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경 등극 크롬웰 ‘항해조례’ 통해 해군력 강화…영국이 세계패권 차지하는 ‘규범무기’로 작동

올리버 크롬웰.
인류역사를 되돌아보면, 걸출한 인물들이 동시에 나타나 한 나라는 물론 경쟁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고대 중국 삼국시대에 조조, 유비, 손권이 천하를 쟁패했던 것처럼 17세기 중후반 유럽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다.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 네덜란드의 요한 드 비트, 프랑스의 장 뱁티스트 콜베르 등 세 인물은 근세 유럽의 중심부를 놓고 쟁패했다.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1599∼1658년)은 청교도혁명을 일으킨 후 공화정을 세우고, 오늘날 대통령이나 수상보다 막강한 호국경(Lord Protector, 재임 1653∼1658년)으로서 통치했다. 17세기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정치지도자로 평가되는 요한 드 비트는 27세에 네덜란드 총리(재임 1653∼1672년)에 올랐다. 그는 영국과 전쟁을 하기도 했지만, 영국^프랑스^스페인 등 막강한 국가 사이에서 비폭력적인 교역조약 체결, 상호방위체제 구축 등 중립주의와 균형정책을 절묘하게 구사했다. 프랑스에서는 태양왕 루이 14세 왕권 하에서 장 뱁티스트 콜베르가 해군장관과 재무장관을 거친 후 재상(재임 1665∼1683년)에 올랐다.

이들은 호국경과 총리로서 탁월한 리더십과 책략으로 자국을 막강한 나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국제 교역을 크게 발전시키는데 발군의 능력을 발휘했다. 영국의 크롬웰과 프랑스의 콜베르는 ‘중상주의(Mercantilism)’를 해양책략으로 삼았고, 해군 체제 확립과 군함 건설로 자기 나라를 해양패권 국가로 키웠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중상주의의 대표적 이론가이기도 한 콜베르는 ‘한 나라의 부는 그 국가가 보유하는 금과 은의 양으로 결정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다른 나라로 금과 은의 유출을 막는 동시에, 국내 산업을 진흥하여 수출을 늘려서 금과 은을 축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콜베르는 보호관세주의를 도입하고, 산업에 국가가 개입하여 보호육성책을 펴 나갔다.

세 사람 모두 해양강국을 만들면서 근대국가 발전에 크게 기여했지만, 말년에 왕권의 질시와 견제로 비참하게 생을 마쳐 권력무상을 보인 점까지도 유사하다. 군주의 치세가 절정에 달했던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사후, 영국은 의회파와 왕당파 간의 갈등으로 ‘청교도혁명’(1640∼1660년)과 ‘명예혁명’(1688년)을 겪으면서 군주체제가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섰다. 엘리자베스 1세 이후 제임스 1세(재임 1605∼1625년)가 왕권을 물려받았고, 그의 아들이 문제의 찰스 1세(재임 1625∼1649년)다. 찰스1세는 왕권은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왕은 신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며, 인민은 저항권 없이 왕에게 절대 복종하여야 한다는 ‘왕권신수설’을 제창했다. 찰스 1세는 의회를 무시하고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려 했다. 당시 영국 의회에는 ‘젠트리(Gentry)’라고 불리던 신흥 상공업자와 자영농들이 대거 진출해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청교도로, 개신교 신학의 기틀을 다진 장 칼뱅의 교리에 따라 근면과 금욕, 절약과 검소함을 실천하는 사람들이었다. 젠트리 계층은 중산층이라기보다는 중상층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젠트리’는 오늘날 우리가 쓰는 ‘신사 (gentleman)’의 어원이다. 왕권신수설을 내세운 찰스 1세가 무력으로 의회를 제압하려 함에 따라 잉글랜드 내전(1642~1651년)이 발발했다.

‘난세에 영웅난다’는 말처럼 잉글랜드가 내전으로 치닫는 위기상황에서 올리버 크롬웰이 나타났다. 올리버 크롬웰은 1599년 잉글랜드 동부 케임브리지셔의 헌팅던에서 한 젠트리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로버트 크롬웰은 지주로서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때에 하원의원을 지냈다. 크롬웰은 케임브리지의 시드니 서식스 칼리지에서 공부를 했는데, 이때 청교도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뒤 런던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며, 1620년 런던의 부유한 상인의 딸인 엘리자베스 부처와 결혼해 5남 4녀를 낳았다.

