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에 생명을 넣어라" 첨단공학의 종합마술기계·전기·전산·네트워크의 절묘한 융합… 2005년 첫 보행 성공은 잊을 수 없는 순간APEC 정상회담 때 춤추는 로봇도 '호평'… 올 연말 로봇 4대 고난도 단체기술 공개도

유범재(44) 박사와 통화하기란 거의 술래잡기 수준이다. 곧 끝날 거라는 회의 시간에 맞춰 전화해 보면 그새 또다른 회의중이다. 말 한마디라도 제대로 걸자면 일단 해가 지고 봐야 된다. 요즘 그의 일과 대부분은 릴레이 회의로 돌아간다.

“ 대형 연구과제 하나가 한창 막바지라 거의 제 방에 앉아 있을 틈이 없습니다. 힘들거나 피곤한 게 아니라 즐겁습니다. ”

인기 로봇 박사의 숙명이니 어쩔 수 없다. 그는 현재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의 인지로봇연구단장으로, 인간형 서비스 로봇 개발 과제의 총괄 책임자 역할을 맡고 있다. 움직이는 로봇 ‘마루’와 ‘아라’를 탄생시킨 숨은 주역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들이 만들고 있는 로봇은 ‘네트워크 기반 인간형 로봇’이다. 국내에서 인간형 로봇을 개발하는 곳은 두 곳, KAIST와 이곳 KIST. 그중에서도 외부 네트워크와의 교신을 통해 움직이는 인공지능 로봇 개발이 이들의 주력 분야다.

이를테면 로봇의 두뇌는 바깥에 있고 그 몸체는 단말기처럼 사용되는 식이다. 핵심 소프트웨어만 갖춰져 있는 한 로봇 기능을 얼마든 다양하게 확장할 수 있는 특징이 있다. 2005년 1월에 발표, 당시 전세계적으로 이 같은 사례가 없었던 터라 국내외로부터 큰 반향을 일으켰다.

로봇은 여러 공학 분야가 한데 어울려 빚어내는 종합 결정체다. 기계, 전기, 전산, 네트워크 등 각 전문기술이 서로 한 치 빈틈없이 맞물려야 비로소 로봇의 동작이 가능하다. 인간형 로봇 안에는 32개의 관절이 들어가 있다.

단 한 군데만 잘못돼도 로봇이 제멋대로 움직인다. 오동작 원인도 각양각색. 움직이는 동작중 우연히 하드웨어 틈새로 전선이 끼이거나, 자주 사용하는 관절의 경우 연결 전선이 끊어지기도 한다. 로봇 안에 들어있는 보드가 약 80장.

IC(집적회로) 하나에 달려있는 전선 연결부만 쳐도 약 3백개에 이른다. 이 깨알같은 IC의 납땜 한 군데만 부실해도 로봇이 말을 듣지 않는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으니 더 답답한 게릴라들이다.

현장 연구원들의 경우, 하드웨어 조립 등은 가장 기초적인 과정이다. 무엇보다 로봇을 움직일 핵심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일이 최대 임무다. 순수한 자체 기술에다 외국 수준보다 한 발 앞선 기술을 개발해야 하는 부담이 전제된다.

간단한 핵심 소프트웨어 하나를 짜는데 걸리는 시간이 최소 2달. 직접 PC째 들고 실험실로 달려가 직접 로봇에 입력, 프로그램의 성공 여부를 즉석에서 확인하며 수정과 보완을 반복한다. 수없는 테스트와 수정, 단순 반복 작업이 수반되는 지구력 싸움이다.

현재 국내에 있는 인간형 로봇은 두발로 걷거나 음악에 맞춰 율동하기, 물건 집어올리기, 그리고 앞에 선 사람을 식별해내는 단계에까지 와 있다.

유 박사 팀의 경우, 최대 25명까지 데이터를 입력해 로봇이 사람을 인식해내는 능력을 확인했다. 한 사람당 걸리는 인식 시간이 0.2초. 사람보다는 더디지만, 더딘 것이 아니다.

“ 2004년 시작땐 0.5초가 걸렸어요. 단 0.3초를 단축하는데 거의 3년이 걸린거죠. ”

일본의 스타 로봇 ‘아시모’의 탄생에는 20년의 세월이 걸렸다. 전세계를 놀라게 한 아시모는 세계 최초로 안정되고 유연한 걸음걸이를 선보인 ‘2족보행’ 로봇이다.

로봇 개발은 흥미롭기도 하지만, 꼼수나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 분야이기도 하다. 일반인 누구에게라도 성패 판정이 가능한, 무섭도록 OX가 분명한 일이다.

