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세 종손 김해일(金海鎰) 씨"참되고 깨끗하고 예스럽게" 청백의 전통 오늘에 되살려

김해일(왼쪽 아래) 씨와 종부 차종손
안동 김씨의 대종택의 당호는 ‘양소당(養素堂)’이다. 양소당의 의미는 ‘질실순고(質實純古)’에서 따온 것이다. ‘질박(質朴)하고 참되며 깨끗하고 예스럽다’는 의미다.

꾸밈이 없는 참된 면, 그리고 순수(純粹)하고 고졸(古拙)한 경지를 말한다. 한문 비평용어는 일차적으로 그 글자가 들어간 단어를 떠올리면 의미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재차 유사한 단어를 더해본 것이다.

‘양소’에서 핵심 글자는 ‘소(素)’자다. 희다는 의미가 기본이며, 흰 비단이란 뜻을 가진 글자다. 나물도 주요한 뜻이다. 여기에서 시작해서, 꾸밈이 없다, 근본, 미리 하다, 평소, 정성 등 여러 의미로 갈라진다.

순수하고 깨끗한 것은 사치(奢侈)한 것을 고칠 수 있는 처방전이다. 그래서 이러한 태도를 기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순수한 것을 길러서 마침내 풍속을 순박하게 하고, 그 기질도 후하게 만들겠다는 염원을 이 집 당호는 담고 있다. 이러한 시각은 모두 공자의 말씀에서 나온 것이다.

안동 김씨의 찬란한 성취 뒤에는 ‘소’라는 글자의 본래 의미를 충실히 따라 배운 실천이 있었다고 본다. 씨족 구성원들이 선비의 정도(正道)에서 벗어나지 않아서 이룬 ‘세덕(世德)’이 많았다는 말이다.

태사 김선평의 10세손으로 조선 중기 안동 소산 출신의 학자요 정치가였던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의 가르침에도 이러한 정신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오가무보물(吾家無寶物) 보물유청백(寶物惟淸白)’. ‘우리 집안에는 세속적인 의미의 보물은 없다. 그러나 정신적인 의미의 보물은 청백이란 것이 있다’는 의미다. 청백(淸白)과 소(素)라는 글자는 썩 잘 어울린다. 이 집의 빛나는 휘장(徽章)과 구물(舊物)은 ‘소(素)’라는 한글자다.

안동 김씨 대종택 당호인 양소당은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素山里)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소산(素山)은 본래 소요산(素耀山)으로 해발 138m인 조그마한 산이다. 이 마을 이름은 본래 금산촌(金山村)이었다.

금산촌은 1637년(인조15) 청음 김상헌(김태사 15세손)이 남한산성으로부터 이곳으로 왔을 때 소산(素山)으로 고쳤다 한다. 이는 1608년에 완성한 안동 최고의 읍지인 영가지(永嘉誌)에 보면 소산은 없고 금산촌(金山村)이란 지명만 보이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안동 김씨 대종택 전경

23세손 동야 김양근이 쓴 ‘경향(京鄕) 삼파(三派)가 터전을 잡은 사실 기록’이란 글에서도 보면, 판관공 부인 권씨가 서울 장의동(壯義洞)으로부터 다섯 아들의 손을 잡고 다시 안동 풍산 서면(西面) 금산촌으로 옮겨 자리 잡았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금산촌은 오늘날의 소산 마을이다.

이 글에 보면 권태사의 후손들은 그대로 안동부 부내 강 남쪽 지역인 강정촌(江亭村)에 자리 잡았고, 그 후대에 풍산현 남쪽 불정촌에 살다가 판관공 부인이 서울에서 내려와 현재의 소산으로 터를 잡았다 한다. 9대손 비안현감의 종가가 23대손 동야 김양근 당시까지 남아 있음을 자신이 확인하고 있다.

당시 집터는 마을 뒷산 쪽인 역동(驛洞)이었다. 그 지역은 세조 당시 불교계에 큰 공을 세웠던 11세 주손으로 태어난 학조대사에게 국왕이 산을 분할해 하사했고 이곳에다 부친인 판관공을 장사지냈다.

