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무적함대 격파 기념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초상화. 대영박물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시대는 세계교역과 항로의 개척 시대였을 뿐만 아니라 노예무역과 해적행위의 전성기였다. 영국의 ‘사략(私掠)함대’는 영국 해군력의 중추였고, 해적경제는 영국의 젖줄이었다. ‘사략함대’는 엘 여왕으로부터 적국의 선박을 공격하고 나포할 권리를 공인받은 개인 소유의 무장 선박이다. 정박의 자유, 선원과 물자의 보급, 약탈한 물건 거래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국가 공인 해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사략선장 출신인 존 호킨스는 1560년대에 서아프리카 해안에서 흑인 노예를 사들여 카리브 해 일대의 스페인 식민지에 파는 노예무역에 종사하였으며, 훗날 해적중심의 영국 해군을 결성하여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멸하는 데도 공헌했다. 영국인들은 이 노예 상인을 칭송했고, 엘 여왕도 선박을 대여하는 방식으로 그 사업에 참여했다. 그러나 1567년 출항한 3차 항해에서 스페인 측이 존 호킨스의 노예무역 선단을 공격하여 6척의 선박 중 2척만이 간신히 귀국할 수 있었다. 영국은 ‘호킨스 사건’에 분노했고, 그 후 영국 해적들은 보다 노골적으로 대서양에서 스페인의 무역선과 식민지를 습격하기 시작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그중 가장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인 인물이다. 이에 따라 스페인은 가장 많은 피해를 보는 국가가 되었고, 이런 해적행위에 분노한 스페인은 마침내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영국에 선전포고하기 전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영국을 회유하기 위하여 “해적선장 드레이크 처형, 펠리페 2세와 엘리자베스 1세 여왕 결혼, 영국의 네덜란드 지원 중단”을 요구했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영국의 해적함대가 해전을 벌여 해양제국의 운명을 바꾼 1588년 칼레해전의 배경을 살펴보자. 첫째는 가톨릭교의 스페인과 개신교의 영국이 쟁투한 종교전쟁이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본격화된 네덜란드의 독립 전쟁에서 엘 여왕의 영국은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를 지원했다. 그 결과 가톨릭을 국교로 한 스페인과의 관계에 균열이 생겼다. 그 무렵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로마 가톨릭교도인 메리 스튜어트는 장로교를 믿는 귀족들의 반란으로 어린 아들인 제임스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1568년 잉글랜드로 망명하였다. 엘 여왕은 평생 두 명의 메리 여왕 때문에 시달렸다. 두 명 다 가톨릭 신봉자이며, 하나는 엘 여왕 전임인 영국의 메리 1세 여왕이었고, 다른 하나는 스코틀랜드 여왕인 메리 스튜어트였다. 메리 스튜어트는 그 후 20년 동안 자신이 헨리 8세 누나의 적손임을 내세워 엘 여왕의 영국왕위를 찬탈할 온갖 음모를 꾸몄지만 1587년 암살 계획이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엘 여왕을 견제하던 메리 스튜어트가 처형되자 스페인은 해적도발을 핑계로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둘째 이유는 막강한 제국인 스페인 왕국 펠리페 2세의 청혼을 엘 여왕이 거절하면서 스페인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곧잘 ‘대영제국’을 떠올리나 역사상 가장 먼저 그런 제국을 건설한 나라는 펠리페 2세(재위 1556∼1598년)의 스페인이다. 펠리페 2세는 유럽과 아메리카 그리고 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와 7개의 바다를 통치했다. 필리핀도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중남미에서 채굴한 많은 양의 금과 은이 모두 그의 소유였다. 그 많은 금·은이 유입되면서 스페인뿐 아니라 유럽 전체의 총 통화량이 증가되면서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유발됐을 정도였다. 황태자 신분이었던 펠리페 2세는 1554년 영국의 메리 1세 여왕과 결혼하여 영국의 공동 군주가 되었다. 