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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승용의 해양책략… ⑬ 해운강국 그리스와 해운왕 오나시스

대공황期 해운사업 올인 ‘선박왕’ 오나시스… 그리스 선단·선박 발주량은 지금도 세계최고
  • 그리스.
그리스 신화는 유럽 문화의 근원이다. 소프트웨어가 강한 아테네와 하드웨어가 강한 스파르타가 지중해를 호령했던 나라다. 동양에서 유럽으로 침공해 오던 페르시아를 살라미스해전에서 아테네 사령관인 테미스토클레스가 강력한 해양력으로 물리친 나라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위대한 철학자의 나라이며, 르네상스의 원형을 보유한 나라다. 고대 폴리스 시대부터 그리스 반도는 산지가 많고 토지가 척박해서 외부에서 곡물과 생필품을 해운으로 수입해야 했다. 해양에 대한 도전은 그리스인들에게는 ‘생득권 inherent right’이다. 그래서 해운업은 그리스의 젖줄 산업이다. 그리스와 우리나라는 둘 다 반도 국가로서 지리적 특성이 유사하다. 구불구불한 리아스식 해안선의 길이도 그리스는 1만3676km, 우리나라는 1만4963km로 엇비슷하다. 위도도 그리스는 북위 34°∼42°이며, 우리나라는 북위 33°∼43°로 비슷하다. 섬이 많다. 그리스는 6000개, 우리나라는 3300개다. 육지면적은 그리스 13만1957㎢, 남한 10만㎢로 엇비슷하다. EEZ 면적도 그리스 50만5572㎢, 우리나라 47만5469㎢이다. 다만 인구는 우리나라가 5배 정도 많다.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지정학적 위치도 비슷하다. 그리스는 과거 로마제국 오스만제국 등과 이웃해 왔다. 우리나라는 중국, 러시아, 일본 등 강자들과 이웃한다. 현대사에서 군사독재와 민주화 과정을 겪었고, 좋은 지도자를 만났을 때 번영했고, 그렇지 못했을 때 추락했다.

두 나라 모두 IMF 구제 금융을 받았다. 우리나라는 불과 4년 만(1997년 12월 IMF 195억 달러 구제금융, 2001년 8월 상환 완료)에 졸업했다. 그리스는 2010년 재정 위기로 디폴트를 선언하는 국가 부도 직전에 처했다. 국제 채권단으로부터 3차례에 걸쳐 약 2750억 유로(약 3 100억 달러)의 구제 금융을 받았고 8년여의 금융위기와 산업구조조정의 힘든 시간을 보냈다. 두 나라 모두 과거부터 해운업과 조선업이 발달했다. 오나시스는 그리스의 해운 왕이자 선박 왕이었고, 세계 최고의 부호였다. 정식 이름은 아리스토틀 소크라테스 오나시스(Aristotle Socrates Onassis, 1906∼1975)다. 세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한 명의 이름이다. 그리스인이라 아리스토텔레스와 소크라테스가 이름에 들어가 있지만 그의 생애는 철학자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두 가지 이유로 역사에 회자되는 인물이다. 그가 보유한 유조선과 화물선의 선단은 웬만한 국가의 해군보다 더 많은 선박을 보유했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암살당한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미망인 재클린과 결혼해서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점이다. 그 오나시스를 요즘 그리스는 그리워하고 있다. 한 마디로 경제침체에 빠져있는 그리스가 앞으로 경제적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제2, 제3의 오나시스가 나와야 한다는 논리다. 민간보다는 언론과 정부에서 더 많이 나오는 목소리다.

20세기 그리스 해운조선업계는 3대 타이쿤이 이끌었다. 스타브로스 리바노스(Stavros G. Rivanos, 1891∼1963)와 함께 아리스토틀 소크라테스 오나시스와 스타브로스 니아르코스(Stavros Niarchos, 1909∼1996)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이 동 시대에 활약하면서 그리스 해운업을 세계 최강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3대 타이쿤들은 서로서로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지만, 연배가 한 세대 앞선 리바노스의 딸들과의 결혼으로 혈연관계로 엮어졌다. 리바노스는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오나시스는 1946년 리바노스의 둘째 딸 아시나 리바노스와 첫 번째로 결혼했고, 1960년에 이혼했다. 아시나 리바노스는 오나시스와 이혼한 후 니아르코스의 다섯 번째 배우자로 재혼했다. 오나시스와 평생 경쟁관계이자 동서관계였던 니아르코스는 이미 리바노스의 첫째 딸인 유지니아 리바노스와 결혼했던 터라 오나시스와 친 동서관계였지만 처제인 오나시스의 부인과 결혼했으니 묘한 집안이다.