지금도 간담 서늘한 기억이 있다. 로봇의 걷기 실험이 거의 완벽에 이르렀던 3년전 어느 날, 확신에 찬 유 박사는 자신있게 내부 시연을 준비했다. 그간의 실험결과로 보아 실패란 있을 수 없었다.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자, 걸어보라’는 명령을 던진 순간, 곧바로 일이 터졌다. 로봇의 첫 발이 비정상적으로 확 내뻗쳐지더니 그대로 옆으로 넘어져버렸다. 단 1초도 안돼 벌어진 사태다.

“ 현장에서 도저히 복구가 안돼 결국 시연을 중단하고 모두 해산시켰어요. 1주일쯤 걸려서 밝혀진 원인은 과열때문이었어요. 시연회를 한다고 처음 옷(철제 외피)을 입혔다가 내부의 기계열이 안으로 갇히면서 과열이 발생해 오동작을 부른거죠. 그날 이후론 시연만 있다하면 먼저 가슴이 철렁하죠(웃음). ”

인간형 로봇에 드는 원재료비만 약 1억원. 한번 쓰러질 때마다 허탈감도 허탈감이지만 잘못 바닥에 부딪치면 하드웨어, 소프트웨어까지 타격을 받는다. 쉬 복구도 되지 않는다.

현재 국내 로봇은 바퀴형에서 인간형 서비스 로봇으로 바뀌어가는 단계. 두 발로 걷는 동작 자체만해도 고도의 기술이 만들어낸 결실이다. 웃지못할 해프닝도 심심찮게 만난다.

“ 바퀴로 굴러가는 로봇을 보여주면 다들 ‘이게 무슨 로봇이냐’고들 해요. 다들 만화나 영화를 너무 많이 보셔서 그래요. 로봇이라면 모두 아톰이나 태권브이 같이 생겨야 되는 줄 알거든요(웃음) ”

유 박사 역시 아톰이니 태권브이, 마징가제트 등 로봇 만화영화를 보며 소년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 로봇들 뒤에는 꼭 그 로봇을 만든 박사들이 나온다’고 기억하는 게 대략 전부다.

1981년 서울대 제어계측공학과에 입학했다. 지원 전 선배들에게 물어보니 ‘거기 가면 로봇을 만들 수 있다’길래 아무 생각없이 ‘그냥’ 진학해버렸다. 87년과 91년, KAIST에서 각각 석,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직후 선배가 창업한 한 중소기업에 근무하게 되면서 로봇용 제어기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로봇과의 첫 대면이었다. 1994년 KIST로 옮긴 뒤, 곧장 반인반마형 로봇 개발 작업에 합류했다. 상체에는 두 팔, 하체에는 네 발이 달린 로봇이다. 그중 일부인 로봇의 인공시각 시스템을 맡았다가 서서히 로봇 개발 전체로 그의 역할이 넓혀졌다.

현재의 로봇을 만들기까지 사전 훈련단계나 다름없었던 일명 ‘베이비 로봇’ 개발 시절도 있다. 1997년부터 2004년까지 약 8년. 도중에 아시모의 ‘폭격’을 맞았다. 2001년 어느날, 그는 외국의 한 국제학술대회장에 앉아있었다. 그런데 주요 주제 발표를 위해 연단에 나선 일본측 연구팀이 2족보행 로봇 아시모의 개발 소식을 공식 발표했다. 순간, 머리를 정통으로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 너무나 충격적이었어요. 한편으론 희망도 주었죠. 그런 로봇이 정말 가능하다는 것, 그럼 우리도 뭔가 하면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의욕과 자극 같은 것이요. ”

국내에서도 차츰 로봇의 상품화 가능성이 대두되면서 한때 산업용 로봇 지원 이후 끊어졌던 국가적 지원까지 부활했다. 2004년 정보통신부에서는 URC 사업을 전격 발표, 본격적으로 인간형 서비스 로봇 사업 추진에 나섰다. URC란 IT기술과 로봇 기술을 합친 형식의 로봇 개발 개념. 한마디로 무선 네트워크를 이용해 인간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서비스가 가능한, 좀 더 똑똑한 로봇을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해당 과제 책임자였던 유 박사를 비롯해 개발팀의 땀과 고생은 대단했다. 네트워크형 로봇 관련 기반 기술이 전혀 없는 황무지에서부터 출발해야 했다. 당시 진대제 장관은 ‘특별추진위원회’까지 구성해 직접 참여할 만큼 지대한 관심과 국가적 추진력을 보였다. 개발팀은 KIST 연구팀을 주축으로 KAIST, 삼성전자 등 12개 기관 또는 대학의 참여로 전격 가동됐다. 약 150명의 연구 인력이 사업에 투입됐다.