그러나 학조대사는 출가해 종통을 계승할 수 없게 되자 아우인 장령공 김영수가 종통을 계승했다. 기록에 보면 장령공은 1500년 봄 종가가 무너질 것을 염려해 완전히 철거한 뒤 옛 규모보다 크게 새 집을 지었다.

그 해 겨울 벼슬이 내려졌고 그 이듬해에 상량을 올렸는데, 상량 기록은 둘째 아들 서윤공 김번이 썼다. 판관공은 타고난 효자였다. 오늘날 안동의 대표적 정자로 남아 있는 삼구정(三龜亭)을 지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삼구정은 안동에 남아 있는 대부분의 정자와는 달리 노모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지은 것이다.

삼구정에 올라보면 사방으로 툭 트인 상쾌한 경관에다 일세를 풍미한 대가들이 앞 다투어 지어준 시문과 기문들로 넘쳐나 감상의 즐거움을 감내하기 어렵다. 1676년(숙종2), 1761년(영조37)에 서윤공의 제택에 대한 수리가 있었고, 청원루(淸遠樓) 역시 소산에 있다.

이곳에서 청음 김상헌이 1637년(인조15) 남한산성에서 결사항전의 뜻이 꺾이자 소산으로 낙향해 거처한 바 있다. 이 집은 1605년(선조38)에 외랑(外廊)에 물에 떠내려가기도 했으나 뒤에 복구되었다.

삼당공 김영과 서윤공 김번 형제는 서울로 다시 돌아가 장의동과 청풍계 일대에서 살았다. 승지공파는 교하 선대 묘소 지역과 안동 예안 등지에서 살다가 나중에 소산으로 들어와 살고 있다.

서윤공파는 장동에 살고 더러는 타도와 타읍에 살고 있다. 대사성공파는 불정촌으로 부터 안동 길안면 묵계(黙溪) 지역으로 옮겨가 한마을을 이루어 세거하고 있다.

양소당 태고정 중건식 장면.
양소당

‘양소당’이라는 당호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동야 김양근의 문집인 동야지 권7에 양소당기(養素堂記)가 실려 있다.

이 글을 읽어보면 양소당은 자신의 당호이면서 보다 범위를 넓혀 당초부터 안동 김씨 대종택의 당호로 쓰기 위해 지어진 것임을 느낄 수 있다. 족보를 보면 동야공은 부친과 아들 삼대(三代)가 모두 양자로서 종통을 계승한 이다. 종가를 상징하는 확실한 표지가 필요했을 것이다.

김태사의 종손을 대(代)가 아닌 세(世)로 표기한 데는 사연이 있다.

김태사는 1세로부터 6세까지가 불확실한 세대다. 이는 대종중에서 밝힌 내용이기도 하다. 안동 김씨 후예들은 온갖 정성을 다해 불확실한 세대를 밝히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과제로 남았다.

안동 김씨는 시조 태사 김선평에서 1세인 공수부정(公須副正)을 지낸 습돈(習敦)에 이르기까지 중간에 세계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부득이 공수부정을 1세로 쳐서 족보를 닦았다. 김해일 씨는 공수부정으로부터 31세 주손이다.

안동의 삼태사인 권행(權幸)의 후손들이 40대에 달하는 것과 비교한다면 안동 김씨 종계는 여러 대의 실전(失傳)이 있었다는 느낌이다.

소산 마을에 가 ‘안동김씨종택’이라고 적힌 문화제 안내표지판을 읽고서 족보를 보니 한성판윤 5형제 중 막내집으로 내려온 사실과, 그의 증손자대에 이르러 다시 둘째 집으로 종통이 계승된 점에 대해 의문이 생겼다.

사랑방에서 글을 배울 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과거에 급제한 동야공 김양근을 인견한 영조대왕은 기분이 좋아 작성한 시권(試券) 문구를 외우게 했고, 그러나 중간에 막히자 편법을 쓰지 않은 정직한 태도에 반해 여러 가지 사실을 묻던 중, ‘경(卿)의 집안 대종손은 누구요?’라 했다.

