丁) 씨 가운데는 나주 정씨가 저명하다. 나주의 별호를 따서 금성(錦城)으로도 쓰며, 압해(押海)를 사용하기도 했다.

나주 정씨라고 하면 ‘구대(九代) 옥당집(玉堂) 집’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가문의 성취에 대해 국왕까지, ‘옥당(玉堂, 홍문관의 별칭)은 정씨 집안의 세전물(世傳物)’이라고 칭찬해 마지않았다 한다.

묘소 전경(고양시에서 용인시 양지면으로 이장)

나주 정씨는 정자급이 조선 개국과 함께 한양으로 이주해 승문원 교리를 지낸 이래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월헌 정수강, 병조판서와 찬성을 지낸 정옥형, 의정부 좌천성을 지낸 정응두, 대사헌을 지낸 정윤복,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정호선, 홍문관 교리를 지낸 정언벽 등 이름난 관리들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나주 정씨가 처음부터 이처럼 많은 인물이 배출된 것은 아니다. 동국여지승람이라는 책을 보면 인물조에 나주목의 정수곤 정수강 형제와 영광군의 정극인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월헌 정수강은 나주 정씨의 중흥조(中興祖)요 현조(顯祖)라고 볼 수 있다.

고 연민 이가원 박사가 쓴 월헌공 신도비명을 보면, 나주 정씨의 인물을 개괄하면서 성리학에는 우담 정시한, 문학에는 해좌 정범조, 실학에는 다산 정약용을 들었다. 이들 모두가 월헌공의 후손이라는 점에서도 ‘중흥조’라는 표현이 조금도 과하지 않다.

월헌집을 펴면 첫 머리에 어제어필(御製御筆)로 표기된 초서 한 장과 만나게 된다. 그 내용은, ‘석견호주집(昔見湖洲集), 금하문차편(今何聞此編)’ ‘전일에 호주집이 있는 줄 알았더니 오늘은 또 이런 문집이 있다는 말을 듣는구나’라는 내용을 국왕인 영조가 직접 글로 써서 남겼을 뿐 아니라 이를 간행해 올리라고 명했다.

이 아름다운 일화의 주인공은 월헌의 10대손인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였다. 해좌는 당시 최고의 문장가로 추앙 받아 공사간의 중요 문자를 독담했다.

종손 정해천 씨

조선의 대표적인 호학 군주인 영조는 해좌를 가까이 두고 수시로 자문했던바, ‘조상 중에 문집을 간행해야 될 만한 분이 있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이 때 해좌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때는 당쟁의 남은 화가 채 가시기 전으로 영남 남인 출신 관료로서 언행을 각별하게 삼가야 했다. 차마 그는 정시한의 우담집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고 시대적으로 멀어 당쟁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판단한 선조의 문집인 월헌집(月軒集)이 있다고 진언했다는 것이다.

영조가 언급했던 호주집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대제학을 지낸 채유후(蔡有後, 平康人, 1599-1660)의 문집인데, 그는 당시 승지였던 번암 채제공(1720-1799)의 방조(傍祖, 從高祖)다.

월헌 정수강의 17대 종손 정해천(丁海天, 1945) 씨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살고 있었다.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종손은 어린 시절 강원도 원주에서 살았다. 12대조부터 원주에 터전을 잡아 생활했던 종가에는, 속설로 ‘철마가 울면 떠나라’는 말이 전해 내려왔다. 철마(鐵馬)란 철도(鐵道)를 지칭하는 것으로 일제에 의해 중앙선이 개설되자 그 철마는 현실로 닥쳤다. 그렇지만 하루아침에 바로 떠날 수 없어 살다가 큰 수해를 만나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종손의 선친 대에 선대의 묘소가 있던 현재의 고양시 능곡으로 옮겨 앉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1968년 12월 24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현재의 위치로 돌아왔다.

종손은 원주에서 단구초등, 원주중, 원주농고와 강원대학교 농학과(1965학번)를 졸업한 뒤 1969년 ROTC 7기로 임관했다. 군 생활 중 월남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제대 후 종손은 포천 영중중, 문산종고, 고양종고, 향신고, 문산중, 교화중 등지에서 26년간 교편을 잡았다. 종손은 선대의 이력을 설명하다말고 낡은 스크랩 북 한권을 꺼내 왔다.