메리 1세 여왕은 엘 여왕의 직전 영국 군주였다. 그러나 메리 1세가 1558년에 일찍 죽는 바람에 그들의 정략결혼은 큰 성과 없이 끝났다. 오히려 메리 1세의 영국은 1558년 유럽대륙 최후의 보루인 프랑스 북부 칼레를 프랑스에 빼앗겼다. 칼레는 칼레해전으로 유명한 지명이지만, 훗날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도버해협 해저터널의 프랑스 측 출발점이다. 스페인 펠리페 2세와 엘 여왕이 얽히게 된 건 두 사람 사이의 혼담이었다. 메리 1세의 죽음으로 영국의 공동 군주의 지위를 잃게 된 펠리페 2세는 처제인 엘 여왕과 재혼하여 그 지위를 되찾고자 했다. 그러나 정국의 안정적 운영을 위해서 가톨릭과 신교의 교리를 통합한 중도적 종교정책을 추진하고 있던 엘 여왕으로서는 가톨릭의 맹주를 혼인 상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답을 주지 않았다. 비록 혼담이 성사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펠리페 2세는 엘 여왕에게 그다지 적대적이지 않았다고 한다. 영국 내 가톨릭 교인들은 끊임없이 반란 음모를 꾸미고, 교황에게 그녀에 대한 파문을 요구했다. 당시의 상황에서 파문은 ‘암살명령’과 다름없었지만, 이 위험천만한 조치를 강력하게 반대한 사람이 바로 펠리페 2세였다. 이 점에서는 펠리페 2세의 일방적 사랑이지만, 엘 여왕 보호를 위해 영웅적 판단을 한 셈이다.

셋째 이유는 영국의 해적활동 때문이었다. 엘 여왕은 영국의 국력이 스페인이나 프랑스에 한참 못 미친다는 것을 알고, 겉으로는 세력 균형 정책을 취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프랜시스 드레이크 등 해적들을 지원하여 스페인을 견제하는 양동정책을 추진하였다.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위시한 영국인의 해적행위는 스페인의 위신을 크게 추락시켰으며, 북미 및 중남미 해역에서의 영국의 식민 활동은 스페인을 자극했다. 스페인의 물자 수송선을 공격하여 금·은을 약탈한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비롯한 영국의 해적들은 단순한 도적이 아니라 재정난에 시달리던 엘 여왕과 영국 정부의 은밀한 지원을 받는 일종의 정부공인 벤처기업이었다. 엘리자베스가 항의하는 펠리페에게 공식적으로는 사과했지만 뒤에서는 드레이크에게 기사작위를 수여한 것이 스페인을 분노시켰다. 넷째 이유는 스페인에 대한 네덜란드의 반란을 영국이 지원한 것이다. 가톨릭교의 수호자를 자처한 펠리페 2세가 네덜란드의 개신교를 탄압하고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는 등 강압 정책을 펴자 이에 대한 불만으로 네덜란드는 1566년 반란을 일으켰다. 압제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된 반란은 점차 독립 전쟁으로 발전해 갔으나, 1578년 이후 남부와 북부가 분열하여 그 세력은 크게 약해졌고, 1584년경에는 북부 7개 주마저 분쇄될 처지에 놓였다. 이때 역사를 바꾼 것은 네덜란드를 간접 지원하던 전략에서 직접 지원하는 방식으로 전환한 영국 엘 여왕의 전략적 개입이었다. 네덜란드가 펠리페 2세의 수중에 들어가면 그것이 영국 침공의 발판이 되리라 판단한 여왕은 1585년 평생의 심복이었던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 경이 지휘하는 7000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네덜란드를 도왔다. 해상에서는 드레이크를 비롯한 해적해군이 스페인 인들을 공격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펠리페 2세 역시 네덜란드를 진압하려면 우선 영국부터 쳐야 한다고 판단했다. 1588년 영국을 제압하기 위해 스페인이 자랑하는 ‘무적함대(Armada)’가 영국의 남서단 실리제도 앞에 그 위용을 나타냈다. 그들의 목표는 영국해협을 장악하고 네덜란드에 주둔 중이던 스페인 육군 주력부대를 영국에 상륙시켜 철저하게 응징하는 것이었다. 엘 여왕의 영국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찰스 하워드 경을 사령관으로 하고, 존 호킨스, 프랜시스 드레이크 등 해전의 맹장들을 배치하여, 전함 80척, 병력 8000명으로 싸우게 하였다. 스페인의 펠리페2세는 전함 128척, 수병 8000명, 육군 1만 9000명, 대포 2000문을 가진 대 함대를 편성하고,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최신식 대형대포로 중무장한 130척의 무적함대를 맞닥뜨린 영국 함대는 민간 상선과 해적선이 절반 이상이었다. 승패의 향방은 뻔해 보였다. 그러나 막상 전투가 시작되니 불타오르거나 침몰한 배는 스페인 함선들이었다. 세계사를 바꾼 칼레해전의 승패를 가른 요인을 몇 가지 요약해 보기로 한다.

