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세계 해상무역 장악… ‘금융 메카’ 뉴욕 맨해튼 英에 넘긴후 쇠락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함대.

이베리아 반도의 포르투갈과 스페인 다음에 등장한 해양강국은 네덜란드였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977>에서 ‘1650년 세계의 중심은 조그마한 홀란드, 아니 암스테르담이었다’고 기술했다. 네덜란드는 대항해 시대의 선두주자였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제치고 동방 무역의 중심 허브가 됐다. 네덜란드의 해운업과 조선업은 동방무역을 이끈 쌍두마차였다. ‘낮은 Neder 땅’이라는 국가 이름대로 네덜란드는 해발 1미터 이상의 땅이 국토 면적의 35%에 불과하다. 간척지를 파도로부터 지키기 위해 제방을 쌓아야 할 정도로 자연의 악조건과 투쟁해야 했다. 네덜란드를 일본과 중국은 홀란드(Holland, 네덜란드 발음으로는 ‘홀란트’)라고도 하는데, 홀란드는 네덜란드의 한 주(州)의 이름이다. 홀란드 주 안에는 암스테르담, 헤이그, 로테르담 등 대도시가 몰려 있다. 한 마디로 네덜란드의 정치 경제 문화 중심을 이루는 지역이다.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수도권인 셈이다. 현재 네덜란드 국토 중 17% 이상은 16세기 이후 수세기 동안 간척 매립한 땅이다. 인구밀도는 1㎢당 416명으로 대단히 높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신이 세상을 만들었다면, 네덜란드는 네덜란드인들이 만들었다’고 자랑스러워한다. 프랑스인들이 ‘신이 가장 기분 좋을 때 만든 게 프랑스다. 신이 가장 기분 나쁠 때 만든 것이 프랑스 사람이다’라는 말과 묘하게 대비된다. 네덜란드의 역사는 물과 싸운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살아가야 할 땅은 스스로 만들어 간다는 정신으로 수천 년 동안 마부위침(磨斧爲針,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든다는 고사성어)처럼 아버지가 못하면 아들이 하고, 아들이 못하면 다시 손자가 대를 이어 국토를 건설했다. 그래서 네덜란드의 역사는 ‘모험^도전^혁신^협력’의 역사다. 국토는 작고 천연자원도 없었기에 네덜란드인들은 불굴의 정신력을 키웠고 자기 통제력을 발휘했다. 바다의 도시였던 베네치아 공화국의 국가발전모델이 유럽 중심부인 네덜란드에서 화려하게 재생되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주로 개신교도들인데, 1568년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에 저항하는 민족독립운동을 일으켰다. 부의 축적을 죄악시하는 중세적 가치관으로부터의 해방과 종교적 자유를 추구했던 네덜란드의 칼뱅주의는 경제 발전을 이끄는 근대적 가치관이 됐다. 네덜란드는 80년의 투쟁 끝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다. 사람들이 영국인을 묘사할 때 ‘바다에 마음이 끌렸던 것 drawn to the sea’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네덜란드인들에 대해서는 ‘바다로 내쫓겼다 driven to the sea’라는 표현이 적합하다 할 것이다. 네덜란드인은 바다에서 생존과 활로를 찾아야 했는데, 마침 북유럽 수산자원의 핵심인 청어가 발트 해로부터 북해로 이동한 덕에 먹고사는 문제가 많이 풀리게 된다. 이를 두고 저명한 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셜은 ‘암스테르담의 건설은 청어의 뼈 위에서 이루어졌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어업의 발전은 네덜란드의 초기 자본 축적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이를 바탕으로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순식간에 금융^조선^해운^수산 대국이 되어 세계바다로 진출하였고, 세계해양항로의 주역으로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로 부상했다.