그곳에는 선대와 관련이 있는 화보나 글들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얼마간 빛바랜 신문 기사에는 월헌공과 그 이하 선대 묘소를 이장할 때 봉분에서 출토되었던 지석이며 복식 자료와 관련된 내용들이 실려 있었다. 당시 출토된 자료들은 단국대학교 박물관에서 ‘출토복식특별전(2006년 4월 25일)’으로 기획, 전시되기도 했다.

컬러사진으로 찍힌 월헌공의 지석(誌石, 무덤 앞에 간단한 생애와 업적을 기록해 묻는 돌이나 도자기) 13장은 그 연륜이 480년을 상회하는 것이었다.

종손은 자리를 옮겨 능곡고등학교로 안내했다. 그곳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의 토당동과 행신동 일대는 나주 정씨 월헌공과 그 후손들의 세거지(世居地)요 세장지(世葬地)였다.

그러나 지금은 후손들 대부분이 각지로 산거했고 분묘 역시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제일리(霽日里) 문중묘역으로 이장했다.

이 나주 정씨의 터전에 능곡고등학교가 들어섰고 문중에서는 아낌없이 땅을 희사했다.

학교 운동장 한 쪽에 세운 비석에는, “아무쪼록 이 역사적인 성지가 바야흐로 세계화 시대에 어울리는 문화와 신지식의 요람이 되기를 바라고 아울러 일취월장(日就月將) 발전하고 있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고장 고양시와 그리고 배움의 전당 능곡고등학교의 빛나는 내일을 기원해 마지않는다.”고 마무리 했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학교 뒤편 도당산(都堂山) 기슭에 조성된 아름다운 공원이었다. 그곳에는 한국문학비건립동호회(회장 이상보) 주도로 수립된 ‘월헌 정수강 선생 문학비’가 서 있었다. 효몽(曉夢, 새벽꿈)이라는 시가 눈에 들어왔다.

“닭은 세 번 울고 누수(漏水)는 오경인데/밤이 늦어 서쪽 달이 창을 비춰 밝도다/길이 대궐에 조회하던 이 마음 간절하니/방불하게 반열을 따르던 꿈을 놀라 깻도다”

종손은 ‘숭조위손(崇祖爲孫)’을 가훈으로 삼고 있다. 이는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전통에 뿌리를 둔 격언이다.

종손은 퇴직 이후 선대 사적에 관련된 자료를 살필 때가 많다 했다. 기회가 된다면 다른 종가의 모범적인 사례로 배워 자신의 집에 적용해보고 싶다고도 했다. 예전 어른들은 ‘견문(見聞)’을 얻기 위해 부지런히 출입을 했다.

종손이 그리는 것이 예전의 견문을 의미하는지 확언할 수는 없지만, 월헌공을 현양하는 여하한 일이라도 해야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선대께서 기뻐하고 후손들에게는 꿈을 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는 종손의 바람은 인상적이었다.

종손은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차종손 부영(富榮, 1974) 씨는 홍익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 정수강 1454년(단종2)-1527년(중종22) 본관은 나주. 자는 불붕(不崩), 호는 월헌(月軒)
학문 뛰어난 문장가… 문집엔 영조의 어필까지 실려

월헌 정수강 선생은 시조로부터 11대손이며 소격서령을 지낸 정자급(丁子伋)의 차남으로 황해도 배천에서 태어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의 당토동과 행신동 일대에 자리를 잡아 후손들이 대대로 살았다.

선생은 이미 십대에 사서오경(四書五經)은 물론 제자백가(諸子百家)에 이르기까지 두루 익혀 성종5년에 진사시에 합격했고, 그 3년 뒤에 문과에 급제해 여러 관직 역임했다.

그의 관직 이력을 보면 성종22년 이후부터 연산군5년에 이르기까지의 8년간이 공백으로 남아 있다. 성종22년에 가지고 있던 직책은 사간원 정언(正言, 정6품)이었다.

월헌집에 실린 영조 어필

생애 자료에는 적시되지 않았지만, 실록을 보니 동료들과 의견을 달리한 사유로 사직을 청한 그의 상소문이 올라 있다.