크롬웰은 1628년 헌팅던에서 하원의원이 되었지만 찰스 1세는 의회를 해산해 버린 뒤 11년 동안 비워뒀다. 1642년 마침내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 영국내전이 일어나자, 크롬웰은 고향인 헌팅던에서 기병대를 조직해 군사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크롬웰은 철기대(鐵騎隊)를 이끌고 옥스퍼드를 포위 공격하여 1647년 1월 찰스 1세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1648년 의회파 사이에 분쟁이 일어난 틈을 타 찰스 1세가 와이트(Wight) 섬으로 탈주하면서 제2차 내전이 일어났다. 크롬웰은 1649년 찰스 1세를 처형하고 마침내 공화정을 세우는데 성공한다. 크롬웰은 국무회의 의장이 되자마자 왕당파의 중심지인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정벌에 나섰다. 당시 스코틀랜드에서는 찰스 2세(재위 1660~1685년)를 새로운 왕으로 인정하고 있었는데, 크롬웰은 1650년 9월 던바 전투에서 스코틀랜드 군을 물리쳤으며 1651년에는 잉글랜드로 공격해오는 찰스 2세를 우스터에서 물리쳤다. 결국 1651년 10월 찰스 2세가 프랑스로 탈출하면서 10년 동안 계속된 영국내전은 끝맺게 되었다.

1651년 10월 9일 영국 의회가 선포한 ‘항해 조례’의 겉장. 위키피디아

크롬웰은 영국 역사상 최초의 성문 헌법인 <통치장전(Instrument of Government)>을 제정하여 군주제를 폐지하고 영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공화정 (Commonwealth)’을 수립했다. 1653년 12월 16일 크롬웰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 세 나라를 통치하는 독재적 전권을 지닌 호국경에 등극했다.

호국경이 된 크롬웰은 자신의 지지기반인 중산시민, 즉 젠트리 층의 권익을 위해 ‘중상주의’를 펼쳤다. 그는 1651년 <항해조례>를 통해 네덜란드 중계무역상인들의 세력을 약화시켰고, 해군력을 강화해 나갔다. 크롬웰 정부는 초기에 39척의 군함을 갖고 있었는데, 네덜란드와의 해전을 위해 200척 이상의 군함을 건조했다. 영국은 이를 통해 세계 제해권과 식민지 개척에 좀 더 공격적으로 나설 수 있게 되었다.

로마제국이 만민법으로 세계를 지배했듯이, 강대국들은 세계규범인 통상법으로 세계무역 나아가서는 세계를 지배해 왔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도 ‘바다의 무역법칙으로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에 다름 없다. 세계해양을 제패하는 과정에서 당시 영국 해상권이 얼마나 강했는지 단적으로 증명한 법은 <항해조례 또는 항해법(Navigation Acts)>이다.

영국의 항해조례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리처드 2세가 1381년 제정한 항해법의 골자는 ‘영국 및 그 식민지의 재화수송은 영국 배 및 영국 선원에 의해서만 행할 수 있다’는 내용의 ‘국적선박 우선정책’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크롬웰이 공포한 유명한 1651년 항해조례이다. 1381년 ‘항해법’은 영국의 보유선단이 워낙 미미해 사문화됐지만, 300여년 후 올리버 크롬웰이 1651년 선포한 <항해 조례>와 1663년 <무역촉진조례>는 1849년 폐지되기 전까지 200년 동안 영국 해운업이 세계패권을 차지하는 규범무기로 작동했다.