이에 김태사 이후 굴곡이 있던 종통 문제에 다시 곤혹스러워하자, ‘그렇다면, 오늘부터는 경이 종손을 하시오.’라 했다 한다. ‘왕무희언(王無戱言)’이라. 국왕은 우스개 말씀이 없다는 말 때문에 그대로 따랐다는 야담(野談)이다.

안동 권씨 권태사 종손집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거니와,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안동 김씨의 대종가가 남아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사실 여부는 즉시 확인할 수 없다. 양소(養素)의 정신에 어긋나는 야담이요 억측인 것 같아 마음이 개운하지만은 않다.

그러던 중 안동 김씨 대종중에서 발간한 ‘안동김씨연원록’이라는 유인물을 보게 되었다.

58면에, ‘오김종통(吾金宗統)’이란 기술이 눈에 들어왔다. 주된 논지는, 맏아들로 종통이 계승되어야 함은 분명한 원칙이지만, 그와 동시에 종통을 계승할만한 자질도 있어야 한다. 이는 혈통의 존엄성과 순수성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지차로 종통을 계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인흔(因痕)’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인흔이란 종통을 계승할 수 없을 정도의 결정적인 하자(瑕疵), 흠, 즉 결격사유(缺格事由)가 있었음을 말한다. 그 자료에서는 이를, 혈통적 결함, 신상적 결함, 환경적 결함으로 들었다. 비로소 지난날의 의문이 조금 풀렸다.

종손 김해일(金海鎰, 족보명 千鎰, 1948년생) 씨는 현재 서울시 강남구 도곡2동 아파트에 살고 있다. 종손은 5살 때 문중의 공론으로 삼종숙(三從叔)인 학년(鶴年) 씨에게로 입후해 종통을 이었다.

안동서부초등, 서울 남대문중, 서울 광운고, 동국대 행정학과(1967학번), 숭실대 경영대학원 졸. 학교를 마친 뒤 종손은 동양나일론(효성 전신)에 입사해 직물분야의 일을 보았다. 직장에서 나온 뒤 이와 관련된 분야에서 개인 사업을 시작해 지금까지 꾸려오고 있다.

종손의 서재를 둘러보았다. 정갈한 서가에는 손때 뭍은 책들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막 펼쳐본 듯한 책은 이문열의 산문집과 종가와 관련된 신간, 그리고 고향 안동에서 발간된 월간지였다. 그 한 쪽에 성균관대 유교지도자 고급과정 교재 한 권도 놓여 있었다.

“뭐, 제가 알아서가 아니고, 하도 모르는 게 많아서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초등학교를 마친 뒤 서울로 와 지금까지 살고 있는 종손은 문중 역사나 유학 일반 상식에 대한 식견이 상당하다.

이는 주변에서 이끌어주는 이가 없다면 불가능하다. 그래서 가학(家學)에 대해 물었다. 저는 문중 어른들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소림 선생님으로 잘 알려진 김제동(金濟東, 1919년생, 대구고보, 일본대학 법문학부 졸, 35년 기자생활) 옹과 안동에 계시는 김태년(金泰年, 85세) 옹, 그리고 대종회 김형진 회장님이 제 선생님이십니다.

‘제사는 어떻게 모시고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 “저희 집의 가훈이 청백전가(淸白傳家)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세상에서는 안동 김씨 제사 볼 게 없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우리 집안의 전통입니다. 저도 이러한 가르침을 따라 정성을 다하되 제수는 정갈하면서도 간소하게 장만합니다.”

올 가을 안동 김씨 문중 숙원사업이었던 태고정(太古亭)이 중건되었다. 태고정은 안동 김씨 문중의 상징적인 정자로서 당초 서울 풍광이 아름다웠던 청풍계에 초가집 형태로 있었다.