월헌은 이 때 국경을 범한 북방 오랑캐들에 대한 강력한 응징을 주청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사간원 동료들의 반대 의견을 따랐고, 이에 월헌공의 주장은 배제되었다. 월헌이 당시에 주장한 북벌론은 그 실상과 아울러 역사적이 의의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후 8년간 월헌에게 관직이 제수된 사실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월헌과 동갑인 매계(梅溪) 조위(曺偉)는 당시 동부승지(정3품)로 있으면서 ‘대간의 논의가 갈렸고 정수강이 본원(本院)과 서로 의견이 어긋나니 같이 있을 수 없다’고 그에 대한 경질을 아뢰었다.

매계는 점필재의 처남인데, 그의 문인이라는 이유로 연산군10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당시에 적소(謫所)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다시 부관참시당하는 화를 입었다.

월헌은 문장 뿐 아니라 학문과 행검이 모두 뛰어나 연산군 당시에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고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으나 끝내 사퇴로 일관해 연산군의 비위를 거슬러 ‘영구히 벼슬길에 들어 쓰지 말라’는 왕명이 있었다.

이는 평소 그가 평소 청정(淸淨)함으로 스스로를 지켜 벼슬에 뜻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연산군의 무도(無道)에 병을 칭탁해 조정에 나가지 않으려 한 점이 발각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이듬해에 중종반정으로 원종공신에 녹훈됨과 아울러 3대에 대한 추증이 있었다. 중종2년 9월 강원도 관찰사, 중종4년에 사간원 대사간, 중종13년에 사헌부 대사헌과 병조참판, 동지중추부사 등 직에 이르렀으니 당시 나이가 65세였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간행한 한국문집총간 11집에는 월헌집과 함께 그와 동갑인 추강 남효온(1454-1492), 매계 조위((1454-1503), 금남 최부(1454-1504)가 나란히 실려 있다.

이들의 이력을 보면, 추강을 제외하고 세 사람 모두 앞뒤로 문과에 급제해 벼슬살이를 했지만, 추강이 39세, 매계가 50세, 금남이 51세에 각각 세상을 떴는데, 추강과 매계, 금남 모두는 점필재의 제자라는 이유로 생전과 사후에 모두 참혹한 화를 피해가지 못했다.

이에 비해 월헌은 74세의 천수를 누렸다. 그러나 그 역시 연산군으로부터 영구히 서용하지 말라는 가혹한 탄압을 받은 바 있다.

월헌은 중종16년(66세) 맏아들이 얻어온 ‘월헌(月軒)’이라는 두 글자를 벽에 걸고 이를 자호로 삼은 뒤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시골에 은둔해 벼슬을 그만둔다는 ‘치사(致仕)’를 번복하지 않았다.

고 연민 이가원 박사가 쓴 국한문 혼용의 신도비의 명문(銘文)은 명문(名文)의 반열에 들었다 하겠다.

“임 나실 제 신이 도와 아름다운 이름 내려 천품이 이미 높으시고 옛글 읽어 학식 넓혀 높은 재주 한번 날아 용문에 오르셨오. 학문이 넉넉하고 밝은 임금 만나시어 벼슬길이 트이시매 금편당(金扁堂, 금 글씨 쓴 현판을 단 건물) 빨리 올라 학사(學士)님 높은 바람 일세에 날리셨소.

혼조(昏朝)가 혼탁할 제 푸른 댓닢 절개 짓코 바다 햇빛 거듭 밝아 그 공훈이 기록되어 글도 맡고 법도 맡아 아경(亞卿, 참판)에 이르셨오. 치사(致仕)는 하였으나 좋은 벼리 상기 남아 자손들에 말씀 일러 가득 넘침 경계하고 아담하신 그 풍류는 칠영삼로(七英三老) 모았었오. 가신 뒤 나라 은혜 가지도록 망극하여 끼친 책권 그 머리에 어필이 빛나 있고 후손이 번영하여 명현이 대 이었오.

월헌 문학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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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가까운 곳에 토당(土堂)이 아름답고 빗돌에 글 새겨져 우뚝이 세워노니 초동아 삼가 이 어른을 높여다오.” 사후 442년 뒤인 지난 1969년에 지은 글이다.

영조는 그의 문집을 얻어 보고는 즉시 이를 출판하라고 명했다. 이는 영조가 ‘길이 나라에 공을 끼친 구신(舊臣)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를 대내외에 알린 의의가 있다고 본다.