크롬웰이 항해조례책략을 꺼낼 수밖에 없었던 근본원인은 잉글랜드의 해상통상과 경제상황 악화 때문이었다. 크롬웰의 집권 시기, 네덜란드와 스페인 간 벌어진 팔십 년 전쟁(1567~1648년)으로 인해 잉글랜드 무역은 크게 감소했다. 동시에 암스테르담이 유럽대륙의 허브 중계무역항으로 급부상했다. 당시 청교도 혁명의 마지막 단계에 있던 잉글랜드는 잉글랜드 본토와 서인도 식민지와의 무역조차도 네덜란드 화물선에 독점당한 상태였다. 더욱이 명예혁명 직전 잉글랜드 국채 금리는 잉글랜드 왕실의 빈번한 ‘채무불이행’ 때문에 10%를 훌쩍 넘었다. 급기야 1649년 잉글랜드 의회는 군대의 감축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시대상황은 크롬웰의 호국경 취임으로 귀결됐다.

1651년 크롬웰의 항해조례가 탄생하는 데는 잉글랜드 무역업계의 입법청원이 있었다. 예컨대 1648년에는 레반트 회사가 터키 상품을 네덜란드를 통하지 않고 생산지에서 직접 영국으로 수입해 달라는 입법청원이 있었다. 1650년에는 잉글랜드 무역위원회가 식민지 물품을 가져올 때 네덜란드 상선을 이용하는 걸 방지하는 법안을 입안하기도 했다. 올리버 크롬웰의 항해조례는 1651년 제정된 이후 중상주의 강화 차원에서 아홉 차례에 걸쳐 개정됐다. 항해조례는 잉글랜드의 무역을 잉글랜드의 배로 한정시킨 법이다. 항해조례는 전시에도 충분한 배를 확보할 수 있도록 하고,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하는 쪽으로 발전했다.

크롬웰의 항해조례에 따라 잉글랜드 식민지인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물품은 브리튼 제도와 북아메리카의 13개 식민지에만 보낼 수 있었다. 유럽 대륙에서 영국으로 향하는 상품은 영국 선박 또는 생산국 선박만을 통해야 했다. 유럽 이외의 식민지에서 영국으로 수입되는 상품도 영국선박만이 운송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국적선 이용규제법’이었다.

영국은 영국이 점령한 항구에 입항하는 선박은 모두 국적선이어야 한다고 공표했는데, 이는 영국의 식민지 무역 이권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급성장하는 네덜란드 해상무역으로부터 영국의 산업을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네덜란드 배와 네덜란드 상인에 의한 중계 무역을 배제하려는 ‘영국 제일주의 해운·통상책략’이었다. 그 항해조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오직 잉글랜드 혹은 식민지 배만 영국 식민지로 상품을 옮길 수 있다. ②잉글랜드 인(식민지 주민 포함) 선원이 최소한 절반 이상을 차지해야 한다. ③담배와 설탕, 직물과 같은 식민지의 상품은 오직 잉글랜드로만 팔 수 있다. ④식민지로 향하는 모든 상품은 잉글랜드를 거쳐야 하며 수입관세를 내야 한다.

국가 간 외교통상에서 영원한 적도 없지만 영원한 친구도 없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같은 개신교 국가로서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지만 유럽 내 로마 가톨릭교회 국가와 개신교 국가 간의 싸움인 30년 전쟁(1618~1648년) 이후 세계시장을 놓고 경쟁관계로 돌변했다. 당시 영국은 본국과 식민지 사이의 무역 활동이 활발해지는 과정에 있었는데, 이는 중계무역으로 세계무역의 절반을 차지했던 네덜란드와의 이해 충돌로 이어졌다. 당시 자금이 풍부했던 네덜란드는 영국에 막대한 채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영국이 항해조례를 무기 삼아 채무변제에 응하지 않자 전쟁을 선포했다. 이를 계기로 유럽의 주요 ‘해상 세력’이자 가장 강력한 신교 세력이었던 두 나라는 세 차례나 ‘영·네 전쟁(Anglo-Dutch Wars^1652-1674년)’을 벌이게 된다. 이 전쟁은 ‘무역 갈등은 언제든지 실제전쟁으로 비화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다. 요즘 미국과 중국간 무역갈등이 심각하게 펼쳐지고 있다. 두 나라간 국지적 무력충돌 가능성에 대한 얘기도 무성하다. 나라간 무역 갈등이 실제 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주간한국