16세기 초 스페인의 통치를 받던 시절, 자원도 없고 비좁은 땅이었던 네덜란드는 포르투갈, 스페인에 이어 해양강국의 길에 들어섰다. 대항해시절로 불리는 이 시기에 이뤄진 신항로개척과 신대륙 발견으로 세계무역의 중심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옮겨졌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기 직전 네덜란드는 발트 해 물류의 75%를 장악했다. 선원의 숫자만 해도 스페인, 프랑스, 영국을 합친 것보다 많았다. 네덜란드는 스페인처럼 무역항로를 개척하지도 않았고, 도시 발전도 변변치 못했다. 그러나 상선들이 이곳을 거치기 시작하고, 거대시장이 형성되면서 삼각무역이 본격화되었다. 교역비용이 절감되는 무역방식이기 때문이었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표준화된 ‘교역소’를 설립했다. 교역소는 오늘날 상공회의소와 비슷한 성격이다. 교역소는 다양한 상품의 샘플을 전시하고, 가격, 교역시간, 장소 및 대금지불방식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다. 마침내 1609년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가 설립됐다.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였으며 세계금융의 중심으로 자립잡았다. 당시 상인들은 상품을 인도받고 곧장 대금을 지불하는 대신 차용증을 썼다. 이 차용증은 시간이 흐르면서 수표로 발전됐다. 16세기 후반에는 지중해지역 은행들이 옮겨 왔고, 1609년 암스테르담은행 탄생으로 이어졌다. 암스테르담은행에서 발행된 은행권은 유럽 전지역에서 유통하는 중심화폐가 되었다. 암스테르담은 이로써 국제무역 중심지가 되었다. 16세기 후반 네덜란드는 영국과 힘을 합쳐 스페인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된다. 1588년에 네덜란드공화국이 성립됐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은 1710년까지 번성기를 누리게 된다. 그 성공의 비결은 ‘금융신용에 기반한 세계 무역 항로 장악’이었다. 네덜란드는 용병을 고용해 스페인과 싸우게 하고, 자신들은 바다로 나가 더 큰 선단을 꾸렸다. 용병이나 대규모 선단에는 돈이 많이 들었지만 네덜란드에게는 능히 감당할 능력이 있었다. 스페인보다 네덜란드가 유럽 금융제도로부터 더 큰 신뢰를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큰 선단에 의한 대량 물류운송 덕분에 네덜란드는 세계 무역 항로를 장악하여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대출금을 갚을 수 있었고, 덕분에 신용도도 높아졌다. 암스테르담은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이자 금융메카로 급성장했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책 <사피엔스>에서 네덜란드가 금융시장의 신뢰를 얻은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그는 “하나는 기일 내에 전액을 상환했다. 둘째는 사법제도가 독립되어 있는데다 사유재산권을 철저히 보호했다”고 정리했다. 네덜란드 제국을 세운 것은 국가가 아니라, 상인이었던 것이다.


네덜란드의 금융과 관련된 책임신탁과 신용에 관한 ‘바렌츠 탐험대’ 일화는 유명하다. “1596년 화물을 가득 실은 네덜란드 상선이 암스테르담을 떠나 항해에 나섰다. 선장 빌렘 바렌츠(Willem Barents^1550~1597년)는 북해에서 동쪽으로 항해하여 아시아로 가는 북극항로 개척에 나섰다. 인도양 항로와 대서양 항로를 겨우 개척했던 16세기였기에 북극항로개척은 무모해 보였다. 탐험대는 극심한 추위 속에서 얼음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다. 바렌츠와 17명의 선원들은 7개월여 동안 혹독한 추위와 싸움을 벌였다. 동토에 올라 배의 갑판을 뜯어내어 움막을 짓고, 북극곰과 여우를 사냥하며 배를 채웠다. 바렌츠 선장을 포함한 여덟 명은 동사했다. 얼음이 녹자 간신히 귀국했는데, 배의 화물은 별다른 파손 없이 온전하여 네덜란드 국민들을 크게 감동시켰다.” 이 일화는 ‘책임신탁’의 상징이 됐다. 이 책임신탁 정신과 신용정신은 네덜란드 경제번영과 현대 기업제도의 근간이 된다. 노르웨이와 러시아 서북부 앞에 있는 해역인 북극의 바렌츠 해는 빌렘 바렌츠의 이름을 딴 것이다. 네덜란드의 황금기는 대략 1580년에서 1740년까지다. 스페인에 이어 ‘해가지지 않는 네덜란드’가 되었다. 당시 부의 축적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글로벌 해상 무역 덕분이었다. 이들은 향료와 이국적인 상품을 찾아 극동 지역에 배를 보냈고, 희망봉과 인도네시아를 식민 통치하며, 아시아 전역에 무역 지부를 설립했다. 나중에는 서인도 회사가 서부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로 진출하여 수리남, 안틸 제도, 뉴 암스테르담(오늘날의 뉴욕)을 식민지로 삼았다.