첫째, 양국의 왕이 전쟁에 임하는 자세가 달랐다. 펠리페 2세는 이 전쟁을 통해 자신이 유럽의 진정한 최고지배자라는 위상을 과시하려 한 전쟁이었다. 이에 반해 엘 여왕에게 이 전쟁은 국가생존이 걸린 전쟁이었다. 둘째, 프로와 아마처럼 일선 지휘관의 능력 차이가 확연했다. 엘 여왕은 전선의 사령관을 해적 출신인 존 호킨스와 프랜시스 드레이크 등 해전의 프로들로 채웠고, 전장에서의 작전권을 위임했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1571년 레판토 해전의 영웅들인 돈 후안과 알바로 데 바산의 충고와 전략을 무시했고, 끝내는 해전경험이 전혀 없었던 메디나 시도니아를 사령관에 임명했다. 더욱이 사령관 메디나 시도니아의 전쟁작전보고서 사전 공개유출은 패배를 자초한 악수였다. 셋째, 전략의 차이였다. 스페인함대는 영국본토 상륙작전에 우선순위를 뒀는데, 막상 해전에서는 방해가 됐다. 드레이크의 기습공격, 찰스 하워드 경의 화공전은 승리를 위한 전략이었다. 넷째, 전력차이가 컸다. 같은 갤리언 함선이라도 기동력과 장착된 대포성능이 달랐다. 스페인의 갤리언은 선체가 크고 중단거리포를 장착, 백병전에 어울렸다. 반면 영국의 갤리언 함선은 민첩했고, 장거리 함포사격 및 포병 전에 유리했다. 스페인은 고가의 청동대포를 고집했지만 영국은 자체 기술개발로 저가의 주철대포를 제작했다. 스페인은 화약과 대포를 돈으로 샀지만 영국은 기술을 독자적으로 개발·축적했다. 영국해군은 존 호킨스의 주도하에 통일된 지휘 전달체계를 구축했고, 함포전술을 개발했다. 스페인이 육군 위주의 진용인데 반해, 영국은 기동력이 뛰어난 해군 중심으로 짜여졌다.