이 정자는 역대 제왕들이 거동해 어제(御製)와 어필(御筆)을 남겼을 뿐 아니라 이름난 관료와 학자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다. ‘도성 안의 산과 수풀이면서도 속세를 벗어난 듯한 별천지로 의연히 태고(太古)의 기상이 있는’ 이 정자는 12세 삼당 김영이 1522년(중종17)에 서울 청풍계(淸楓溪, 어필은 淸風溪로 표기됨. 현 청운동 52)에 초가집으로 지은 것이다.

그러다 손자 창균 김기보가 가솔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갔고, 선원 김상용이 치장하여 거처했다. 선원은 삼당의 종증손이다.

이 정자에 ‘청풍계(淸風溪, 원본 소실)’라는 선조(宣祖)의 어필이 걸려 있었던 것과, 정조 대왕이 황폐해진 정자를 국가 예산으로 복원하라고 지시한 사실을 보면 그 격을 가늠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에 복원된 이 정자는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실추시키지 않는 거룩한 장소로 길이 보존했으면 한다.

종중에서는 태고정 중건과 발맞춰 삼구정 아래 삼당 김영이 지은 시조 한 수를 빗돌에 새겨 세웠다.

“빈 배에 섯는 백로 벽파에 씻어 흰가/네 몸이 저리 흰들 마음조차 흴소냐/만일 마음이 몸과 같으면 너를 ?아 놀리라.” 소산 출신으로 소산의 정신을 가장 잘 노래한 시조라고 본다.

종손 가운데 14세 창균(蒼筠) 김기보(金箕報, 1531-1588)의 비중이 높다. 창균은 퇴계 이황과 청송 성수침의 문인일 뿐 아니라 안동 출신 명신(名臣)인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의 손서요 벽오(碧梧) 이문량(李文樑)의 사위기도 했다.

동서인 금계 황준량(1517-1563, 퇴계 문인)과는 농암의 정자인 애일당(愛日堂)에서 날마다 책상을 마주하고 학문해, 상공(相公)집의 두 사위로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한다. 퇴계는 ‘타고난 자질이 매우 고명(高明)하다’고 했다.

이 분이 증조부인 장령공(金永銖)과 조부인 승지공(金瑛) 양대(兩代)의 묘갈명을 퇴계 선생에게 청해 받은 바 있다. 또한 금계 황준량은 물론,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 한강 정구와의 밀접한 학문적 교유는 이후 안동이라는 영남 남인 세상에서 소산의 안동 김씨들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데 기여했다고 본다.

종손은 연주 현씨(延州 玄氏)와의 사이에서 2남을 두었다. 차종손 준구(俊求, 1978년생) 씨는 중앙대 사범대(영어교육 전공)를 나와 직장 생활을 하고 있고, 차남 민구(珉求, 1990년생)는 고등학생이다.

● 김선평 (901년(신라 효공왕 5년)~몰년 미상)
안동 김씨의 시조… 고려 개국에 혁혁한 공 세워

김선평(金宣平)은 안동 김씨의 시조이다. 기록에 의하면 태사공(太師公)의 모습을, ‘봉의 눈과 용의 수염을 가졌고 눈이 별과 같이 반짝였으며 스물여섯 살에 고창성주(古昌城主)가 되셨다’고 적고 있다.

김태사는 문무의 재질에다 더해 명철한 판단력의 소유자였을 것이다. 김 권 장 삼태사는 후백제 견훤 군을 맞아 지역을 안도(安堵)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그 중에서도 김태사는 당시 고창(古昌, 현재의 안동지역) 고을의 성주(城主)였다. 김태사는 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三韓壁上三重大匡太師亞父功臣)에 봉해졌다. 매우 복잡한 관직이라 풀이가 필요하다.

태고정 중건식 장면

삼한(三韓)은 고려(高麗), 벽상은 공신당(功臣堂)에 초상을 그려 거는 최고의 공신이다. 삼중은 대광(大匡)이란 작위를 세 번에 걸쳐 받았음을, 태사는 고려의 정1품 문관 품계, 아부는 최고의 존칭이다.

안동 최고의 읍지인 영가지에 보면, “병산(屛山)은 안동부에서 북쪽으로 10리 떨어진 곳인데, 고려 태조가 견훤과 그곳에서 싸웠다. 그 때 견훤이 패해 달아났고 시랑 김악은 사로잡혔다.