“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 해야 이걸 좀 빨리 해낼 수 있을까, 그 생각뿐이었어요. 성공하기만 한다면 국내 선두의 기술이 된다는 생각에 개인적으로도 아주 흥미진진했지요. ”

다들 주5일제도 자진포기했다. 거의 매일 새벽 2시까지 작업, 꼬박 밤을 새는 일도 많았다. 1년여동안 그같은 시간이 계속됐다. 초기의 시행착오란 헤아릴 수도 없다.

“ 가장 큰 숙제는 걷기였어요. 이를테면 나무 젓가락들을 이리저리 엮어서 인간 모습으로 만들어놓고 내가 신(神)이 되어 그 나무젓가락 뭉치가 저 혼자 걷도록 만들어야 되는 일이었죠. ”

바닥에 부딪칠 경우 발생할 로봇 손상을 막기 위해 로봇의 양 어깨에 줄을 길게 매달아 올린 채 실험을 진행했다. 시작후 반년쯤 지나자 서서히 저 혼자 걷기 시작했다.

2005년 3월 대전에서의 특별한 기억. 로봇의 걷기 성공 소식이 상부에 보고되면서 정보통신부와 언론 등을 거쳐 시연이 이뤄졌다. 그리고 마침내 대통령의 앞까지 이르렀다. 예정된 시연 장소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전날부터 내려가 현장을 점검하며 준비하던 중 문제가 발생했다. 네트워크 불통으로 로봇이 전혀 꼼짝달싹 하지 않았다. 알고보니 통신연구원내의 자체 무선 신호가 워낙 강해 유 박사팀측 네트워크가 약해진 탓이었다. 시연 시간동안만 자체 무선 장비를 잠시 꺼줄 것을 통신연구원측에 부탁했다.

이튿날 아침. 대통령이 안으로 들어설 때 로봇이 열 걸음쯤 걸어나가 인사한 뒤 악수를 나누고 엘리베이터쪽으로 안내하는 것이 로봇의 역할이었다. 경호 문제 때문에 유 박사는 멀찍이 선 채 내내 가슴 졸이며 광경을 지켜보았다.

“ 그때 그 불안한 심정은 아무도 모를 겁니다. 시연시간이 불과 10여분이었는데, 그 시간이 그렇게 길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무사히 끝난 뒤 기쁨과 보람도 그만큼 더욱 컸구요. ”

2005년 10월에 있었던 APEC 정상회담도 그에게 한국 로봇개발자로서의 자부심을 더해주었다. 당시 IT 전시회에서 아리랑 연주에 춤을 추는 로봇을 공개, 부시 미 대통령 등 각국 정상들의 깊은 관심과 시선을 받았다. 국가적인 보람이기도 했다.

그의 평균 귀가 시간은 밤 11시. 늦을땐 새벽 2시를 넘기기도 한다. 그나마 몇 년전보다 나아진 형편이 그렇다. 토요일도 ‘종종’ 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사치에 가까운 여가다.

“ 저는 이렇게 공부하고 연구하는 일이 스스로 만족스럽고 즐겁습니다. 젊은이들에게 가장 들려주고 싶은 말도 누가 뭐라든 본인이 가장 즐겁고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겁니다. ”

올 연말께 유 박사는 또하나의 기록 갱신에 도전한다. 이번엔 로봇 한 대가 아니라 넉 대를 사용해 벌이는 모종의 고난도 단체기술이다. 작년 봄에 시작한 연구가 판정대에 오른다. 인간이든 로봇이든 공존공생의 시대. 성공 여부는 장담할 수 없지만 한가지는 틀림없다. 시연 시간동안 유 박사의 심장 박동소리가 얼마나 커질지 가히 짐작할 만 하다.

■ 인간형 로봇 개발자가 되려면

전기, 전자, 제어계측공학, 전자통신, 기계공학 등 관련 학과 전공자에 한해 도전 가능하다. 대학원 재학중이라도 일찍 로봇 개발 작업에 참여하고 싶다면 UST(과학기술연합대학원)로 입학해 연구소 파견 형식으로 현장을 빨리 접할 수 있다.

KIST의 경우, 매년 봄과 가을, 2차례에 걸쳐 정기 공채가 실시된다. 최소한 석사 학위 이상 소지자라야 한다. 인지로봇연구단의 경우 매 공채별 채용 인원이 3명 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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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주 기자 pinpl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