니아르코스는 삼촌들이 경영하는 제분공장의 밀 운송비를 절감하려고 화물선을 사들인 것이 계기가 되어 30살에 선박회사를 차렸다. 공교롭게도 그의 성 ‘니아르코스’는 선주(船主)를 의미한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회사가 성장을 거듭하자 그는 거대한 유조선들을 가급적 많이 구입하고 건조하겠는 경영 방침아래 한때 80척이 넘는 유조선을 운영할 정도로 크게 성공했다. 오나시스와 니아르코스는 둘 다 세기의 바람둥이로 불릴 정도로 여성 편력도 화려했으며 이마저도 경쟁 관계였다. 니아르코스는 해군 제독의 딸, 포드 가문의 여성 등과 다섯 번 결혼했다. 리바노스의 아들 조지 리바노스는 우리나라 조선산업 출발을 만든 인연으로 우리나라와 관계가 각별하다. 1971년 정주영 회장이 영국 바클레이 은행으로부터 차관지원 조건으로 요구받은 것은 선박 수요자 확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해운왕의 대를 이은 조지 리바노스 회장이 26만톤 유조선 두 척 건조를 발주했다. 이후에도 조지 리바노스 회장은 총 15척의 유조선을 현대중공업에 발주하였고, 그 덕에 현대중공업은 조선업 세계 1위에 등극했다. 현대 가와 리바노스 가는 대를 이어 좋은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부유한 담배상인이었던 오나시스 일가는 당시 그리스의 도시였던 스미르나(지금은 ‘이즈미르’)가 1923년 터키에 의해 점령당했을 때 거의 모든 것을 잃었다. 이즈미르는 이스탄불의 남서쪽 336km에 위치하여 에게 바다에 면한 터키 제3의 대도시이자 제1의 수출무역항이다.

오나시스는 바다를 보고 자랐고, 항구에서 무역과 해운업의 꿈을 키웠을 것이다. 그리스로 탈출한 오나시스 가문은 더 나은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오나시스를 남미로 보냈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야간 전화 교환수가 된 오나시스는 집안 친구의 도움을 받아 낮에는 담배 수입업을 시작했다.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오리엔트산 잎담배의 사용을 10%에서 35%로 증가시켰다. 오나시스는 2년 만에 잎담배 판매에서 얻은 5%의 수수료로 10만 달러의 돈을 벌었다. 그리스 정부는 1928년 상업적 수완과 대인관계가 탁월한 오나시스에게 아르헨티나와의 무역협정을 위한 협상을 위촉하고 그를 총영사에 임명했다. 그는 궐련 제조와 여러 가지 상품의 교역에까지 사업을 넓혀나갔고 25세가 되었을 때 이미 100만 달러의 재산을 모았다. 세계 경제가 대공황에 빠진 1930년대 오나시스는 한계에 이른 담배 사업을 접고, 해운 사업에 착수했다. 1932년 오나시스는 캐나다 회사로부터 6척의 화물선을 12만 달러에 인수했다. 해운업으로의 첫 진출이었다. 오나시스는 인수한 화물선 6척 가운데 2척에 아버지 ‘소크라테스 오나시스’와 어머니 ‘페넬로페 오나시스’의 이름을 붙이고 해운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오나시스가 해운업에 뛰어든 1932년은 세계경제가 불황에 허덕이던 때였다. 세계 해운 물동량 역시 급감하며 해운업계는 위기에 빠져있었다. 처음 구입한 7000톤급 화물선이 폭풍우로 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 앞바다에서 침몰되는 등 난항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특유의 투자전략으로 선박량을 늘려나갔다. 경영난에 빠진 ‘캐나다 국영 증기선사’로부터 대형 화물선 6척을 총 12만 달러에 사들인 것이다. 해운업이 극심한 불황에 빠진 상황이어서 1척당 가격이 200만 달러에 달하던 선박들을 고철 값에 구입할 수 있었다.

원유수송 시장의 성장 잠재력에 주목한 오나시스는 1938년에 첫 대형 유조선(1만5000DWT급 아리스톤 호)을 건조했고,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2척의 유조선을 추가했다. 그의 선박 왕국은 성장을 거듭했다. 1940~1950년대를거치면서 선단은 크게 불어났다. 전쟁 중에 부호 난다는 말대로 오나시스는 제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물자수송에 적극 협력했다는 이유로 독일 U보트의 공격을 받아 보유한 선박의 반 이상을 잃었지만,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소득세 면제 등의 특별 혜택을 받아내기도 했다. 오나시스는 전후 복구사업으로 큰 수익을 내면서 그의 해운제국을 본격적인 궤도에 올려놓았다. 1950년대 중반 오나시스는 1년에 17척의 새 유조선을 구입하기도 했다. 미국 시민권을 가진 두 아들의 명의로 뉴욕에 해운회사를 설립하여 미국의 ‘잉여선박 처분법’을 적극 활용했다. 즉 전투에 투입됐던 여러 척의 선박을 헐값에 사들였고, 융자를 통해 미국 조선사에 대형 탱커 6척을 발주하는 등 ‘오나시스 패밀리 해운왕국’을 구축하였다. 오나시스의 탱커 선대는 석유회사들과의 장기용선계약을 통해 번영하였다. 오나시스는 미국과의 관계를 기초로 1954년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생산되는 석유수송의 독점계약을 맺음으로써 당대 최고의 갑부가 되었다. 이는 안정적으로 원유를 수송할 수 있는 유조선 선단을 원하던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와 대형 유조선 선단을 거느린 오나시스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1957~1974년에는 그리스 국영 항공회사인 올림픽 항공을 그리스 정부로부터 양도받아 경영하기도 했다. 이는 정부가 한진해운과 대한항공을 불하했던 우리나라 사례와 비슷하다.