죽은 사람이 8천이라 했는데, 시체가 쌓여 개울을 막았고 물은 거꾸로 흘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으로 치열한 전투가 안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안동까지 온 왕건은 이미 지금의 경북 대구 지역인 공산전투에서 재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견훤군에게 패한 상태였다. 그런 왕건이 이 같은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안동에서 전열을 정비했음은 물론 김태사를 중심으로 막대한 인적 물적 지원을 받았다는 추단이 가능하다.

기록을 보면, 김태사는 두 태사와 함께 견훤군의 배후를 습격해 승리를 결정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다. 그렇다면 김태사는 그의 작위에서 말해주는 바처럼 고려 개국에 있어서 최고의 공을 세운 것이 분명하다. 고려사(高麗史)에서도 이 전투를 ‘고창지첩(古昌之捷)’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필자는 삼태사의 역사적 평가를 생각할 때마다 권태사의 외손인 퇴계 이황이 쓴 글을 흥미롭게 다시 읽는다. 퇴계집 42권에 올라 있는 ‘안동부삼공신묘증수기(安東府三功臣廟增修記)’다.

타협의 여지가 없는 문제였던, 세 공신의 순차(順次)를 어떻게 썼을까 살폈다. “안동부관청 담 안에 삼공신 묘우가 있고 그곳에서 고려 태조공신 세 분을 제사하는데, 김공 선평(宣平) 권공 행(幸), 장공 정필(貞弼)이다”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는 부(府)가 신라의 행정구역이고 삼공은 신라 사람이며 당시 태조가 견훤을 토벌함에 있어서 삼공들은 관할 군 전체를 들어 태조를 도왔다. 이로 인해 병산전투에서 크게 이길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의로운 명성이 크게 일어났고, 안동 지역은 견훤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삼공의 결단은 고려 왕조에게 있어서는 큰 공을 세우게 했고, 고을 백성들에게는 큰 덕을 베푼 역사적 의의가 있었다는 논리다. 문제는 유가(儒家)의 의리적(義理的) 관점에서 보면 석연치 못한 점이 없지도 않다. 관점에 따라서는 신라의 성주요 백성으로서 신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일어난 고려의 지도자에게 투항한 셈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퇴계 선생은 이 점을 어떻게 설명했을까? 글의 말미에서 퇴계는 참으로 명쾌한 논리를 폈다. “후인들이 만약 불행하게도 변란을 만난다면, 그 나라가 망한 신라(新羅)가 아니요, 그 적이 저 역적 견훤이 아니며, 군사들이 저 고려(高麗)와 같이 바른 이들이 아니면서, ‘나는 권도(權道,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택한 결정)로 적들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다’라고 한다면 왕법(王法)이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점을 또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다”라 했다.

자세히 읽어보면, 삼태사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그 같은 결정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솔로몬의 선택’이다.

천여 년을 이어 지금도 정일(定日)로 안동 태사묘(太師廟)에서 삼공신을 제향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삼공신은 단순히 해당 씨족만의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안동 지역 사람이라면 누구나 친손 또는 외손이 아닌 사람이 드물다.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길은 당시로서 옳은 길이었다고 본다.

그래서 오늘날의 안동과 안동문화를 있게 한 이들이기 때문에 함께 경배할 대상이라고 본다. 묘우에는 중심에 권태사를, 동쪽에 김태사, 서쪽에 장태사의 위차로 모셔져 있다. 묘우의 위차 문제는 김, 권 양가에서 오랫동안 심각한 문제로 갈등을 빚기도 했다.

23세 김양근이 편찬한 ‘태사묘사적(太師廟事蹟)’은 정조 당시(정조15, 1791) 이해 당사자인 안동 권씨와 큰 분쟁을 야기했다. 국왕까지 중재에 나섰지만 여의치 못할 정도였다.

** ‘종가기행’ 연재를 이번 호로 마칩니다. 장기간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 드립니다. 종가기행은 단행본으로 나와 서점에 배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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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수용 박약회 감사 saenae6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