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서 견제받는 중국 제치고 ‘큰손’ 등극

일본 기업들은 자신들의 기술과 품질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그 때문에 과거부터 자체 기술력을 바탕으로 세계 시장에 존재감을 드러내왔다. 다른 기업을 사들여 기술과 인재, 시장을 한꺼번에 획득하는 인수합병(M&A)에 미온적이었던 것도 자신들이 최고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하지만 근래 들어 일본 기업들이 세계 M&A 시장을 주무르는 큰손으로 부상하고 있어 주목된다.

일본의 해외 기업 인수합병(M&A)이 크게 증가하는 가운데 일본 대표 정보기술(IT) 기업 소프트뱅크의 M&A 행보가 특히 두드러지고 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사진)이 한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는 모습. 연합

전 세계적으로 기업 인수합병 시장이 활황세를 나타내고 있다. 최근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가 톰슨로이터 자료를 인용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올해 들어 3분기까지 이뤄진 전 세계 인수합병 거래 규모는 금액 기준으로 무려 3조3000억 달러에 달했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40%가량 증가한 수치라는 분석이다. 특히 올해 전 세계에서 이뤄진 M&A 규모는 사상 최대 수준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

세계 M&A 시장은 2000년대 들어 꾸준히 성장하다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발생 후 큰 폭으로 하락세를 겪었다. 그러다 미국 등 주요국의 양적 완화 정책으로 시중에 엄청난 규모의 유동성이 풀리면서 다시금 반등의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

세계 각국 기업들도 금융위기 여파로 시장에 매물로 나온 알짜배기 기업들을 사들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 특히 지난 수 년 사이에는 천문학적인 규모의 실탄을 가진 중국 기업들이 세계 M&A 시장의 큰손으로 등장한 바 있다. 원하는 매물이 눈에 띄면 왕성하게 먹어 치우는 중국 기업 덕분에 세계 전체 M&A 시장도 호황을 구가하게 됐다.

그런데 최근 들어 세계 M&A 시장 판도에 큰 변화가 생기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대목은 식욕이 넘치던 중국의 기세가 한풀 꺾이고 있는 가운데 일본이 신흥 강호로 급부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 기업들은 미국과 유럽 정부의 기술유출 차단 움직임이 강화되면서 해당 선진국 기업 M&A에 상당 부분 제동이 걸린 상태다. 반면 일본 기업들은 그런 제약으로부터 자유롭다.

미국 M&A 시장서 최대 매수자

특히 중국 기업들은 자국과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에서 시도하던 굵직굵직한 M&A가 잇달아 무위로 돌아갔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집중적인 견제 때문이다. 중국 기업들이 차단당한 미국 M&A 시장은 일본 기업들의 무대로 변하고 있다. 외신에 따르면 2018년 일본 기업들의 미국 기업 M&A 건수는 일본의 ‘미국 쇼핑’이 절정에 달했던 1990년에 필적하는 수준이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2018년 상반기 일본 기업들의 해외 기업 인수합병 실적은 약 1122억 달러 규모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일본 기업들이 M&A 대상으로 삼은 기업들은 대부분 미국(40%)과 유럽(30%) 지역에 집중돼 있다. 또 M&A 대상 업종은 정보기술(IT), 의료 등 고부가가치 분야가 상대적으로 비중이 높다는 분석이다.

일본 기업들의 해외 M&A 금액과 비중은 2010년 이후 지속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2012년 두 번째로 집권한 아베 신조 총리가 양적 완화 및 엔저 정책을 펼치면서 기업들의 실적이 개선되는 등 경영환경이 유리하게 변한 것이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일본 기업들은 1990년대 초부터 이어진 ‘잃어버린 20년’ 동안 생존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이 과정에서 비용 절감, 인력 및 사업 구조조정 등을 통해 체질을 강화했다. 그런 터에 양적 완화와 엔저 효과 덕분에 수익성까지 개선되면서 투자 활동을 위한 여력도 늘어났다. 이렇게 마련된 실탄으로 해외 기업 M&A에 공세적으로 나설 수 있게 된 것이다.

LG경제연구원 이지홍 연구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 기업들이 보유한 현금 규모는 2017년 9월말 기준 무려 200조엔에 달하고 있다. 아울러 일본 기업들의 투자 규모도 2014년 이후 해마다 꾸준하게 증가하고 있다. 이 같은 투자 확대 추세에 따라 해외 기업 M&A도 활발해지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내수시장 한계 넘어 적극 활로 모색

일본 기업들은 세간의 시선을 집중시킨 초대형 M&A 거래도 여러 건 성사시켰다. 일본 대표 IT 기업 중 하나인 소프트뱅크는 2016년 영국 반도체 기업 ARM을 무려 3조3000억엔에 인수해 큰 화제를 뿌렸다. 당시로서는 일본 기업 사상 최대의 빅딜이었다. 소프트뱅크는 미국 3대 이동통신사인 스프린트, 세계 최대 차량 공유업체 우버의 지분을 사들여 대주주 지위를 확보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소프트뱅크의 단일 M&A 최대 금액 기록은 올해 깨졌다. 지난 5월 다케다약품공업이 세계적인 희귀질환 전문 제약사인 샤이어를 약 7조엔에 인수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소프트뱅크의 ARM 인수보다 2배 이상 규모가 큰 천문학적인 빅딜이다. 다케다약품공업은 샤이어 인수를 통해 단숨에 세계 10위권 제약회사로 도약할 전망이다.

향후 일본 기업들의 해외 M&A는 더 활발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특히 일본 사회가 저출산/고령화로 인구가 점차 감소하면서 내수시장이 위축되고 있어 기업 입장에서는 해외에서 활로를 모색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자본시장연구원 관계자는 “일본 기업들이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노동력 부족, 임금 상승 등 문제에 직면하면서 해외 M&A를 경영전략 측면에서 중요한 수단 중 하나로 생각하게 됐다”며 “일본의 저금리 기조 덕분에 자금 조달 부담이 높지 않은 것도 해외 M&A 활성화에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김윤현 기자 unyon21@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