1968년 10월 17일, 그리스 서쪽 이오니아 해에 자리한 작은 섬 스코르피오스 섬에선 지구촌의 관심을 모은 결혼식이 열렸다. 해운왕 오나시스와 미국의 퍼스트레이디였던 재클린 부비에 케네디의 결혼이었다. 당시 오나시스는 세계적인 갑부였고, 재클린은 1963년 11월 22일 암살당한 35대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미망인이었다. 세기의 결혼식으로 불린 오나시스와 재클린의 결혼식이 있기 15년 전으로 돌아가 보면 또 하나의 유명한 결혼식을 마주하게 된다. 1953년 9월 12일 미국 로드아일랜드 뉴포트의 한 성당에서 명문가 출신의 24세 여기자인 재클린과 잘생기고 촉망받는 36세의 하원의원으로 훗날 미국의 대통령이 된 존 F. 케네디는 평생을 기약했다. 이 젊은 정치인은 이후 미국의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만들려는 소련 흐루쇼프 수상의 도발을 막아내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재클린 역시 미국 상류층 사교계의 대모, 뛰어난 출판 사업가, 자신의 이름이 붙은 패션을 만들어낸 매력적인 여인으로서 세간의 관심을 이끌도 다녔다. 퍼스트레이디 시절 ‘미국의 연인’으로 불릴 정도였다.

이런 이유로 전 남편인 존 F 케네디보다 한참 못생기고 나이도 많은 데다 사생활마저 복잡했던 오나시스와 결혼한 재클린에 대한 비난의 소리도 클 수밖에 없었다. 미국 국민들 사이에서는 “케네디 대통령이 두 번 저격당했다”고 평하는 사람도 있었다. “가지고 싶었던 것은 모두 가질 수 있었다”는 오나시스의 말에서 드러나듯이 그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막대한 재력을 쌓았다. 권위와 명예의 상징이던 미국 대통령의 미망인을 아내로 맞이할 정도로 그의 재력은 막강했다. 오나시스는 62세였고, 재클린은 23세 연하인 39세였다. 많은 사연이 있겠지만, 재클린은 많은 미국인에게 ‘영원한 퍼스트레이디’로 기억되는 명예보다 재산을 선택한 셈이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화려했지만, 7년여의 결혼생활은 그렇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재클린은 많은 시간을 여행과 명품쇼핑에 투자하며 가십지의 표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그들의 결혼에서 특히 관심을 끈 것은 그 유명한 ‘혼전계약서’였다. 현대 재정·법률문서 가운데서 가장 큰 화제를 부른 문서다. 전문이 100개 조 이상으로 이루어진 ‘혼전계약서’는 금전 문제에서부터 침실 문제에 이르기까지 망라되어 있었다. 계약서에는 부부가 언제나 침실을 따로 쓸 것이며 재클린은 오나시스의 아이를 낳을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것도 규정되어 있었다.

오나시스는 1975년에 사망했는데, 그가 남긴 유산은 5억 달러였다. 요즘 가치으로 치면 적어도 50억 달러 이상에 해당할 것이다. 오나시스가 세상을 떠날 즈음 두 사람은 이미 이혼 소송 중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인 테드 케네디가 개입하여 작성한 재클린의 유산 몫은 1억5000만 달러(약 1800억 원)였다. 나머지 대부분의 재산은 오나시스의 유일한 혈육인 딸 크리스티나에게 돌아갔다. 재클린은 69세로 생을 마감한 후 오나시스 옆이 아닌 알링턴 국립묘지의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 옆에 묻혔다. 오나시스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오나시스의 연인이었던 마리아 칼라스는 곧바로 은퇴한 뒤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그리고 오나시스가 숨진 2년 뒤인 1977년, 칼라스도 오나시스의 뒤를 이어 세상을 떠났다. 그리스 해운업은 선박 왕 오나시스 이래 세계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영국 해운조사기관인 베셀즈 밸류의 선박량 비중은 2020년 1월 현재 그리스 17%, 일본 12%, 중국 10% 등이다. 특히 오나시스가 이룩한 탱크선 선대는 여전히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국가별 선박 발주량에서도 그리스는 중국, 일본, 한국, 싱가포르 등과 함께 점유율 톱5 국가에 속한다. 그리스는 현대중공업의 최대 고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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