국왕의 어제어필 글까지 올라 있는 그의 문집은 지금까지 수차의 속간(영인본 포함)과 국역 간행이 이어졌지만 종회에서는 아직 미완의 과제로 남겨둔 듯하다.

이는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둘째 아들 정옥형의 초간(初刊) 발문과, 10대손 정범조와 다산의 부친인 정재원의 발문이 붙은 문집 3책이 온전하게 단행본으로 국역 간행되지 못한 때문이다.

월헌의 둘째 아들이 쓴 발문에 보면 경전과 여러 책들을 두루 익힘은 물론 시를 지음에 있어서 평담하고 전아해 예전 시인들의 체가 있다고 평했다. 여기서 ‘평담(平淡) 전아(典雅)’하다는 시를 평하는 용어가 눈길을 끌었다.

대체로 시를 지음에 있어서 세인들을 놀라게 할 기이하고 독특한 작품을 희구하게 된다. 퇴계 선생과 같은 분은 자신의 시를 고담(枯淡)하다고 했다. 이는 아주 맛이 없는 작품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를 오래 음미해보면 전혀 맛이 없지는 않다고도 했다. 쉬우면서도 어려운 경지다.

평담과 연관된 재미있는 기록이 있다.

상(上, 正祖)이 이르기를, “근세에 시를 말하는 자들이 걸핏하면 고(故) 처사(處士) 김창흡(金昌翕, 영의정 김수항의 아들, 호 三淵)을 꼽는데, 나는 그의 시가 치세(治世)의 음(音)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炙)되는 것’은 순전히 침울해하고 고뇌하는 뜻을 담은 시여서 충화(沖和)하고 평담(平淡)한 기상이 전혀 없다.

부귀한 집안의 자제로서 빈천한 처지의 사람과 같은 작품을 짓되 본래 의도하지 않고도 저절로 그렇게 된 듯한 점이 있었으니, 후생 소년들은 절대로 이를 본받거나 배우지 말아야 한다.” 했다.

이 글을 읽고서 월헌의 시를 다시 읽어보았다. 그의 시에는 처절한 고뇌나 참담한 현실을 잘 꾸민 작품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일견 음풍농월한 시도 보이고 또 어떤 것은 두보(杜甫)의 시를 옮겨 적은 듯해 전혀 농염(濃艶)하지 않다.

월헌의 업적을 논할 때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은 사유(師儒)의 위상이라고 본다. 월헌은 중종11년(1516년, 63세)에 사유(師儒, 선비들을 지도할 만한 학문과 인격을 갖춘 유학자)로 뽑힌다.

그 당시 대표적인 사유는 정암 조광조의 스승이기도 한 진일재(眞一齋) 류숭조(柳崇祖, 1452-1512)이다.

진일재는 월헌 보다 2년 선배이지만 문과에는 12년 늦게 급제한다. 또한 그는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를 당하기도 했지만, 진작 사유(師儒)로 뽑힌 이후 오랫동안 성균관 직을 맡아 많은 인재를 길렀다. 다른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월헌이 진일재의 죽음을 추도한 시 한 수를 통해 사유로서의 두 분 위상과 상호 교감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어릴 적부터 서로 만나 지금까지 왔는데/벼슬살이 풍파를 우리 함께 겪었었지/어찌타 그대 먼저 저승으로 떠나가시나/아 영원히 나를 알아 줄 세상에 없는 것을” 월헌은 진일재의 죽음 앞에 백아절현(伯牙絶絃, 거문고 소리를 잘 들었던 종자기가 죽자 명연주가인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고 연주를 그만두었다)의 고사를 인용해 만시를 마무리했다.

서초동 지하철역 앞에 자리 잡고 있는 나주 정씨 월헌공파종회를 찾았을 때 회관 내에는 2007년 7월 16일자로 간행된 국역 우담전집이 반질을 앞두고 쌓여 있었다.

종회 측으로부터 월헌집 역시 이미 국역을 마친 상태로 출판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파종회 소유의 회관 빌딩에는 ‘다산(茶山)학술문화재단’도 입주해 있었다. 종회 운영의 의범(懿範)을 이곳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은 경주 최씨(慶州 崔氏)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 종가를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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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수용 박약회 감사 saenae6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