당시 유럽은 아시아 전역을 ‘동인도’라고 불렀다. 네덜란드 의회는 1602년에 무역회사 14개를 통합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의 설립을 승인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인들은 1603년 인도네시아에 도착했다. 이 회사는 인도^인도네시아^중국^일본과 무역을 할 목적으로 설립됐고, 더 많은 투자자를 모으기 위해 주식시장과 유한회사 개념을 도입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섬들은 하나하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수중에 떨어졌다. 네덜란드 정부는 1800년이 되어서야 인도네시아를 국영식민지로 만들었고, 이 체제는 150년간 지속됐다. 영국보다 2년 늦게 시작한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세계 최초의 다국적기업’,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였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자본금은 영국 경쟁사보다 10배 가량 컸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수익률 1000%의 대박을 내기도 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상선 150척, 군함 40척, 직원 5만 명, 군대 1만 명의 압도적 규모에 있었다. 당시에는 민간회사도 군대를 보유하고, 대포와 함선을 구비했다. 민간회사에 의한 제국 건설도 당연시됐다. 베네치아 은행을 본떠서 만든 암스테르담 은행은 18세기까지 유럽을 주름잡는 국제금융의 맹주였다. 1621년 네덜란드는 아메리카대륙의 상품과 노예를 사고 팔기 위한 ‘네덜란드 서인도회사(West India Company, WIC)’를 설립했다. 이로인해 카리브 해를 포함한 북아메리카와 인도, 동남아시아에서 영국과의 치열한 주도권 싸움을 펼치게 된다. 네덜란드는 영국의 지원으로 158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였기에 두 나라 관계는 우호적이었다. 두 나라는 향신료 무역의 선두주자였던 포르투갈^스페인과의 무역항로 쟁탈전에서도 공동보조를 취했다. 영국은 포르투갈의 인도항로를 강탈하여 후추 무역에 나섰고, 네덜란드는 값비싼 정향과 육두구를 독점했다.

1609년 영국인 허드슨이 뉴욕 만(灣)에 도달하여 맨해튼을 탐험하였고, 1612년 네덜란드 신대륙 식민지의 초대 총독이었던 페테르 미노이트가 원주민인 인디언으로부터 24달러에 맨해튼 섬을 매입하여 뉴 암스테르담이라 명명하였다. 현재의 뉴욕주 맨해튼은 매매계약에 반대하던 원주민 추장이 술에 취해서 토지매매계약을 해버렸기 때문에 ‘맨해튼(술주정뱅이라는 의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경영학의 ‘투자론’에서 유명한 문제가 바로 인디언 원주민한테 1612년 서인도회사가 지불한 24 달러의 ‘순 현재가치(net present value)’를 평가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미국이 1867년 미국이 알래스카 매입에 러시아에게 지불한 750만 달러의 순 현재가치를 평가하는 문제와 함께 유명하다. 당시 암스테르담은 러시아 표트르 대제가 벤치마킹하여 새로운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할 만큼 운하와 해양무역이 발전한 도시였다. 네덜란드는 맨해튼 섬 남단에 암스테르담처럼 운하를 건설했고, 북쪽과 서쪽으로 성벽을 쌓았으며, 남쪽 끝에는 포대를 두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이때 인디언들이 썼던 넓은(Broad) 도로인 브로드웨이는 그대로 두었다. 맨해튼 남단에 위치한 배터리파크는 남쪽 포대(Battery)에서 유래한 것이다. 네덜란드 서인도회사가 원주민과 영국인으로부터 식민지를 지키기 위해 세웠던 성벽(Wall)의 잔해 위에 깐 포장도로는 훗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금융거리인 ‘월스트리트(Wall Street)’가 되었다. 브로드웨이와 월스트리트 교차점 안쪽에 세계 금융 파워 하우스라고 할 수 있는 뉴욕 증권거래소가 세워졌다. 18세기 파리, 19세기 런던에 이어 20세기 이후에는 뉴욕이 세계 금융의 수도가 되는데, 그 역사의 이면에는 우연과 운명이 교차한다.

역사에서 ‘승자의 저주’는 흔하다. 전쟁의 승리가 쇠락의 길로 이어지는 경우다. 네덜란드는 세 차례에 걸친 영국과의 전쟁에서 외견상 승리했지만, 해외 무역활동은 큰 타격을 받았다. 1664년 영국함대와 붙어 허드슨 강 하구의 네덜란드의 북미 식민지인 뉴 네덜란드를 빼앗겼다. 그 중심도시인 뉴 암스테르담은 당시 영국 해군의 최고 지휘관인 요크 공의 이름을 따서 뉴욕으로 개칭되었다. 1667년 ‘브레다강화조약(Treaty of Breda)’으로 뉴 암스테르담이 영국에 할양되면서 네덜란드는 북미 기지를 상실하였다. 이때 네덜란드를 이끌던 요한 드 비트 총리가 주창한 외교논리인 ‘점령지 보유주의 원칙’에 따라 영국과 네덜란드간 조약이 맺어졌다. 영국은 수리남^포레론의 두 섬과 기아나를 네덜란드에 양보하고, 대신 뉴 암스테르담을 얻었다. 여전히 동인도 제도와 말라카해협에 대한 제해권은 네덜란드가 보유하였다. 이 당시 네덜란드 요한 드 비트 총리의 성공적 협상은 훗날 역사상 최악의 협상으로 평가가 바뀌게 된다. 네덜란드는 고급 향료 육두구의 산지인 인도네시아 반다제도의 ‘플라우 룬 섬’을 얻는 대신 영국에 뉴욕 맨해튼을 넘겨줬기 때문이다. (Stephen Weir, , Pier 9, 2008, pp.60-63) . 세계 경제의 수도가 되는 뉴욕을 말이다.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