다섯째, 작전해역과 병참에서 홈그라운드인 영국군에 유리했다. 여섯째, 장기간 준비한 자의 승리였다. 스페인이 레판토 해전 이후 승자의 오만에 빠져 전력유지를 등한히 하는 사이, 영국은 100여 년 동안 해군력을 키웠다. 영국은 헨리 7세(재위 1485~1509년) 때부터 해군 함대를 육성하기 시작했고, 헨리 8세(재위 1509~1547년) 때는 갤리언 전함을 개량했고,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는 존 호킨스 주도하에 영국 형 갤리언 함선을 개발했다. 일곱째, 칼레해전은 해전보다 전쟁비용 내지 국가채무 싸움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당시 스페인의 국가재정은 위기상태였고, 국가채무가 급증했다. 칼레해전을 준비하면서 영국의 엘 여왕은 영국 상인들이 스페인 왕실에게 빌려준 차용증을 모조리 동원해 일시에 갚을 것을 요구했다. 칼레해전의 승패를 가른 치명적 금융전략이었다. 스페인은 전쟁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출전 전함 수를 3분의 1로 줄였고, 줄어든 무적함대는 더 이상 무적함대가 아니었다. 영국 해군이 능히 이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영국은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면서 단번에 일류 해양강국이 되었다. 30여년간(1567~1604년) 지속된 영국과 스페인의 해상패권은 유럽은 물론 세계사에 있어 전환점이 되었다. 역사상 세계 3대 해전은 살라미스해전(그리스 대 페르시아), 칼레해전(영국 대 스페인), 트라팔가르해전(영국 대 프랑스)이며, 이 중 두 개 해전인 칼레해전과 트라팔가르해전에서 영국이 승전국이 되면서 대영제국이 건설된 것이다. 무적함대의 패배를 통해 스페인의 해상무역권이 영국에 넘어갔고, 네덜란드가 독립과 함께 17세기 해양패권국가로 우뚝 서게 된다. 역사의 큰 그림은 그렇게 그려졌던 것이다.

칼레해전 이후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1598년에 죽었고,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또한 1603년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서 스코틀랜드 왕이었던 제임스 1세가 왕권을 이어받았다. 앙숙인 두 나라 수장이 죽으면서 전쟁으로 재정 문제가 가중됐던 두 나라는 1604년 런던평화협정을 맺는다. 영국은 스페인으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에서 벗어났고, 종교적 자유를 얻었다. 스페인도 얻은 게 많았다. 영국 해협과 항구들의 개방, 영국의 해적활동 전면 중단, 네덜란드 독립군에 대한 영국의 지원 중단이라는 결과를 얻는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한때를 풍미했던 스페인 무적함대의 명성 또한 저물어 갔고, 스페인의 국력도 점차 힘을 잃어갔다. 스페인이 힘을 잃어갈수록 영국은 힘을 얻었다. 영국의 해외전략이 다른 나라들의 식민지를 약탈하는 것에서 스스로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으로 바뀐 건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가장 큰 업적의 하나이다. 엘 여왕은 1603년 3월 24일, 45년의 긴 치세와 70년의 긴 삶을 마감했다. 죽을 때까지 군주의 품위를 흩뜨리지 않았다고 한다. 임종을 앞두고 여왕이 의회에서 행한 마지막 연설은 후세에 ‘황금의 연설’이라 일컬어지며,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갖춰야 할 백성에 대한 사랑, 덕목, 품위가 느껴지는 명연설이다.

“단언하건대 나만큼 국민을 사랑하는 군주는 없을 것이다. 신께서 나를 여왕으로 만들어 주신 데 감사하지만 내가 누린 가장 큰 영광은 백성의 사랑을 받으며 통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신께서 나를 왕좌에 앉히신 점보다 애정을 보내준 백성의 여왕이 되어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위험에서 구하도록 하신 점이 훨씬 더 기쁘다. (중략) 신께서 내게 주신 책무를 이행하고 신의 영광을 드높이며 백성을 안전하게 지켜야 한다는 양심의 명령이 없었다면 나도 이 왕관을 누구에게든 주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내가 백성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날까지만 살아서 통치할 생각이다. 나보다 더 강하고 현명한 군주는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지 모르지만 나만큼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는 이제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역사에서 위대한 지도자는 예외 없이 전쟁위기와 경제위기에 잘 대처했으며, 입장 때보다 퇴장 때 국가위상을 상승시켰다. 중앙일보 대기자 박보균은 ‘지도력의 구성 요소로 권력 의지와 야망, 승부와 결단, 시대정신과 비전, 역사적 상상력과 대중 장악력, 언어의 생산과 관리’를 꼽았다. 대영제국의 기초를 닦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리더십이 돋보이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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